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다 보면 어떤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럴 땐 질문을 하자.
그 질문 하나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구분할 수 있다.
새로운 부서로 발령을 받은 일 프로,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며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유독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한 가지 업무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주간 현황 보고서였다. 모든 현황 보고서가 그렇듯 매일매일 끝없이 바뀌는 여러 가지 항목을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정량화시키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아주 많은 데이터를 집계해야 하는데 어떤 것은 시스템에서 쉽게 뽑아낼 수 있지만 대부분은 가내 수공업처럼 작업자의 노력으로 한 땀 한 땀 숫자를 수집해 엑셀에 밀어 넣고는 뭔가 유의미해 보이는 정보로 가공해야 하는 무척이나 지루하고 기나긴 작업이다.
일 프로는 이 보고서를 위해 무려 8시간 이상 소요하고 있지만 이 보고서가 그렇게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아무도 하지 않았던 질문을 상사에게 하게 된다. "파트장님, 이 보고서는 반드시 작성해야 하는 걸까요?". 질문을 받은 이 파트장은 이 보고서를 이메일로 받는 수신자를 살펴봤는데, 자신을 비롯해 무려 8명의 상급자들이 이 보고서를 받고 있었다. 수신자의 비중만 놓고 보면 중요한 보고서였지만 정작 이 파트장조차도 이 보고서를 주의 깊게 살펴본 적은 없었다. 이 파트장은 다시 삼 그룹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룹장님, 이 보고서 계속 작성해야 합니까?". 삼 그룹장은 한참 동안 보고서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마침 지나가던 사 팀장에게 다시 물었다. "팀장님, 이 보고서 계속 작성해야 합니까?". 이렇게 상급자에서 상급자로 올라가던 질문은 가장 정점에 올라가서야 멈췄다. 그리고 이 보고서를 이제는 아무도 읽어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게 되었다.
일 프로는 자신의 전임자가 지난 1년 동안 묵묵히 수행해왔던 보고서 업무를 단 한 번의 질문으로 없애버리는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 냈다. 무려 8시간이나 걸리는 업무를 없애 버렸으니 이제 그녀는 주 5일이 아니라 주 4일만 근무해도 문제가 없으리라.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로부터 또 한 달이 지났지만 일 프로는 여전히 주 5일을 꽉꽉 채워서 일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주말이면 가끔씩 회사에 나와 밀린 잔업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각종 비즈니스 서식을 예쁘게 만들어 주는 '미리캔버스', 이것은 놀라운 업무 혁신 도구다. '세상의 모든 디자인은 미리캔버스로 완성'이라는 모토를 가진 미리캔버스는 PPT와 보고서, 카드뉴스와 동영상까지 거의 모든 형식의 비즈니스 문서를 5만 개의 템플릿으로 빠르고 멋있게 디자인할 수 있다. 일 프로뿐만 아니라 많은 직원들이 사용하는 이 툴은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결과물의 퀄리티에 본인 스스로도 놀랍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디자인이라는 작업은 하면 할수록 끝이 없기 때문이다. 빠르게 디자인할 수 있는 혁신이란 결국엔 더 많은 디자인을 하게 만든다.
삼 그룹장은 직원들이 미리캔버스로 작업할 때마다 한나절이나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래서 미리캔버스로 작업할 때 '2시간 이내만 사용할 것'이라는 규칙을 만들었다. 덕분에 직원들은 미리캔버스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디자인 작업에 들어간 시간은 대폭 줄어들었으나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상한 점은 그다음이었다. 어림잡아도 작업 시간이 네다섯 시간 이상 줄어들었는데도 그만큼 직원들이 여유로워 보이진 않았다. 여전히 시간은 모자란 것처럼 보였고 야근해야 할 이유는 늘어나기만 했다.
이 현상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 파트장은 chat GPT에 접속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언제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는지 프롬프트에 질문을 입력하자 1955년 영국 해군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이 검색되었다.
1955년, 영국 해군 장교로 근무하던 파킨슨은 한 가지 이상한 현상에 주목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대형 군함이 62척에서 20척으로 줄었고, 해군 장교 수는 31%까지 감소했는데도 해군 기지에서 일하는 행정 팀원은 78%까지 급증했다. 해야 할 일이 줄었는데 일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영국 해군뿐만이 아니었다. 파킨슨은 다른 정부 부처에서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그리고 직원 수가 자꾸 증가하는 이유는 업무량과 상관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심리적 요인 때문이었다.
파킨슨은 업무량과 상관없이 직원 수가 늘어나는 현상을 두 가지 요인으로 정리했다.
첫째, 근로자가 평소보다 과중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올 때가 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은 옆에 동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도움을 받는 것이 자신의 무능으로 보일 수 있으며 어쩌면 도와주는 동료가 부각되어 경쟁우위를 빼앗길 수 있으므로 차라리 부하직원을 늘리는 방향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이것을 '부하 배증의 법칙'이라고 정리했다.
둘째, 그렇게 부하직원이 늘어나게 되면 나중엔 혼자 할 수 있는 업무량도 부하직원과 분업하게 된다. 또한 부하직원에게 지시한 업무는 보고를 받아야 알 수 있으므로 '보고 절차'라는 부수적인 업무가 발생한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지시와 보고를 반복하며 일의 양은 증가하게 된다. 이것을 '업무 배증의 법칙'이라고 정리했다. 부하 배증의 법칙과 업무 배증의 법칙은 상호보완적으로 반복하게 되며 결국 조직은 점점 커지고 업무도 덩달아 늘어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보고서를 제출할 기한으로 1주일을 준다면 그 일을 끝내는데 1주일을 다 쓸 것이다. 만일 똑같은 일을 2주일에 끝내도 괜찮다면 그 일을 완료하는데 2주일이 소요될 것이다. 파킨슨은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에 자신의 생각을 칼럼으로 기고했는데, 이러한 현상을 파킨슨의 법칙이라고 명명했다.
"업무를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업무를 위해 할당된 시간만큼 늘어난다" - 파킨슨의 법칙
일 프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8시간짜리 보고서 업무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주 4일 근무를 할 수는 없다. 파킨슨의 법칙들에 의해 또 다른 업무가 생겨날 것이고, 무엇보다 급여 산정 기준이 주 5일 근무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업무를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업무를 위해 할당된 시간만큼 사용해야 한다. 삼 그룹장이 디자인의 함정으로부터 직원들을 구출해 준다고 해도 그들에게 할당된 업무 시간까지 줄여줄 수는 없다.
만약 우리에게 한가로운 시기가 찾아온다고 해도 그것은 위험한 시그널이 될 수도 있다. 일 프로의 업무가 계속해서 줄어든다면 그녀는 더 이상 조직에서 필요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삼 그룹장이 직원들의 근무 시간을 줄여주는데 계속 성공한다면 결국 직원 수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 도달할 수도 있다. 자신의 부하 직원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이상적이고 멍청한 관리자는 세상에 없다.
2020년 덴마크에서는 '가짜 노동'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무의미한 노동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자신이 수행하는 이상한 업무를 고해성사하며 '#가짜노동'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기 시작했고, 덴마크 전역에서는 특별 팀이 설치되어 가짜 노동을 밝혀내고 폐지하며 금지시켰다. 덴마크 총리는 이 책을 읽고 '가짜 노동'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며 온 나라에 추천하기도 했다.
가짜 노동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비생산적인 회의, 형식적인 문서 작업, 사내 정치적인 프로젝트 등을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업무를 위한 업무, 보고를 위한 보고 등 뭔가 이상한 노동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일 프로도 알고 있으며 삼 그룹장도 알고 있다.
분명한 것은 가짜 노동은 관찰자가 없으면 사라지는 속성이 있다. 그것은 코로나 덕분에 알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바이러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하루치 업무량을 단 두세 시간 만에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찌감치 사무실 공간에서도 그것을 깨달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시간이 남아도 업무 의외에 다른 행위를 하기가 어려웠다. 예컨대 창문을 내다보며 딴생각을 하거나 느긋하게 업무 이외의 딴짓을 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재택근무를 통해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즉, 가짜 노동이란 관찰자의 존재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관찰자가 없을 때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업무를 안 할 수 있으며 비로소 진짜 할 일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가짜 노동'을 펴낸 덴마크의 뇌르마르크와 옌센은 가짜 노동으로 이루어진 시간을 제거하고 노동의 일부를 여가 시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마침 한국에서는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된 지 20년 만에 주 4일 근무를 고민하는 시기가 도래하기도 했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업무를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업무에 할당된 시간만큼 줄어들 수 있다"라는 말도 결국은 파킨슨의 법칙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가 시간이다. 우리는 노동이 없을 때 남는 시간만큼의 여가를 즐기는데 익숙하지 않다. 하루 8시간의 근무에 길들여지면서 하루 6시간 만에 업무가 끝났다고 해서 일찍 귀가하기보단 2시간 동안 회사에서 무언가로 시간을 때우는 행위가 더 익숙해졌다. 물론 일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더 좋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코코 샤넬 같은 사람이다. 20세기 여성 패션의 혁명가인 그녀는 하루에 아홉 시간을 서서 일할 수 있을 만큼 '슈퍼우먼'이었으며 아무도 그녀가 화장실을 가거나 무언가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을 만큼 워커 홀릭인 사람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직원들이 힘들어했다.) 샤넬은 저녁 늦게까지 일했고 업무가 끝난 이후에도 직원들을 곁에 붙잡아둔 채 와인 잔을 기울이며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왜냐하면 집에 있는 것이 지루해서 퇴근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샤넬은 일주일에 6일 동안 일했고, 일요일과 공휴일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샤넬은 자신의 친구에게 이런 말도 했다.
"휴가라는 말만 들어도 식은땀이 나"
물론 우리 대부분은 샤넬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출근한다고 해서 사무실 입구에서 샤넬 넘버 파이브를 뿌려주며 환영식이 열린다거나(샤넬은 그렇게 출근했다) 직원들이 양손을 옆구리에 붙인 채 한 줄로 도열하면서 우리를 영접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샤넬보다 여가가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할지가 애매할 따름이다.
물론 넷플릭스를 시청하거나 유튜브를 본다든지 게임을 즐길 수도 있고 그냥 잠을 잘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업무 스트레스에 대한 반작용이거나 보상심리에 가깝다. 근로 시간만큼 늘어날 여가 시간을 온전히 그것들로만 채운다면 우리는 또 다른 공허함이나 허무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가 시간을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채우는 방법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의 근로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국에서는 현재의 근로 시간이 주 15시간이 될 것이라고 1930년에 예측했다. 미국에서는 주 14시간이 될 것이라고 1960년에 예측했다. 두 예측 다 빗나갔다. 근로 시간이 줄어들 것이란 건 누구나 예측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더디게 줄어들고 있다. 우리는 아직 근로 시간으로부터 쉽게 해방되지 않았다. 20세기에 허리를 졸라맸던 코르셋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킨 건 샤넬이었다. 샤넬의 패션 혁명 덕분에 수많은 여성들이 복장의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주 70시간을 일했던 근로의 화신 또한 샤넬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로의 화신처럼 여가의 혁명을 일으켜줄 새로운 샤넬이 필요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경향, 우리는 그것을 '취향'이라고 부른다. 넷플릭스와 유튜브와 게임을 제외하고 여가를 떠올릴 수 있는가. 여가의 부재란 결국 '취향의 부재'를 의미한다. 우리가 취향을 갖고 있다면 여가는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이제 취향을 찾아서 떠나 보자. 여가의 시작은 거기서부터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경향, 그 취향은 무엇일까? ... (계속)
예고
[다음편] 당신의 취향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