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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생각 Jun 27. 2017

책과 감수성의 역사


문명의 이기(利器) :

기술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편리한 생활 수단과 도구를 일컫는 말. 이런 '문명의 이기(利器)'가 때로는 '문명의 이기심'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 어느 문학소녀가




"어떻게 그런... 너무 야만적인 행동 아닌가요?


맞은편에 앉은 여성이 나에게 던진 말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소 띤 얼굴이더니 어느새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방금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살펴봐야 했다.


내가 어리둥절했던 이유는 지금까지 이야기의 제가 '독서'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상한 주제가 '야만적인  행동'으로 끝이 나려면 상당한 우여곡절이 필요한데, 우린 몇 마디 대화를 나눴을 뿐이었다. 대략 10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렇게 야만스러운 모습으로 한 여성과 마주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날은 지인이 운영하고 있는 독서모임에 초대받은 날이었다. 나는 약속 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했고, 이 모임에 누가 모이는지 사전 정보가 없었던 터라 설레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여성이 도착했다. 다행스럽게도 나와 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무척 오랜만에 만났고 이 모임에서 만나게 될 줄을 몰랐기에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자연스럽게 독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초대받아서 오신 걸 보니 독서를 좋아하시나 봐요?

최근에 무슨 책 읽으셨어요?"


나는 지난 며칠간 읽었던 네 권의 책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네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아니었고, 전자책으로 '발췌독'을 했다고 대답했다.

 *발췌독(拔萃讀) : 책에서 필요한 부분 또는 알고 싶은 부분만 발췌하여 읽는 독서법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달라졌다. 동시에 나를 당혹게 했던 그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그런... 너무 야만적인 행동 아닌가요?"


책이란 작가가 오랜 시간을 공들여 쓴 결과물인데, 어찌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읽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책에 대한 모독이며 작가의 의도를 전체적으로 읽지 않았으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불완전한 독서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일리는 있지만 그렇다고 야만적인 행동이라고 폄하한 것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론을 제기할까 했지만 그렇게 하기엔 그녀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너무 진지하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그녀에겐 독서에 대한 어떤 신념이 있는데 내가 그걸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 비장한 표정 때문에 선반론하기가 망설여졌다.


내가 발췌독을 한 이유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여러 가지 책을 보기 위함이었고, 한편으로 그것은 나의 독서 취향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진지한 신념에 대해 나의 취향으로 대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야만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독서 예찬은 계속되었다. 이번엔 내가 읽었다는 전자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종이책이 가진 고유한 '아날로그적 손맛'이 있는데 전자책은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고 했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신하려는 의도는 '문명의 이기(利器)'가 아니라 '문명의 이기심' 때문이며 결국엔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종이책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자신도 전자책을 읽어본 경험은 있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느낄 수 있는 촉감이라든지 책 냄새에서 느낄 수 있는 '서정적 감수성'이 전자책에서는 느껴지지 않아 실망스러웠다고 말했다.


듣다 보니 독서 예찬이라기 보단 종이책 예찬에 가까웠다.

문명의 이기(利器)가 아니라 문명의 이기심 때문이라니, 발음상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뜻을 가진 단어를 대조시킨 그녀의 표현력이 일단 놀라웠다. 다행스러운 것은 표정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어느덧 비장함은 사라지고 천진난만한 문학소녀의 표정으로 종이책을 예찬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바뀌었으니, 이번엔 내가 가진 '딴생각'을 얘기하기로 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을 상징하는 <구텐베르크 성서>


전자책을 문명의 이기심이라고 비판했듯이, 앞서 '문학소녀'가 예찬했던 종이책도 한때는 문명의 이기심이라고 비판받았던 시대가 있었다. 인류 역사란 이상하게 반복되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그 책이 등장한 것은 16세기였다. 당시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이 일어났고,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책들이 인쇄되어 쏟아져 나왔고, 바야흐로 '독서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인쇄된 책은 16세기 사람들에겐 매우 실망스러운 책이었다. 그 시대에는 필경사들이 손으로 직접 쓴 책이 주류를 이룬 시대였는데, 손으로 글자를 쓴 책이 아니라 인쇄된 책이라니, 그것은 '인간적인 손맛'을 느낄 수 없는 매우 어색한 책이었다.


사람들은 인쇄된 책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것은 필경사가 한 자씩 쓸 때마다 글씨가 달라지는 자연스러움이 없는 너무나 기계적인 글씨였다. 진정한 독서의 맛을 떨어뜨리는 책이며, '서정적 감수성'이 결여된 삭막한 책이었다.


그렇게 6세기가 흘러갔다.

구텐베르크 시대의 '문명의 이기심'은 지금 시대의 문학소녀에게 '서정적 감수성'을 안겨준 책이 되었다. 오히려 필경사란 직업이 사라졌다. 21세기의 문학소녀에겐 필경사가 쓴 '인간적인 손맛'은 모르겠고 '아날로그적 손맛'이 그 서정적 감수성을 대신할 뿐이다.


감수성이란 그 시대 정서를 반영한다.

그 시대 정서란 그 시대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감수성이다. 전자책이 지금 시대의 감수성으로는 어색할지 몰라도, 미래의 문학소녀에게 '터치스크린의 손맛'이라는 또 다른 감수성을 느끼게 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엔 전적으로 책이라는 존재 자체를 '문명의 이기심'으로 조명해 보자.

필경사가 손으로 쓴 책이든 인쇄된 책이든, 책은 책이다.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책이라는 존재 자체를 문명의 이기심으로 바라봤던 사람들을 만날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류 역사란 이상하게 반복되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니까.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내려가면,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이 인물이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문자를 읽어 지식을 습득하는 행위 즉, 독서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필경사처럼 문자를 기록하는 글쓰기마저 비판했다.


쉽게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책과 글쓰기를 가능케 해주는 문자 자체를 비판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사람들이 글을 읽으면 배운 것에 대해 너무 안일해진다고, 글을 읽고 나면 그것을 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읽은 것을 깊이 생각하거나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고.


소크라테스의 복음을 기록한 <파이드로스>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글을 읽어 아는 자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겉보기에 지혜로운 자일뿐이오."

 - 파이드로스, 275장 b절


"문자는 그것을 쓰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에 무관심하게 해서 그들의 영혼 속에 망각을 낳을 것이니, 그들은 글쓰기에 대한 믿음 탓에 바깥에서 오는 낯선 흔적에만 의존할 뿐, 안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힘을 빌려 상기하지 않게 될 것이오."

 - 파이드로스, 275장 a절


우리는 책을 읽고 나면 그것을 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읽은 것을 깊이 생각하거나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같이 대화를 중요시하는 '구술 문화 시대'의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끊임없이 내용을 듣고 내면화하고 암기해서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거나 질문을 하는 과정을 밟았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서는 내용을 내면화하고 암기하고 질문을 하는 행위 자체가 얼마든지 생략될 수 있기에 비판했다는 점에서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결국, 책이란 하나의 외형에 불과하다. 본질은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이다. 책은 시대 변화에 따라 점토판이기도 했고, 죽간이기도 했으며, 파피루스이기도 했다. 문명의 이기심 때문이었을지 몰라도 인간은 책의 외형을 꾸준히 발전시켜 왔지만, 정작 내용을 습득하는 행위는 인간 본연의 의지에 맡겨 두어야 했다.


소크라테스의 '문자 비판'은 책 그리고 독서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을 지적했다고 할 수 있다.

단,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소크라테스도 구술 문화 시대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 시대와 그 이후 시대를 '구술문화 시대'와 '문자문화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그 시대 정서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항상 다음 세대는 그 이전 세대와 다른 정서로, 또 다른 감수성으로 그렇게 진화해 나갔다. 소크라테스는 문자를 비판했던 것처럼 그 어떤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크리톤>, <파이돈>, <향연>, <파이드로스>와 같은 책들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다. 그는 글을 쓰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이자 다음 세대인 '플라톤'은 달랐다. 그 책들은 스승의 말씀을 몰래 기록했던 플라톤이 남긴 유산이었다.


우리는 플라톤이 있기에 소크라테스를 기억한다.

플라톤이 책을 쓰지 않았다면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그 유명한 말씀을 남긴 소크라테스 "너란 존재도 모를 뻔" 했다.



문학소녀, 나 그리고 조카


소크라테스의 <파이드로스>.

아니지, 그는 말만 했을 뿐 글을 쓰지 않았으니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라고 해야겠다. 내가 그 책을 처음 접한 것도 전자책이었다.

킨들(kindle)과 같은 전자책 전용 디바이스는 없지만, 내가 가진 스마트폰과 갤럭시탭을 통해 다양한 전자책 어플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런 디바이스가 종이책의 적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오히려 책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더 늘어나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다.

우선, 디바이스는 검색이 용이하다. 어떤 주제를 검색하다가 자연스럽게 도서 검색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자책을 구입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에서 보여주는 도서정보나 책 미리보기 기능을 통해 내가 찾는 주제에 알맞은 책을 발견하기도 한다. 심지어 책과 책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책은 도끼다>를 검색하다가 <무엇으로 읽을 것인가>를 연관 지어 알게 됐고, 다시 그 책의 읽다가 <파이드로스>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렇게 <파이드로스>를 전자책으로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무릎을 치며 말했다.

"이건 직접 책을 사서 봐야 해!"

서점에서 <파이드로스>를 직접 득템 하는 순간, 비로소 나는 야릇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것은 일종의 아날로그적 손맛이며 서정적 감수성이었다.

재밌는 현상이다. 전자책을 읽던 나는 종이책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나 역시 그 문학소녀와 동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 시대 정서에 녹아든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몇 년 전, 정말 얇은 노트북을 구입한 일이 있었다. 어찌나 얇은지 광고에서 본 것처럼 서류봉투에 들어갈 지경이었다. 이 신기한 물건을 다섯 살 난 조카에게 보여줬다. 조카는 거침없이 손가락을 뻣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향한 곳은 키보드가 아니라 액정 화면이었다. 액정 화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촌, 이거 왜 안 움직여?"

정말 놀라운 순간이었다. 이 녀석에게 익숙한 것은 키보드가 아니라 터치스크린이었던 것이다. 조카 세대들에겐 엄마 어깨너머로 본 스마트폰에 익숙해져 있으니 손이 액정 화면으로 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건 노트북이란다. 그러니까 키보드를 눌러야 해."

조카는 못마땅한 듯 키보드를 두드린다. 못마땅할 것이다. 조카의 감수성으론 키보드가 오히려 어색할 테니까. 나와 다른 세대니까.

얼마 전, 우리 동네 버거킹에 들어갔다가 주문을 받는 직원이 사라져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 직원은 안 보이고 커다란 액정 화면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터치스크린이었다. 한참을 쳐다봐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물건이라 주문을 어찌해야 하는지 망설여야 했다. 차라리 도망칠까도 생각했다. 나와 같은 인간이 나를 대면해 주지 않는다는 현실이 갑자기 서러웠다. 그렇게 터치스크린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든 나의 감수성을 부둥켜안아야 했다.

하지만 내 조카는 나와 다를 것이다.

마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와 달랐던 것처럼.



우리는 문자문화 시대였다


사실 종이책이냐 전자책이냐는 시답잖은 논쟁거리다. 본질은 독서인구의 감소다. 점점 책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기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나 소유할 수 없었던 책을 많은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필경사가 쓴 책은 비싸고 귀한 물건이라 아무나 읽을 수 없었다. 오로지 지배 계층과 소수의 엘리트만이 소유할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그런 책을 인쇄술을 이용해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시킬 수 있었던 것이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이다. 또한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지식 혁명'이기도 했다.


지식을 널리 대중들에게 전파시키고자 했던 혁명의 의미가 무색할 만큼, 이제는 거꾸로 대중들이 책을 외면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대중들의 잘못일까?

문득, 지식을 소비하는 방식이 바뀐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종이책으로만 지식을 전달하려는 게 구태는 아닐까?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종이책이라는 '지식의 보고'가 이제는 다른 존재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앞서 소크라테스 시대와 그 이후 시대를 '구술문화 시대'와 '문자문화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먼 미래엔 우리 살고 있는 시대와 다음 시대를 '문자문화 시대'와 '또 다른 문화 시대'로 구분할지도 모를 일이다. 또 다른 문화란 '영상문화'일 수도 있고 '가상현실(VR)문화'일 수도 있으며 '증강현실(AR)문화' 등등 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지식의 외형은 결코 종이책이 아니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구텐베르크 혁명처럼 또 다른 혁명 앞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요즘 유행하는 혁명이 있지 않은가. 바로 4차 산업혁명 말이다.


이미 출판과 콘텐츠 업계에선 그동안 책이 누려온 시대를 '리딩 1.0'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전자책을 필두로 펼쳐질 세상은 '리딩 2.0'이며 그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한 시대의 시작이 반드시 이전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를 끝으로 '구술문화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우린 대화나 연설 또는 토론의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우리가 '문자문화 시대'라고 해서 카톡으로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다가올 미래에는 구술문화가 재조명될 수도 있다. 이미 우린 스마트폰에게 말을 걸고 스마트폰이 대답해 준다. 앞으로 모든 디바이스와 사물인터넷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구술문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 수도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문자가 사라지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면, 책은 존재할 것이다.

종이책도 마찬가지, 우리가 종이책의 감촉을 그리워하는 한, 인쇄된 책의 잉크 냄새가 향긋하다고 느끼는 한, 책갈피에 끼워둔 라일락의 향기를 추억하는 한, 한편으론 전자책이 품은 포름알데히드 냄새와 과열된 배터리에서 나는 열기가 짜증 나는 한,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의 동경과

별 하나의 시와

별 하나의 어머니

...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읽어 본다.

만약 그 시를 영상이나,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로 바꾼다고 해서

시를 읽는 감동을 대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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