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입사하면, 멋진 인생이 펼쳐질 줄 알았다.

월급쟁이 曰 "이러려고 죽기살기로 공부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by Ohms

연봉 5천만 원의 대기업 입사 3년 차, 1억 원을 모았다. 옆 라인이 잘록하게 파인 수트, 커프스에 이탤릭체 각인이 박힌 셔츠, 독특한 패턴과 부드러운 실크 소재감이 돋보이는 타이를 갖춰 맨 뒤 회사로 경쾌한 발걸음을 옮긴다. 요새는 연봉도 넉넉하겠다 세련미 상징의 끝판왕인 외제차도 한 대 뽑을까 생각 중이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는 시내 고급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선홍색 핏기가 적당히 도는 A++급 한우 스테이크를 썰며 서울 야경을 즐길 생각이다. 참 살아 볼만한 인생... 은

개뿔이다!!! 회사 시스템 상으로 지급됐다는 금액과 통장에 꽂히는 금액을 번갈아 보고 있노라면 초 단위로 천당과 지옥 사이를 오가는 기분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왜 쓰이는지도 모르는 각종 세금 명목으로 20%가 훌쩍 넘는 금액이 입금도 되기 전에 빠져나간다. 그 차액이 실제 존재는 하는 돈이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게다가, 월세, 교통비와 식대, 휴대폰비, 보험료, 그리고, 약간의 재테크만 했을 뿐인데 내 돈은 온데간데없다. 먹고살아 볼만한 연봉이라고 생각했건만 산소호흡기에 기대어 사는 목숨 마냥 연명하기에 급급하다.

어릴 적 꿈은 화려했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년차(x)와 연봉(y)의 상관관계는 로그함수에 가까웠고, 년차(x)와 씀씀이(z)의 상관관계는 지수함수만큼 가팔랐다. 잦은 회식과 반복되는 야근 덕분에, 평생 쓸 일이 없을 줄만 알았던 마지막 벨트 구멍까지 넘볼 수 있는 높은 인덕을 쌓게 되었고, 선명했던 시력을 잃고 천리를 볼 수 있는 안경을 얻었으며, 가장 큰 복이었던 건강을 잃고 여러 과의 의사선생님들과 긴밀한 유대와 네트워킹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6개월 뒤에 다시 경과를 보도록 하지요" "네, 선생님! 6개월 뒤에 또 뵙겠습니다.!"

연봉(y)과 씀씀이(z)의 갭은 빠른 속도로 벌어졌고, 내 통장의 잔고는 몇 개월 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어떤 이가 높이 뛰려면 잔뜩 웅크려야 한다고 했던가. 이렇게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는 금세 등이 굽어 앞으로 고꾸라질 지경이다. 이태뤼 장인이 한땀 한땀 제봉한 맞춤 수트, 앰블럼만으로도 후방 운전자의 칼치기를 압도하는 외제차는 평범한 월급쟁이에게 허락된 인생이 아니었다. 세계제패의 꿈을 품던 어린 시절, 차세대 글로벌 리더를 꿈꾸던 대학 시절에도 이런 현실을 얘기를 해주는 이는 없었다.

공자 형님 왈, 30대는 이립(而立), 모든 학문적 기초를 다지는 시기라고 하셨거늘 오히려 지난 30년 동안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평범한 흙수저 월급쟁이의 인생은 이제 시작이거늘 결혼, 육아, 교육, 노후까지 앞으로 남은 퀘스트들을 보자면 단검 하나와 천 갑옷을 걸쳐 입고 불을 내뿜는 끝판왕에게 달려드는 기분이다. 은수저라도 됐다면 현질이라도 해보겠건만 태생이 흙이라 현질도 불가하다. 공자 형님이 살아 계셨다면 현 세태를 반영한 논어 개정판과 한국 사회만의 독특한 세태를 반영한 논어 한국편을 꼭 내어 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월급쟁이에게도 기회가 있다. 회사의 임원이 될 수 있다면, 풍족한 부와 사회적 지위를 함께 누리며 안분지족하는 삶을 살 수 있음이 분명하다. 임원 전용 세단과 지정기사가 배정되고, 수억 원 대의 연봉을 받으며 회사에서 제공하는 각종 혜택과 복지까지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게다가 '회식하자!' 말 한마디면 직원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선약을 취소하고, 승천 직전인 입꼬리 미소와 물개박수, 환상적인 권주사까지 준비해온다. 내카드인지 네카드인지 구분이 모호한 법인카드도 덤이다. "임원님 잘 먹었습니다!" 심지어, 돈은 법인카드가 냈는데 인사는 임원이 받는다. 역시, 임원이 할만해 보인다.

귀를 쫑긋 세우고 명망 높으신 임원님들께서는 어떻게 그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노하우를 들어본다. 모 전무는 '나는 주 7일을 근무하고,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회식을 해도 끝나면 사무실 들어가서 일을 마무리를 했지. 자식이 셋인데 한 놈도 산부인과에서 본 적이 없지'라며 자랑담을 늘어놓았고, 모 사장께서는 '야근을 하고, 회식을 하더라도 집에 가면 3시간씩 책을 보고, 공부를 했다. 잠은 하루에 3시간 이상 자지 않았다'라며, 전설 속에만 존재할 법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요즘 것들은 이래서 안돼'라는 메시지를 눈빛으로 전했다. 임원이 되는 방법은 명쾌할 정도로 간단했다. 머리를 조아리며, 죽기 살기로 일하고, 딱 죽지 않을 만큼 술을 마시기를 30년 동안 반복하면 된다.

무소불위의 권력과 재력을 누릴 수 있는 길이지만 좀처럼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높디 높은 임원이 될 자신이 없다기 보다는 임원이 되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수많은 것들을 떠나 보낼 자신이 없다. 내 가족, 건강, 친구들, 여가, 그리고 소중한 젊은 날들까지. 임원이 되기도 전에 과로사 내지는 돌연 불치병에 걸려 비명횡사할 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한 번 통장의 잔고를 확인한다.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지긋이 쳐들고 생각에 잠긴다. 내가 꿈꿨던 삶은 평생의 꿈으로 굳어져간다. 내가 이러려고 평생 죽기살기로 공부하고, 좋은 대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졸업하려고 노력한건가 자괴감 들고 괴로워지는 밤이다. 얄짤없는 현실을 마주하며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운다. BMW는 외제차 브랜드가 아닌 Bus, Metro, Walk가 되어 버리고, 값비싼 맞춤정장 대신 홈쇼핑에서 2벌에 18만원에 파는 양복을 주문한다.


눈을 떠보니 나는 그저 평범하게 소시민적 삶을 살아가는 대기업의 월급쟁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는 회사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소박한 일탈을 꿈꿀 뿐이다. 년차가 쌓이고, 나이를 먹을수록 명문대, 대기업이라는 타이틀이 나를 더 초라하고 움츠러들게 만든다.



Oh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