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꽃을 사서 집을 꾸미는 일,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잠시 조는 순간, 욕조에 몸을 담그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을 때 느껴지는 감정, 별 볼 일 없지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 속 작은 행복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소확행(小確幸)'이라 한다.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매일 있어!"
- 곰돌이 푸
반도체 부품 회사에 다니는 김동환 씨(37세).
그는 달이 떠오르는 밤이 되면 반도체 부품이 아니라 지점토를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세상에 없는 독특한 지점토 작품을 만든다. 그의 작품이 독특한 이유는 단순한 지점토 조각품이 아니라 빛을 발하는 조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결혼하기 전, 프로포즈를 위해 남다른 선물을 구상하다가 어린 시절 즐겨 했던 찰흙 만들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문방구에 가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500원짜리 백색 지점토를 구입하기에 이른다. 처음엔 지점토로 반지를 담을 케이스를 만들었다. 그곳에 결혼반지를 담아 아내에게 선물하자 반응이 좋았다.
이후 더 특별한 프로포즈를 해주고 싶었다. 늦은 밤 고민하던 그는 우연히 바라본 달빛에서 영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지점토 작품에 전구를 넣어 마치 달빛처럼 빛을 발하는 'Marry me'라는 걸작을 완성하게 되었다.
단순한 이벤트였지만 아내는 그의 손재주에 감탄했고 그에게 '달빛 조각가'란 애칭도 만들어 줬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결혼 후에도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그의 취미활동은 어느새 2년이 흘렀다.
단순히 취미라고 하지만 2년을 갈고닦았으니 보통 솜씨는 아니다. 지금도 그는 달이 떠오르는 밤이면 어김없이 작업실에 앉아 지점토를 만지작거린다. 퇴근 후 피곤할 만도 하겠지만 오히려 지점토를 만지는 일이 피로를 풀게 해주었다. 그가 지점토 공예에 몰입하는 순간은 고민도 잊을 만큼 행복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난 2년 동안 그가 지점토를 만지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게 소박한 일상일지라도, 그는 행복의 시간을 늘려가고 있다.
쇼핑몰에서 관리직으로 일하는 박성진 씨(40세).
사람마다 소중한 것을 남기고 싶을 때 사용하는 도구가 있다. 십중팔구 그것이 카메라라면 이 남자는 아주 평범한 도구를 쓴다. 그것은 바로 수성펜, 그는 이 평범한 수성펜 하나로 사라져 가는 오래된 집들을 그린다. 전국 방방곡곡 오래된 집들이 있는 곳이라면 수성펜을 들고 어디든 찾아갔다.
그렇게 그림을 그려온 지 어느새 1년, 이제는 색연필을 사용해 채색도 하고 수성펜의 번지는 특성을 이용해 물붓을 사용한 명암 처리도 능숙하다. 그런데 그는 왜 이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까?
타지 생활을 오래 하면서 짙어졌던 향수, 오랜만에 찾아간 울산의 고향 집터에는 어느새 신축 빌라가 들어섰다고 한다. 어렸을 때 살았던 시골집의 정겨운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그는 재개발로 인해 사라져 가는 오래된 집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우연히 손에 든 수성펜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을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다.
쇼핑몰에서 일하는 그는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옛집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동안 다녀온 곳만 해도 수십 곳, 용인, 춘천, 여주, 강릉, 정선, 제천, 음성, 공주, 논산, 군산, 광주, 해남, 경주, 청도, 양산, 부산, 통영, 제주도까지, 사라져 가는 집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수성펜을 들고 스케치북에 옮겨 담기를 즐겨 했다.
지금도 그는 여전히 그림을 그린다. 이제는 제법 유명세를 치르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자 요청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작품을 블로그에 올리며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심지어 직장인 쇼핑몰에서도 빈 공간을 활용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한다.
"오래된 집을 그리면서 수성펜 선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돼요. 그 선 하나하나가 제 추억이라고 생각하면 즐겁기도 하고 기쁘기도 합니다. 별거 없어요. 그게 제 행복입니다."
수성펜 화가의 행복은 단순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난 1년 동안 수성펜을 만지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앞서 달빛 조각가처럼 수성펜 화가도 그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시간을 늘려가고 있다.
예쁜 꽃을 사서 집을 꾸미는 일,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잠시 조는 순간, 욕조에 몸을 담그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을 때 느껴지는 감정, 별 볼 일 없지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 속 작은 행복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소확행(小確幸)'이라 한다.
소확행은 2010년 이후, 화려했던 경기부흥 이후의 시대를 견뎌야 했던 대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최근 중국 본토까지 전파되어 중국의 고도 성장기 이후를 살아가는 20~30대 밀레니얼 세대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앞서 '달빛 조각가'나 '수성펜 화가'처럼, 소소한 일상에서 무언가를 만들며 행복을 느끼는 것 또한 '소확행'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소확행과 맥락을 같이 하는 단어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발견된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삶의 모습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오캄 au calme', 화려한 장식으로 집 안을 꾸미기 보단 창가에 핀 허브를 키우며 소박하게 공간을 채워나가는 삶의 방식을 뜻하는 스웨덴어 '라곰 lagom', 따뜻한 스웨터를 입고 장작불 옆에서 핫초콜릿을 마시는 기분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의미하는 덴마크어 '휘게 hygge'에 이르기까지, 국경과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꿈꾸고 있다.
최근에는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소확행이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세계 경제가 침체된 저상장 시대에 불확실한 내일을 기다리지 말고 오늘을 소중히 하자는 '욜로(YOLO)' 현상처럼, 잡히지 않는 먼 행복보다 지금 바로 만질 수 있는 근접한 행복을 추구하는 '소확행(小確幸)'은 삶에 대한 일종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다.
한 예로, 이제 사람들은 특별한 날 거하게 먹는 외식이 아니라 매일매일 찾아오는 일상적인 점심 식사에서도 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비 트렌드를 모를 리 없는 카드사에서도 다양한 '점심값 할인카드'를 내놓았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요식업 분야에 높은 할인율을 제공해 주는 것이 그 혜택이다. 최근 이러한 카드가 직장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으면서 C사의 점심 할인 카드는 일찌감치 단종되기도 했다.
일상에서 찾는 소확행은 여행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이제 사람들은 '가끔 멀리' 가는 여행보다 '자주 가까이' 가는 여행으로 변화하고 있다. 일 년에 한 번 큰맘 먹고 지르는 휴가가 아니라 주말 혹은 하루 이틀을 이용해 집 근처로 떠나는 '위크엔드 겟어웨이 weekend getaway'가 급부상하고 있다.
숙박업계에서도 1박을 즐기는 '호캉스(호텔+바캉스)' 상품이 늘었다. 삼성카드 빅데이터 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수도권에 거주하는 소비자들이 2017년 여름휴가 동안 수도권 호텔에서 사용한 카드 실적이 2014년에 비해 32.4%나 증가했다고 한다.
여행이 어렵다면 산책은 어떠할까? 최근 미국 브루클린에선 '100미터 마이크로 산책 micro walks'이 유행이라고 한다. 멀리 가는 일반적인 산책이 아니라 집에서 100미터 이내의 구석구석을 1년 365일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가령 어제 봤던 클로버가 하룻밤 사이에 새로운 잎사귀를 피웠다든지, 어제보다 세 배 커진 버섯 군의 모습, 혹은 모래에 만들어진 개미집의 변화 등 사소한 일상의 풍경을 마치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살피며 걷는 산책을 의미한다.
마이크로 산책의 주인공인 미국의 힙스터들은 세상을 정복하겠다든지 부자가 되겠다는 허황된 꿈 대신, 아주 작고 일상적인 소재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가치는 성공, 꿈, 재력, 사치가 아니다. 커피, 자전거, 인디음악, 아날로그, 동물, 요리처럼 소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주된 관심사다.
소확행이란, '사소한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라 해석할 수 있다. 한때 경제적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거창하고 천편일률적인 삶의 목표가 아니라 "이런 소소한 행복도 존재한다"라고 외치는 일종의 사회적 반기다. 꼭 훌륭한 사람을 꿈꾸지 않는다고 해서, 더 근사한 삶의 목표를 욕망하지 않는다고 해서 소박한 일상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외침이다.
다만 소확행은 현실을 비관하거나 미래를 불신하는 패배주의와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헬조선', 'N포세대', '흙수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처럼 현실을 수동적으로 책망하는 비관이 아니라 작지만 능동적인 삶을 지향하는 각성이 바로 소확행이라 할 수 있다.
행복에 대한 담론이 풍성해진 만큼, 우리 사회에도 행복에 대한 지나친 환상이 변해 가고 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듯이 다양한 기준으로 삶을 재단할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필요하다. 그 작은 행복조차 분명하지 않다면 자신에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복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에 대한 나의 기준은 그동안 어떠했는지, 그렇게 행복에 대해 성찰하는 질문의 시작, 그것이 바로 '소확행(小確幸)'의 입문이다.
"겨울밤 고양이가 내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감촉, 그것이 나의 소확행이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다. 사실 '소확행'이란 단어는 그가 1990년대에 발간했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 소개된 신조어였다. 당시 일본에서 큰 반향은 없었지만, 하루키의 개성이 묻어나는 단어였다. 그 랑겔한스섬이란 곳에 가면 하루키처럼 소확행을 실천해 보고 싶은 마음이 솟아 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곳이 노르웨이나 스웨덴의 외딴섬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세상에 그런 섬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만히 보면 하루키의 수필집은 제목부터가 위트 였다. '랑겔한스섬'이란 동물의 췌장에 있는 내분비 세포 이름이다. 그것이 마치 췌장 전체에 섬처럼 분포해 있다고 하여 '섬(island)'이란 명칭이 붙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따스한 봄을 느꼈던 순간을 다음과 같이 수필로 기록했다.
머리 위로는 흰 구름이 꼼짝 않고 한 군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눈앞에 손가락을 재어 보니, 조금씩 조금씩 동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머리 밑에 밴 생물 교과서에서도 역시 봄냄새가 났다.
개구리의 시신경과 신비스러운 랑겔한스섬에서도 봄내음이 풍겼다. 눈을 감으니 부드러운 모래톱을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강물 소리가 들렸다.
...1961년 봄의 따스한 어둠 속에서, 나는 살며시 손을 뻗어 랑겔한스섬의 물가를 더듬었다.
- 랑겔한스섬의 오후 中
개구리의 췌장을 더듬으며 봄을 느낀 그의 감수성이 흥미롭다. 어쩌면 그 또한 소확행이리라.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일상 속에서 새삼스레 발견한 봄내음이리라. 그것이 개구리면 어떻고 췌장인들 어떠한가.
'난 너가 되고 싶어. 너의 일부가 되고 싶어. 혹은 영혼이라도 너와 함께 하고 싶어'라는 간절한 사랑고백을 췌장으로 표현한 베스트셀러도 있는 마당에.
지점토로 아름다운 조명을 만드는 '달빛 조각가'는 무심코 바라본 달빛에서 영감을 얻었다. 수성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수성펜 화가'는 옛집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가만히 멈춰 서서 느낄 수 있는 영감과 감수성 속에도 행복은 존재한다.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가까운 행복이 있다. 일산 교보문고와 마크트할레, 터치아프리카의 카페모카와 오네뜨의 아메리카노, 티나의 식빵 중 초코식빵 등등, 주말이 되면 버릇처럼 찾아가는 곳들이다. 이 중 2~3가지는 다녀와야 주말이라는 안도감을 느낀다. 이 안도감을 느끼고 나면 어김없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그것이 나만의 소확행이자 '루틴'이다.
나는 대단히 성공한 사람들만 루틴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소박한 행복을 발견하면 그 안에서도 루틴이 존재한다. 그 루틴은 반복적이지만 즐겁다. 즐거우니까 반복한다. 반복하다 보니 달빛 조각가가 되었고, 누군가는 수성펜 화가가 되었다. 그러다 보면 췌장 안에서 봄내음을 맡기도 하고 사랑이 싹트기도 한다. 비로소 즐거움에 의미가 담긴다.
저마다 행복의 색깔은 다양할 수 있지만 공통분모는 존재한다. 그것은 즐거움과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 행복에는 동일한 패턴도 존재한다. 그것은 단순함과 반복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 안에 소확행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소확행은 무엇일까?
딴
SBS 세상에 이런일이 '달빛 조각가' / 968회 / 2017.12.21
SBS 세상에 이런일이 '수성펜 화가' / 914회 / 2016.12.08
BOOK 트렌드 코리아 2018 / 김난도 외 /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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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