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권 팀장: 근데 이거 스토리텔링도 잘 된 거죠? 아유 고생했네 그래요 들어가 봐요. 끝났으니까 가셔도 된다구요
어혜미 선임: 저 TF팀 involve 된 거 아니었어요? 피티도 당연히 같이 가는 줄 알았는데
한세권 팀장: TF involve? 내가? 내가 팀원으로 들어오라고 한 적 있었나?
어혜미 선임: 아니 어제 저한테 앞으로 열심히 하라고 하셨잖아
한세권 팀장: 그거는 제안서 열심히 쓰시라는 얘기였고. 어떻게, 오해했나 봐. 아우. 나 괜히 미안해서 어떡하죠? 아이, 그래요 뭐 솔직히. 내가 어선님 능력 충분히 잘 아는데. TF팀이랑은 좀. 잘 안 어울리는 거 같아요.그러면 또 봅시다. 근데. 좀 미안한데 비켜줄래요?
어혜미 선임의 아이디어를 가로챈 기획안을 만든 한세권 팀장은 아이디어의 세부내용을 몰라 상품기획팀과의 미팅에서 면박을 당한다. 이에 한팀장은 어선임을 불러 세부내용과 추가적인 아이디어까지 확인한다. 그리고 다음 날 어선임은 자신의 미래도 모른 채 친절하게 추가적인 기능설명까지 추가해 최종 버전을 들고온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염치'라는 게 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부탁을 어렵게 들어주면서도 혹은 불편한 상황이면서도 쉽사리 대가를 요구한다거나 거절을 하지 못한다. 다만, 사람대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의는 지킬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할 뿐이다. 하지만, 그건 나의 헛된 기대일 뿐이다. 내가 베푼 맹목적인 호의와 순응이라는 변수에 대한 함수값은 favor 내지는 reward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실망'과 '뒤통수'에 수렴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어떤 기대도 없기 때문에 마음 아플 일이 없다.
안준수 선임: 설계 다 확인하고 왔구요. 전달되는 동력 출력 다 높여놨는데 모터 RPM이 바닥이에요. 팀장님.
강민구 팀장: 니들은 왜 맨날 레파토리가 똑같냐. 응? 뭐만 안되면 다 모터 탓이지?
안준수 선임: 저 정말 죄송한데 한 번만 더 테스트 해보고 수정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번에도 빈손으로 가면 저 진짜 죽어요 예.
강민구 팀장: 알았어. 가봐.
안준수 선임: 아휴. 아 이거 진짜 빨리 해주셔야 되는데...
강민구 팀장: 알았다고!!
전임 인사부장까지도 포기한 소문난 인재(人災) 강민구 팀장. 까칠함으로 전사에 소문이 난 인간이지만 가장 중요한 모터를 담당하고 있어 다들 더러운 성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본다. 심지어, 성추행에 가까운 행동을 저지르고도 후배 직원에게 건방지다고 윽박지른다. 대형사건이 터졌음에도 회사는 중요한 인재라는 이유로 쉬쉬하며 일을 덮으려고만 한다.
대놓고 까칠하고, 불편한 티를 내는 이들은 직장 내 먹이사슬의 최상단에 있다. 모두가 눈치를 본다. 싫은 소리 하나도 눈치 보느라고 얘기하지 못한다. 그렇게 불편러는 더욱 기고만장해진다. 호구 하나 잡으면 너도나도 신나서 달려들던 이들이, 불편러 앞에서는 쩔쩔매며 꽁무니를 뺀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약탈도 서슴지 않고, 조잡한 쫄보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돌+아이 컨셉을 잡거나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한 고슴도치가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고 피력할 수 있는 똑부러짐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필자는 회사생활에 있어 참 미숙했다. 초반에는 이런 저런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매일 자리에 앉아 언젠가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끙끙대며 속앓이를 했다. 하지만, 무엇도 바뀌지 않았고, 그러던 중 2년차가 되었을 때 사고를 쳤다. 유관부서에 기술자료를 요청하는 것을 깜빡했는데 해당 부서 과장님은 이를 미리 알고 자료를 준비해둔 상태였다. 나야 사원 나부랭이고, 그 분은 이미 어떻게 판이 굴러가는지 다 알고 계시는 분이었다. 문제는 전화를 해서는 "옴스씨~ 이거 자료 모레까지 맞죠? 근데 어쩌죠. 저한테 요청하신 적 없으시죠? 이거 이틀만에 어떻게 하나, 난 연락이 없어서 그냥 안해도 되는 줄 알고 안하고 있었는데. 안 해도 되는 건가?"라고 변죽을 올렸다. 계속 죄송하다고 굽신 거렸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고, 참다참다 터져서 "네네 맞습니다. 다 제가 너무 부족한 탓입니다. 제가 할 일도 아닌데 제가 나댔습니다. 앞으로 모든 일은 제 사수를 통해서 시켜 주시면 저는 시키는 일만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라고 폭발했다.
나의 열폭사건은 층에서 소문이 퍼졌고, 수근대는 느낌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그 이후로 나는 '성질 더러운 놈' 비슷하게 소문이 나면서 누구도 나를 쉽게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건 이후 당분간은 쪽팔림에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나의 회사생활은 더 편해졌다. 쫄보로 사사건건 호구 잡혀 가면서 속앓이를 하는 것보다 '성질 더럽지만 할 일을 하는 놈'으로 낙인 찍히는 게 훨씬 편했다.
한번 호구는 영원한 호구가 된다. 소문난 호구는 여기저기서 손님들이 찾아든다. 애원하는 말투로 부탁을 청하고, 호구가 수락하는 순간 뒤돌아서 환호를 지른다.
반면, 불편러는 세상 편하다. 처음부터 불편한 컨셉을 잡고, 팀 내에서 불편하다는 다소 부정적 평가를 듣는다. 쌩뚱맞게 휴가를 내고 간다거나 다들 야근하는데 자기 일을 끝내고는 쿨하게 퇴근한다. 그럼 주변 사람들은 수근댄다. '쟤는 왜 회식 참여 안하고 집에 가냐', '쟤는 뭐냐'는 얘기들이 주변에서 돈다. (사실 자기들도 엄청 집에 가고 싶은데 쫄보라 얘기는 못하고, 혼자 얄밉게 가는 건 부러워서 그런다) 그럼에도 불편러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묵묵하게 자기 일을 한다. 그러다 보면 쑥덕거리던 이들도 어느새 잠잠해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그런 사람이려니 적응한다.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하거나 해코지한 게 아니라면 애초에 욕 먹을 이유도 없다. 자기 일 다 끝나고, 퇴근하고, 나에게 주어진 휴가를 쓰고, 약속이 있어서 회식에 안 가는 게 문제 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서 내 일 만큼은 똑부러지게 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어느 순간 나의 권리와 시간은 보장 받으면서 업무능력까지 인정 받는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쫄지 말자. 당당하게 나의 권리를 찾고, 대신 주어진 업무 만큼은 확실하고 야무지게 해낼 수 있는 실력을 키우자. 호시탐탐 나를 호구 잡으려는 주변 상사, 동료들이 더이상 나를 얕잡아보지 못하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