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샤갈의 '산책'(1917년). 샤갈의 연인이자 뮤즈였던 벨라는 작품 속에서 많이 등장한다. 공중에 떠있는 그녀의 사랑은 중력도 거스를 만큼 황홀한 것일까?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글을 썼다. 매일 이른 아침이면 그녀가 눈뜨기 전에 나의 카톡이 바빠졌다. 설렘과 두근거림이 반짝반짝 영감을 쏟아내곤 했다.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그녀의 모습과 닮아 있었고 내가 숨 쉬는 모든 호흡에서 그녀의 숨결을 더듬었다. 스마트폰 천지인 자판을 타고 나의 사랑은 넘실넘실 카톡카톡거렸다.
사랑하는 마음을 '사랑해'란 한 단어로 쓰는 바보가 어디 있나. 때로는 은유로 때로는 비유로 내 마음은 호수가 되기도 했고 그녀는 샤갈의 ‘산책’에 나오는 벨라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쓴 글은 카톡이라기보단 한 편의 시가 되거나 연애편지였다. 아니 노래라고 해야겠다. 매일 아침 그녀가 눈을 떠 스마트폰을 처음 열어봤을 때 새로운 하루 새로운 사랑을 알리는 세레나데가 되었다.
사랑을 하고 있을 때는 모두가 시인이며 작가가 된다. 삶에 은유가 넘치고 표현이 풍성해지며 언어가 마구 샘솟는다. 내가 참여하는 독서 모임에서 간혹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면 사랑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위와 같이 이야기하곤 했다. 누구나 한 번쯤 사랑하는 사람과 카톡을 나눈 경험이 있을 테니까.
그것은 뭔가를 쓰고 싶게 만들었던 순간이었다. 짧은 한 문장 카톡이겠지만 온 마음을 담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던 번뇌의 산물이었다. 그것을 읽어 줄 사람을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에이핑크의 '1도 없어'는 씁쓸한 노래지만 카톡에서 '1도 없어'지는 순간은 늘 짜릿했다. 글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 충만한 상태는 사랑이었다. 첫째, 표현하고 싶은 간절함. 둘째, 정성이 가득 담긴 문장. 셋째, 읽는 이를 생각하는 마음.
독서 모임에 유독 말이 없는 여성 회원이 있었다. 한 번은 나에게 글쓰기와 관련된 질문을 하길래 반가운 마음으로 또 사랑타령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다른 회원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귀띔하기를 최근에 실연 당하신 분이란다. 사랑은 얼어 죽을, 말문이 막혔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사랑으로 설레었던 감정을 상기시키고 앉았으니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는 다시 말이 없는 회원으로 돌아갔다. 말은 없었지만 표정이 아늑하게 서린 ‘말없음’이었다.
말없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하고자 하나 말하지 못함'이요 또 하나는 '말할 수 있으나 말하지 않음'이다. 그렇게 말문이 막혀서 몸이 애달프고 내적 갈등이 극에 달하면 비로소 ‘글문’이 터진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다'. 리베카 솔닛이 말했다. 어쩜 그렇게 글쓰기를 잘 정의했는지 모르겠다. 내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말없음의 글쓰기'다.
사랑이 ‘현재진행형’이든 ‘현재이별형’이든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사랑의 상태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그 간절한 표현 욕구를 십중팔구 '말하기'로 푼다. 세종대왕께서 세상의 모든 말을 표현할 수 있게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고 한글이라 했다. 다만 그것으로도 표현하지 못할 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말없음'이다. 말없음이란 비로소 글쓰기가 간절한 시점이 된다.
말이 없는 그 회원은 옆구리에 책이 하나 있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백세희의 에세이였다. 떡볶이를 좋아하냐고 물어봤더니 자신도 정신과 상담을 고민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그 책은 저자가 불안장애를 겪으며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을 주고받은 내용이 담긴 에세이다). 괜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내가 읽었던 에세이 몇 권을 추천해 주었다.
독서 모임 '언어의 정원' 사람들, 모임이 어려운 요즘, 그래도 가끔 화상과 카톡으로 만난다.
한 달 후, 모든 회원이 글쓰기 과제를 제출하는 날이 되었다. 유독 말이 없는 회원이 쓴 글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녀가 내민 원고의 제목은 ‘회상’이었다. 세 장 남짓한 원고의 몇 줄만 읽었는데도 가녀린 숨소리가 느껴졌다. 실연에 대한 글이었다. 느닷없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내용이었는데, 그냥 어두운 글이라고 하기엔 감정 선의 묘사가 치밀하고 선명했다. 흔들리면서도 중심이 잡힌 묘하게 진동하는 글이었다.
그 글은 아프지만 성숙했다. 애써 감미롭게 포장하지 않았고 원망하는 마음도 서슴없이 담았다. 아마도 이별을 부정하고 복기하고 뒤집어 보고 그러다 다시 받아들이며 오랫동안 뒤척인 가슴으로 쓸어낸 글의 위력일 것이다. 좋은 글은 자기 가슴을 뚫고 나와 남의 가슴을 적신다.
말이 없었던 그 회원이 쓴 글이 바로 '말없음의 글쓰기'였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말하고 싶었던 무언가가 오랜 가슴 앓이로 정제된 글이 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말로 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말이 되지 않을 때가 있고, 말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말로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으며,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 어떤 말없음의 상태에서도 글은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가 된다.
모두가 글을 써야 할 이유는 없다. 표현하고픈 간절한 진심이 있거나 오랜 말없음을 간직한 이는 드물다. 하지만 어떤 진심과 어떤 말없음은 그 주인이 글로 빚어내야만 존재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늘 수다스러운 사람이라도 어떤 질문엔 말문이 막히게 마련이다. 당신에게도 그런 질문이 있을까? 당신을 말없음으로 만드는 그 질문, 그 말없음이 당신도 글을 써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