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그렇게 난 수많은 욕을 먹었어만 했다.
중동에서 진행 중인 U 프로젝트 관련 메일이 도착했다. ITT*에 addendum*이 issue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또 귀찮은 일이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런 잡일은 너무나 소모적이다. 이메일에 첨부된 부속 서류들을 다운로드 받아 유관 부서들을 수신처로 하여 첨부와 함께 추가사항을 홍보하고 전달한다.
하지만 귀찮은 일은 이제 시작이다. 이메일과 첨부물을 잘 받았다는 내용을 약식 레터에 작성하고 결재권이 있는 프로젝트 담당 상관에게 보고하고 서명을 받는다. 그리고, 서명된 레터를 스캔하여 내 이메일 계정으로 쏜 뒤 잘 받았다는 내용의 이메일에 첨부하여 발송한다. 끝이 아니다. 팩스를 통해서도 서명된 약식 레터를 보내야 한다. 아 이 죽일 놈의 잡일..
접수된 addendum에 어떤 변경, 추가 사항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지만 한창 긴박하게 진행 중인 북해 프로젝트들을 챙기느라 챙겨 볼 겨를이 없다. 돈, 계약에 관련된 사항인지, 기술적인 사항인지만 구별해서 기술적인 사항이면 우선 넘기고 본다. 물론, 기술적인 사항들도 영업에서도 직접 읽어보고 챙겨야 하지만 당장 코 앞에 입찰서 제출을 앞둔 프로젝트들부터 챙겨야 한다. 그래. 지금 당장은 살포시 외면해 주자.
온갖 문서에 알 수 없는 의미의 단어들이 난립한다. 내가 해외영업에서 일하는 게 맞긴 맞구나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transportaion, installation, hook-up, commissioning, clarification, terms and conditions, conditions of contract, bank guarantee 등등 뭔 소린지.. 음..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그저 시키는 일을 할 뿐이니까. 그렇다고 여유롭게 하나 하나 물어보고 궁금증을 해결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뭐든 눈 앞에 있는 일들을 끝내고 쉬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 놈의 메일함은 절대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숨 좀 돌릴 만하면 메일이 들어오고, 집에 갈라고 각 좀 잡아 볼라면 또 메일이 들어온다. 정말 미스테리한 사실은, 지금 시각이 밤 11시나 되었으니 내일 아침에 출근해서 제대로 검토해 볼만도 한데.. 굳이 지금 시간에 내용을 검토하고 유관 부서에 협조 메일을 보내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
"이건 어느 부서, 누구한테 보낼까요?"
"혹시 cc에 다른 팀장님들은 안 넣어도 될까요?"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업무 프로세스이긴 하지만 진행되는 프로젝트 마다 담당자가 다르다는 사실이 스트레스다. M 프로젝트의 설계 리더는 K 차장님, A 프로젝트의 설계 리더는 B 차장님, U 프로젝트의 설계 리더는 L 차장님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간혹 이메일의 담당자를 잘못 지정해서 전달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럼, 바로 전화가 걸려온다.
"오 사우, 이거 메일 잘못 전달한 것 같은데?"
"아..! 죄송합니다 ㅠ"
그럼, 저 옆에서 나의 통화를 건내 듣던 차장님이 한 마디 얹어 주신다.
"잘 좀 하자. 옴사우"
"넵.. 죄송함다"
뭐 이 정도는 작은 실수로 지나갈 수 있다. 문제는 클라이언트에게 보내는 이메일이다. 플랜트 업계에서는 회사 간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Project Director 급을 통해 이루어진다. 직급으로 따지자면 보통 이사 직급 수준에서 이루어 진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이메일 drafting 시 단어나 구문을 사용할 때에도 기본적인 비즈니스 격식과 매너를 유지해야 하고, 사소한 오타 하나 하나, 메일 내용에 따른 수신처와 참조처까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챙겨야만 한다. 회사를 대표해서 발신되는 공식 교신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메일 하나 하나가 갖는 무게감이 새삼 느껴진다.
그래서, 이메일 draft를 마치고, 최종 결재까지 받은 메일을 발신해야 하는 상황만 되면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미 결재는 받았지만 혹시 오타는 없는지 괜히 다시 한 번 더 읽어 보게 된다. 재확인을 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찜찜하고 석연치가 않다. 그리고, 불안한 예감은 마우스 왼쪽 클릭으로 보내기를 누르려는 순간 현실이 된다. 보이지 않던 실수가 보내기를 누르는 바로 그 순간 뇌리를 스친다.
'설마, 아닐 거야, 에이 아니겠지.. ^^..'
애써 외면해 보려 하지만, 불안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이 메일 누가 보냈어?!!"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몸 안 가득했던 졸음이 한 숨에 달아난다. 차장님이 나를 부른다. 발신 이메일 하단에 이사님의 서명이 아닌 내 이름과 소속이 밖힌 채로 나가 버린 것이다. 신속하게 내 어깨는 움츠러 들었고, 어두운 표정과 함께 고개를 떨군 채로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였다. 준비된 자세로 시원하게 욕을 먹는다. 우리네 인생은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마나 참 다행인건 우리 차장님은 짧고 굵게 꾸짖는 스타일이란 사실이다.

그 뒤로도 나는 이메일을 보내면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보안이 걸린 첨부파일을 그대로 발신하고, 수신처, 참조처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로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욕은 먹어도 먹어도 익숙해 지지가 않는다. 대신, 어떻게 하면 욕을 얼만큼 먹는구나, 어떻게 해야 욕을 먹을 때 금방 끝나는구나를 가늠할 수 있는 감은 제대로 익혔음이 확실하다. 모름지기, 신입사원이라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욕이든 달게 먹을 수 있는 physical과 mental이 필수적이지 않나 싶다.
Ohms
*용어해설
- ITT : Invitation to Tender의 약자로 '입찰 준비 안내서'라고 생각하면 된다.
- Addendum : 부속서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