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난 스타트업이 좋은 이유
대학생 시절 '스타트업'이라는 말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창업 홍보 단체를 했던 탓에 주변엔 창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런 지인들과 행사를 기획하면서 만난 스타트업 대표님들은 다들 하나 같이 멋진 뜻을 펼치고 있었다. 가슴 뛰는 열정, 눈 앞에 치킨 따위엔 흔들리지도 않을 그들의 열정을 보면서 스타트업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치킨엔 흔들릴지도?) 자유롭고 폭넓은 경험을 하고 회사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모습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 한편에서 몽글몽글 작은 열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교 4학년, 25살의 나이에 스타트업으로 첫 인턴을 가게 되었다.
3개월이라는 인턴 기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좌충우돌하며 한주 한주를 거듭해가다 보니 어느새 새 학기가 시작될 때가 되었다.
그리고 난, 아직도 그 스타트업 '모두의캠퍼스'에 다니고 있다. 지난 17년 9월 인턴이 끝날 무렵에 대표 형이 제안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대표 분이 같은 창업 홍보 단체였다.)
"명렬아, 인턴 끝나도 계속 함께 일하는 게 어때?"
그때 난 아직 4학년 1학기만 마친 상태였고 졸업 요건은 깨~끗하게 안 채워져 있었다. 남은 학기 동안 여유롭게 다니면서 천천히 취업 준비를 할 생각이었기에 졸업요건도 마지막 학기에 준비하려고 했었다.
"좋아요 형! 고마워요!!"(?)
그럼에도 난 바로 좋다고 대답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학교도 다니고 졸업요건도 채우려면 꽤나 각오가 필요했지만 그건 미래의 내가 해낼 테니까. 사실 내가 원하던 3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곳이라 마음속으론 이미 결심이 서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내릴 수 있던 결정이다. 입사를 결심하게 만들어준 3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회사의 비전에 대한 공감
회사의 비전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일에 열정을 쏟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일을 하면서 보내야 하는데 그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없는 곳에선 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한 동기부여가 없다면 일을 잘 해내기도 어려울뿐더러 오랜 기간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2.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열정
인턴을 다닐 당시의 우리 회사는 출퇴근이 아주 자유로웠다. 특별한 일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오후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누구 하나 일을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자발적으로 엄청난 양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진심으로 웃으면서. 이런 동료들의 열정은 내 열정이 사그라들려고 할 때마다 다시 활활 태워주는 기폭제가 되어주었다.
3. 회사에 끼치는 영향력
마지막 이유는 회사 내에서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회사가 아니라면 그 회사에 적응해서 살아가든지 회사를 나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규모가 커진 회사들은 대부분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당시의 난 인턴이었음에도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했을 때 (그게 중요한 의사결정이라고 해도) 함께 검증을 해보고 수용해 주는 조직문화에 감동받았다. 그렇기에 내 노력을 통해 점진적으로 바꿔나갈 수 있는 회사라는 점이 내게는 엄청난 메리트로 느껴졌고 입사를 결심하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모두의캠퍼스는 내가 정말 매력적으로 느끼던 스타트업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던 회사였기에 인턴 기간에 정말 만족하면서 지냈다. 자발적으로 야근을 할 때도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음 날 출근하는 게 기대되는 기적도 느낄 수 있었다.(일찍 출근은 안 했지만) 그렇기에 제안을 받았을 때는 내가 인정받은 기분도 들었고 앞으로도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날아갈 듯이 기뻤다. 물론 회사랑 함께 다니는 학교는 힘들었지만. (역시 만인의 적, 과거의 나...)
이젠 스타트업이란 말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스타트업에 취직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스타트업 만의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이 그렇다면 응원해주고 싶다. 나 역시 아직까지도 스타트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니까.
하지만 좀 더 편해 보이니까! 재밌어 보이니까!
자유로우니까! 난 열정 빼면 시체니까!
이런 생각으로 스타트업에 가고자 한다면 뜯어말리고 싶다. 생각보다 스타트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굉장히 많은 어려움을 동반한다. 정직원이 되고 1년이 지난 지금은 스타트업에 대한 생각이 작년에 생각하던 것과 많이 달라졌다. 주변 어디에도 마냥 좋은 환상의 회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조직문화.
-업무를 직책에 관계없이 다양하게 경험해볼 수 있다.
-출퇴근이 자유롭다.
-상대적으로 젊은 조직 구성원들.
-자유가 아닌 자율, 그리고 더 큰 책임감.
-다양하게 경험하고 전문성은 적어진다.
-자유로운 출퇴근은 의사소통도 퇴근할 수 있다.
-너무 젊어서 첫 직장인 조직 구성원들.
1. 자유와 책임감
회사생활이 좀 더 편해 보이니까: 편한 회사는 없다.
스타트업은 핫하다고 얘기하는 기술의 도입이 쉽다. 우리 회사는 PHP 언어를 사용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react를 사용하고 있다.(페이스북의 개발언어) 개발자 분이 react의 장점을 설파하셔서 도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 한 대가를 지켜내기 위해, 또 높은 퍼포먼스를 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계시다. 이처럼 스타트업은 이것저것 마음껏 사용해볼 수 있다. 업무환경의 개선을 위해 여러 가지를 테스트로 도입해보기도 하고, 개발언어를 PHP에서 react로 바꾸자는 큰 결정을 주도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유로운 것은 대충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며, 아무거나 해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내가 말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임해야 하며 나의 자유는 회사를 위한 규칙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즉, 자유가 아닌 자율적으로 스스로의 원칙과 규칙 안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하고, 항상 높은 퍼포먼스를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주장에는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많은 양의 업무 속에서 회사를 위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한 준비를 하며 더 늘어난 업무를 감당해내야 한다. 절대 스타트업은 자유롭고 편해서 만만한 곳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롭기에 더 힘들 수도 있다.
2. 다양한 경험과 전문성
재밌어보니까: 재미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게 있다.
대학생 4학년이 되도록 정확히 하고 싶은 무언가가 없던 나는 폭넓은 업무를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인턴 동안 원했던 대로 다양한 직무활동을 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론 마케팅과 관련된 업무를 진행했지만 디자인을 해보고 싶을 때는 포토샵, Adobe XD, 프리미어 프로도 사용해봤다. 페이스북 픽셀과 GA 같은 분석 툴로 성과를 분석해 회의 때 의견을 발표해보기도 하고, 채팅 봇을 사용하기 위해 간단한 json코드를 짜보기도 했다.
당시 회사엔 개발자 2명과 마케터 1명(나), 대표이사 1명이 있었다. 대표 형도 아직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투자 미팅을 하거나 강연을 하러 가는 때가 많았다. 자연스럽게 할 일은 많아졌고 야근하는 날은 늘어 갔다. 하지만 내 역할이 정말 크다는 느낌에 기뻤고, 인정받길 갈망하는 내 갈증도 한껏 채워주었다.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여러 영역을 수행함으로써 높은 만족을 얻었다. 하지만 맡은 분야를 깊게 파고들어 사고하기보단 여러 영역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점점 더 초점이 맞춰졌다. 정작 '마케터'로서의 전문성과는 점점 멀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은 나만 한 것일까? 안타깝게도 수많은 스타트업의 실정도 다를 게 없다. 디자이너가 딱 1명, 마케터가 딱 1명, 개발자가 딱 1명...(온리 원...) 이런 경우가 너무 많다. 특정 직군이 비어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팀빌딩은 보통 대표가 하게 되는데 특정 직군이 없다는 것은 대표가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풀 스택 개발자 1명을 원하는 스타트업이라고 하면 개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냥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오길 바라는 거다. 다른 이유는 그런 인력을 고용할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경우가 제일 많다) 어떤 경우든 추가적인 고용은 기대하기 쉽지 않고, 버티고 버티다 결국 퇴사를 결심하게 된다.
따라서 스타트업에 가고 싶다면 디자이너, 기획자, 마케터, 프론트엔드 개발자, 백엔드 개발자 정도로 나눠져 있는 스타트업으로 가도록 하자. (우리도 지금은 6명이다) 즉, 이제 막 시작한 스타트업은 가지 않는 게 좋다. 만약 가더라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만 생각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재미 만으로 전부 다 이겨낼 수는 없으니까.
3. 자유로운 출퇴근제도
자유로우니까: 그 자유는 꼭 좋은 건가?
우리는 '자율 출퇴근-9to6-자율 출퇴근'의 과정을 거쳤다. 9to6을 새로 도입하게 된 까닭은 너무 자유도가 높은 출퇴근 시간 때문에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팀원이 너무 좋아서 얼굴을 보는 게 목적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논의할 게 있어도 서면 위주로 하게 되고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문제가 대두됐다. 가장 큰 문제는 논의하고 결정해야 할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 누군가 '정해버린'일을 전달받거나 이미 그렇게 행해졌단 소식을 듣는 것이었다. 그래서 9to6을 하게 됐지만 이번엔 개인의 생산성 저하와 지각이라는 문제가 떠오르게 되었다. 자유와 통제 그 중간 지점 어딘가에서 가장 좋은 해결책이 필요했다.
현재는 8~11시에 자유롭게 출근하며 하루에 8시간 근무, 11to5는 협업 시간으로 설정해두었다. 정해진 규칙 아래 5일 동안 40시간만 일한다면 된다. 높은 자유도와 명시된 규칙이 없는 상태는 혼돈의 카오스일 뿐이다. 지나친 통제도 좋지 않다.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만드는 규칙을 세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이렇게 정립하기까지 약 1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아직 많은 스타트업에선 출퇴근제도에 대해 큰 고민을 하지 않고 있다. 자유로운 문화가 좋다니까 그냥 그렇게 적용해보는 분위기이다. 혹은 규칙은 자유롭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고민 없이 남들이 세운 규칙 아래 통제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게 된다. 우리 회사의 맥락을 이해하고 세워진 규칙 속의 자유가 비로소 자율을 만들어낸다.
4. 젊은 조직 구성원과 미생
난 열정 빼면 시체니까: 열정의 채움? 열정의 소비?
조직 구성원이 젊다는 것은 꽤 긍정적인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한 기업에 직장생활이 처음인 사람들만 모인다면 어떨까? 실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실무를 잘 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까 말했듯이 스타트업에선 내가 속한 직군이 1명일 가능성이 높다. 내 직무에 대한 사수가 없다는 것은 일을 하면서도 이게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닌 지에 대한 판단을 못 한다는 거다. 신입인데 모든 걸 담당해야 하고 제대로 알려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대표가 다른 회사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업무에 대해 그 직군에 속한 사람보다 잘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게 좋은 피드백을 주길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땐 차라리 나를 매일 갈구는 상사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긴다.
이렇게 되면 알아서 외부에서 잘 배워와야 한다.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각종 매체를 섭렵하며 인사이트를 찾고 그걸 또 자신의 것으로 가공하고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스타트업은 많은 시간 일하는 것을 열정이라는 이름 아래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이다. 그렇다. 업무에도 나에게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며 자신을 채찍질해야 성장할 수 있다. 아니면 시간이 지나도 현재 상태 그대로 멈춰있게 된다. 가만히 있는 내게 들어오는 요청은 '성장'하라는 것보단 '일'을 하라는 것이니까. 주위에선 어떤 이유이건 내 열정을 계속해서 소비시킨다. 저건 내 안에서 떠오른 열정이 쓰일 곳이 아닌 것 같은데 내 열정을 가져다 쓰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비워진 내 열정은 내가 계속 채워나가야 한다. 열정을 채우지 못하게 될 때가 오면 회사를 떠나게 된다. 슬프지만 이미 '열정 빼면 시체'라고 하지 않았는가.
1년 동안 일하면서 위처럼 스타트업에 대한 환상은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난 여전히 스타트업이 좋다. 스스로 동기 부여하지 못한다면, 알아서 성장할 수 없다면 스타트업은 적합하지 않은 공간일 수 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배움과 성장, 그리고 인정이다.
난 사람이 가장 잘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회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내게 성장할 동력을 주고 서로가 배워나갈 수 있는 스타트업이 좋다. 내가 배운 걸 빠르게 적용해볼 수 있고 그 열정에 함께 기뻐하고 인정해주는 동료가 있는 이 곳이 좋다. 함께 만들어가는 여기가 정말 좋다.
그렇기에 스타트업에 대한 환상은 깨졌지만
그럼에도 난 스타트업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