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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loura Dec 02. 2022

제주도 여행기

P를 위한 J, J를 위한 P

창밖엔 온통 하얀 구름뿐이다. 얼마 만에 보는 광경인지 반질반질 빛나는 비행기 날개를 보고 있자니 그 감격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코로나가 터지기 한 달 전 다녀온 치앙마이를 마지막으로 한동안 타지 못했던 비행기를 드디어 타게 된 것이다. ‘여행’이라는 쉼표가 없으니 그동안의 3년이 일상으로만 가득 채워졌다. 그래서인지 지난 3년이 꼭 1년, 아니 불과 몇 개월이 지난 것처럼 시간 감각도 없어져 버렸다. 다행히 이번 제주도 여행으로 2022년엔 쉼표 하나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4박 5일의 짧은 여행을 함께 한 메이트는 예전 직장생활을 함께 했던 ‘김흥녀’ 언니다. 사소한 일에도 흥이 넘치는 흥녀 언니의 또 다른 별명은 김걱정 씨다. 미리 예약해둔 렌터카 업체에서 차량을 테슬라로 업그레이드해준다며 연락이 왔을 때 그 소식을 듣고 단숨에 ‘오예, 콜!’을 외친 나와 달리 언니는 전기차 운전에 적응할 수 있을지, 사고가 나면 훨씬 위험하다는데 과연 괜찮은 건지 블로그 후기를 싹 훑어보고, 왜 우리에게 차량 업그레이드를 시켜주는지 확인한 후에야 큰마음먹고 테슬라를 타기로 결심했다. 아, 도착해서 마음이 바뀌면 예전 차를 이용해도 되는지까지 확인한 건 언니에게 당연한 일. 기쁠 땐 그 누구보다 흥이 넘치지만 한번 걱정이 들면 저 밑바닥까지 땅 파고 들어가는 텐션이 꼭 마치 팽팽한 고무줄 같다.      


예상한 대로 흥녀 언니는 파워 J의 계획형 인간이다. P 중에서 그나마 J스러운 나는 ‘이 정도면 나도 J가 아닐까’ 싶다가도 여행 내내 언니의 움직임을 쫓다 보면 그 치밀함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하게 된다. 둘째 날 일정으로 마라도와 동백수목원만 생각하고 간 나에 비해 언니는 전기차 충전소가 어디 있는지, 다른 차가 이미 충전 중이면 어디로 가야 할지, 수목원에서 몇 시에 나와야 웨이팅이 어마어마한 고깃집에서 최대한 빨리 먹고 숙소로 돌아갈 수 있는지 등을 끊임없이 검색했다. 예상 시나리오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불안해하고 스트레스받다가도 계획대로 모든 게 맞아떨어질 땐 세상 개운한 표정으로 행복해하고 뿌듯해했다.      

계획대로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언니에게는 안타깝게도 이번 여행의 큰 변수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날씨’였다. 요즘엔 한라산 탐방도 예약해야 오를 수 있어서 3주 전부터 이미 정해진 일정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새벽부터 비가 와서 정상까지 오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래도 오후에는 비가 그칠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동이 트기도 전에 등산을 시작했다. 새벽 여섯 시부터 등산을 시작해 관음사 코스를 따라 백록담을 보고 성판악 코스로 하산하는 일정이었다. 이런 날씨면 백 프로 입산 통제라는 택시 기사 아저씨의 말 따위는 듣지도 않았다. 비는 거세게 쏟아졌지만 입산을 막진 않아 다행이었다. 산을 오를수록 빗줄기는 점점 옅어졌고 코스의 1/2 쯤 지나자 비는커녕 하늘이 너무 맑아 나뭇잎 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여기저기서 반짝였다. 우비를 벗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삼각봉 대피소만 지나면 그렇게나 멋지다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지도에 그려진 쉽다는 뜻의 노란색 코스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들 하는데 그 말은 틀렸다. 나는 슬픈 예감조차 들지도 않았다. 일기 예보에 강풍이 떡하니 쓰여있었지만 막연한 희망에 눈이 멀어 못 올라갈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안 해본 것이다. '날이 흐려서 백록담을 못 보면 어쩌지.' 라는 생각은 했어도 중간 대피소에서 올라온 길 그대로 다시 내려가야 할지 모른다는 시나리오는 아예 없었다. 아쉽기는 했지만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대피소에 앉아 바리바리 싸 온 짐을 풀고 컵라면을 먹었다. 홀짝홀짝 마시는 라면 국물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땀에 절어 축축한 옷을 벗어두고 코를 훌쩍이며 배를 채웠다. ‘역시 한라산은 처음 오른 사람한테 쉽게 백록담을 보여주진 않네.’ 그 이상의 생각이 딱히 들진 않았다. 그런데 우리 흥녀 언니는 상심이 꽤 컸는지 내려오는 내내 머리 위에 잔뜩 낀 먹구름이 따라다니는 듯했다. 투덜이가 되어버린 언니는 아쉬움에 어쩔 줄 몰라했다. 올해가 가기 전 언니의 버킷리스트였던 한라산 등반이 반쯤만 성공한 게 되어버렸으니 그 좌절감이 언니를 집어삼킨 듯했다.      



흥녀 언니의 짜증이 지속되자 불편함이 생겼다. 남은 여행을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 은근히 신경 쓰였다. 다행히도 언니는 숙소에 돌아와 안정을 찾았다. 계획한 일을 못하면 온종일 그 생각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는 자기 성격이 너무 힘들다며 고백을 가장한 사과를 했다. 그날 저녁 언니가 씻는 동안 나는 J에 대해 공부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문장을 찾았다.      


"J는 말 그대로 상황을 판단하는 성향이다. 따라서 계획했던 일에 변수가 생기면 일이 잘못된 거라 상황을 판단하고 처음 계획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으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라산에 오르기 위해 언니는 핫팩, 비상약, 파스, 우리가 묵을 숙소, 장비 대여까지 꼼꼼하게 준비했다. 그런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못 가게 된 상황을 ‘궂은 날씨 탓’이 아닌 ‘계획이 잘못된’ 상황이라고 받아들여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니 어쩐지 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거기에다 자신은 너무 속상한데 옆에 있는 상대방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별생각 없이 굴면 좀 얄미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내가 언니의 입장이 되었던 적도 분명히 있었다. 내가 열심히 준비한 걸 끝내 이루지 못해서 속상해하고 있을 때 ‘다음에 다시 하면 되지’라는 무심한 위로를 받으면 ‘누가 그걸 모르나. 지금 속이 상한 걸 어쩌라고’ 싶어서 오히려 더 짜증이 났던 기억이 지금 상황과 겹쳤다.     


비 오는 날 일곱 시간의 산행을 했음에도 물집 잡힌 곳 하나 없었던 건 언니가 준비해준 발가락 양말이 한몫했다. 언니는 내가 전날 밤 와인의 여파로 숙취 때문에 괴로워하자 주섬주섬 한방소화제를 꺼내 주었다. 자기 전엔 발갛게 익은 내 얼굴을 보고선 마스크팩을 내밀었다. 예정에도 없던 쇼핑으로 차 뒷자리에 귤껍질과 과자세트가 함께 나뒹굴 때도 차곡차곡 정리해두는 건 언니였다. 계획형 인간이 있으면 그 편안함을 누리는 건 옆에 있는 P라는 우스갯소리에 슬쩍 웃음이 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편안함을 누리기보다 스트레스에 짓눌리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다행스럽게도 다음 여행도 함께 하자는 언니를 보니 그래도 나와 함께 한 여행이 나쁘지만은 않았나 보다. 본인이 계획한대로 군말없이 잘 따르고 같이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내심 뿌듯하지 않았을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처럼  J 옆엔 P가 있어야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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