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산책 003. [시와 산책]을 읽고,
시를 쓰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표현하는구나. 시인은 익숙한 단어에 낯선 의미를 붙일 줄 아는구나. 멈칫거리게 만드는 문장들이 많았고, 헛- 하며 숨을 들이켜게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가보지 못한 공간에 있는 듯한 느낌을 계속 받았다. 어쩌면 나도 책으로 인해 새로운 산책길을 걷고 있는 듯했다.
p.17 어느 책에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 하나. 겨울에 말을 타고 언 강 위를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강이 풀리고 나자 그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강이 얼어갈 때 소리도 같이 얼어 봉인되었다가, 강이 풀릴 때 되살아난 것이다. 말도 사람도 진작에 사라졌지만, 그들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소리가 남은 것.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상상하면 울컥할 만큼 좋았다.
p.32 그들은 강제노역에 동원되었고, 정관수술이나 인체실험의 희생양이 되었다. 자녀와는 생이별을 당했으며 험한 시절을 지날 때는 수십 명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살아남은 이들은 증거처럼 손가락과 발가락이, 코와 입술이, 눈동자가 없어졌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작정하고 이들에게 덤볐다고 오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내가 배운 것은, 비정상적인 외모가 흉함을 만들지 않고 불행이 인간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에 무너지지 않고 마음의 격을 지킨다는 것.
p.59 혹서에 자신의 열기를 견디다 못해 옆의 가지와 부딪혀 불을 내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자연발화라고는 하지만, 나무 스스로 불을 지르는 셈이다. 자신의 뜨거움을 몰아내려 오히려 뜨거움으로 뛰어들고마는 참혹한 형편이다. ... 요절한 가수 라사(Lhasa)의 노래 중에 "영혼은 더이상 사랑하지 않을 때 불을 지른다"는 가사가 있다. 한번 듣고 잊히지 않았던 건, 내가 그런 영혼과 마주한 적이 있어서이다. ... 차가운 겨울, 이별하려는 연인이 있었다. ... 헤어지면 내 손목 지질거야!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줄게!
p.66 늙는다는 것을 나는 어려서부터 생각해왔다. ... 팔다리가 나무처럼 굳어가고, 호흡이 가빠지고, 덜 보이고 덜 들리게 될 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까. 아껴 움직이고, 아껴 말을 하고, 아껴 보고 듣게 될까. 아껴 사랑하게 될까 아니면 사랑을 아끼게 될까. 노인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은 뼈가 비워지는 탓이겠지만,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단념해서 버려지는 무게도 분명 있을 것이다.
p.68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늙었구나. 내가 귀하게 여기는 한 구절이다. 노인을 경외한다는 것은, 내가 힘겨워하는 내 앞의 남은 시간을 그는 다 살아냈기 때문이다. 늙음은 버젓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결과일 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열차가 완전히 정지하기 전에 그러하듯, 흔들림 없이 잘 멈추기 위해서 늙어가는 사람은 서행하고 있다.
p.136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햇빛은 온기를 주는 동시에 대상을 퇴색시킨다. 지나친 빛 속에서는 노출과다 사진 속 피사체가 그러하듯, 내가 배경 속에 희석되거나 본디와 다른 모습이 되고 만다. 그러니 진심이나 맹세는 흐린 날에 건네져야 할 것 같다. 햇빛은 사랑스럽지만 구름과 비는 믿음직스럽다.
p.147 봄이 짧다는 탄식은 어쩌면 봄꽃만을 바라보는 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대개는 봄꽃 특히 벚꽃이 피어야 비로소 봄을 실감하는데, 벚꽃이 만발하는 기간은 열흘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매일 산책하는 사람들은 자연이 돌연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 봄은 단서들을 한껏 뿌리고 다녔것만, 도시의 건물 안에서는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p.155 그러나 아무리 쓸모도 정처도 없이 걷는다 해도, 산책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다. 길은 계속 이어지더라도, 그만 멈추고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지점이 반드시 있다. ... 결심하는 자리에 돌아갈 집이 요술처럼 나타나지는 않으므로, 다시 왔던 만큼을 다 걸어야 한다. 산책의 마지막 기쁨은 돌아가는 길을 얼마나 순순히, 서두르지 않고 걷느냐에 달려 있다.
p.162 전등 스위치를 켜자, 낡은 오르간 뒤로 수많은 사진 액자가 줄지어 벽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먼저 죽은 수도원 형제들이라고 했다. ... 마지막 사진을 보고 나서, 노 사제는 사진 옆 빈 벽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다음에 오면, 내가 여기 있겠죠." 그 말을 하면서 환하게 웃어서, 나도 마주 보고 웃었다.
늙음과 죽음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피한다. 나에게 있어 늙음은 40대까지 상상이 가능하고, 내가 언젠가 죽음으로써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 사고, 기억, 감정 등 이러한 의식 자체가 끊긴다는 것이 도무지 나로서는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는 개념이었다.
근데 요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콘텐츠들이 많다. 아직은 여전히 무섭기만 한데, 언젠가는 나도 내 의식을 끝을 겸허히 또는 기쁘게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책에서 나온 구절인데 우리가 보통 무서워하는 것들은 몰라서 그런 경우가 많다고 한다. 결국 알고 나면 무서움이 없어진다는 것인데, 나에게는 '죽음'이 그럴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 낯선 죽음을 좀 더 친숙하게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고 가볍게 생각한다.
[커피와 담배], [담배오 영화], [영화와 시], [시와 산책], [산책과 연애] ... 이렇게 단어 끝말잇기를 통해 낱말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책들이 출간되었는데, 5번. 산책과 연애도 읽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