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을 바꾸면 기회가 보인다.
- 딴생각
새벽 2시, 난생처음 겪어본 변비 때문에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지자 결국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의사는 몇 가지 검사와 진찰을 했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관장 시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무덤덤했다. 그런데 구체적인 시술 방법을 듣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관장 중에서도 '용수 관장(finger enema)'이라고 말했다. 즉, 의사가 검지 손가락을 내 항문에 집어넣어 시술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시술을 하기 위해 관장용 고무장갑을 끼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젊은 여의사였다. 정리하자면, 40대 아저씨가 젊은 여성에게 관장을 허락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질 기세였다. 난 저항하기로 했다. 관장 시술 침대에 오르기를 거부하며 그 여의사에게 항문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 여의사는 나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까지 쓰면서 이것은 성희롱이 아니고 의술이라며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난 정신을 차리고 상황 파악을 다시 해야 했다. 분명 이 응급실에서 내가 본 의사는 네 명이었다. 그중 남자가 세 명이었고 나머지 한 명이 지금 내 앞에 선 여의사였다. 따라서 이 병원의 당직 근무자는 네 명인데 남자 셋은 고참일 테고 젊은 여의사는 막내 레지던트일 것이라 짐작되었다. 결국 가장 허드렛일이라고 할 수 있는 관장 시술을 막내에게 떠넘겼으리라.
상황 파악이 이쯤 되자 그 여의사에게 내가 짐작한 그대로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남자 의사를 불러 줄 것을 요구했다. 여의사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에게 마지막 항변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움직이고 말았다.
"선생님... 저에게도 한 번 기회를 주세요."
기회라고? 그 말이 너무나 이상하게 들렸다. 아무리 의사라 해도 젊은 아가씨가 아저씨의 항문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이 어떻게 기회란 말인가? 차라리 위기라고 해야 맞지 않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관장 시술을 저에게 맡겨 주세요."
결국 난 설득당하고 말았다. 조용히 침대에 올라가서 하라는 대로 바지를 내리고 포즈를 취했다. 그리곤 체념한 듯이 두 눈을 감았다. 일종의 수치심과 체면 때문에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시술은 성공적이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라도 내려가듯, 화장실에서 모든 것을 쏟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거사를 치르고 화장실을 나오자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여의사를 볼 수 있었다. 순간 내가 울 뻔했다.
안도의 한 숨과 얼얼해진 엉덩이를 부여잡으며 응급실을 나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게 엉덩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계속 그 여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기회를 주세요..."
그 여의사는 관장 시술이 처음이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상황을 그 여자의 위기라고 판단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상황이 위기일 수밖에 없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너도 기회 아냐?"
나의 관장 에피소드를 들은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부드럽고 섬세한 여성의 손길로 관장 시술을 받았으니 그게 기회가 아니고 뭐냐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더군다나 내가 남자라서 느낀 체면 때문에 고통조차 느낄 겨를도 없었으니 그보다 안 아픈 관장 시술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친구는 나와 보는 관점을 달리했고 '위기는 알고 보니 기회였다'라는 고리타분한 말을 아주 그럴싸하게 해주었다.
나에게 닥친 상황은 위기였을까? 아니면 기회였을까? 사실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 상황을 맞닥뜨린 나의 관점이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뿐이다. 내가 '남자의 체면'을 생각했을 때 상황은 위기가 되었고, 친구의 말대로 '시술의 고통'을 생각했을 때 상황은 기회로 바뀌었다. 따라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오로지 나의 관점을 바꿔야 한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기업가 정신을 강의하는 티나 실리그 교수는 그렇게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상황을 자주 목격한 사람이다. 그 교수는 학생들에게 다소 황당한 과제를 내주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과제를 받은 학생들의 첫 반응은 한결 같다. 바로 위기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과제를 해결하다 보면 몇몇 학생들은 관점이 바뀌고 결국 기회를 발견하게 된다.
만약 당신에게 5달러와 두 시간을 주고 그것을 활용해 돈을 벌라고 하다면? 이것이 티나 실리그 교수가 학생들에게 내준 과제였다. 학생들은 '종잣돈' 5달러가 든 봉투를 받았고 그 봉투를 연 다음에는 두 시간 내에 최대한 수익을 올려야 한다. 다만 학생들이 이 과제를 고민하고 실행할 수 있는 기간은 5일을 주었다. 5일 후에는 모든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3분간 프레젠테이션을 하도록 지시했다.
학생들은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기존의 관점에 의문을 던지며, 숨겨진 기회를 찾아내기 위해 모험심을 발휘해야 한다. 어쨌든 주어진 과제가 위기일지라도 창의적인 관점을 통해 기회를 만들어야 과제를 풀 수 있었다.
처음에 학생들은 5달러로 준비물을 장만한 뒤에 간단한 세차를 해주거나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판매하는 방식을 생각했다. 이는 두 시간 동안 푼돈을 벌기엔 그럭저럭 괜찮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3분 프레젠테이션을 하기엔 뭔가 창의적이진 않았다. 결국 가장 큰 위기는 3분 프레젠테이션이다. 그 과제의 특성상 뭔가 참신한 아이디어가 아니라면 학점을 따긴 글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스탠퍼드 대학의 '5달러 프로젝트'였다. 과연 이 과제를 해결한 학생들의 수익률은 얼마나 되었을까? 전체 학생들은 14개의 팀으로 구성되어 이 과제에 도전했는데 전체 팀의 평균 수익률은 무려 4,000퍼센트였다. 매우 놀라운 결과였다.
특이하게도 큰 수익을 올린 팀들의 공통점은 5달러를 한 푼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5달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과제를 매우 협소하게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야를 넓히고 관점을 바꾸기로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이 가진 관점, 입장, 맥락, 생각, 프레임을 다 바꿔버렸다. 그것이 고민의 시간, 5일 동안의 변화였다.
이 과제에서 가장 큰 수익을 올린 팀은 무려 650달러를 벌었다. 이들은 주어진 자원부터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가장 중요한 자원은 5달러도, 두 시간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황당하게도 3분 프레젠테이션이 가장 큰 위기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3분 프레젠테이션을 기회로 삼았을까?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그들의 방법을 소개하겠다. 이 학생들은 스탠퍼드 대학에서 인재를 채용하길 원하는 회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채용 광고를 대신 해주는 조건으로 650달러에 광고 계약을 체결한다. 그렇게 5일이 지난 후, 3분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그들은 과제에 참여한 모든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3분 동안 그 회사의 채용 광고를 발표해 주었다.
딴
- 영감을 준 자료 -
BOOK 스무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스탠퍼드대 미래인생 보고서) / 티나 실리그 / 2010.06.21
SERICEO 주변을 둘러보라, 열릴 것이다 / 박종하 / 2018.05.08
[딴생각]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69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