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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쌍쌍바 Nov 01. 2023

어학원 꼴찌 학생, 번아웃과 이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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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한 운동으로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 마침내 정신에 편안함이 찾아오듯이, 잡념이 사라지는 곳,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때로 평화를 느낀다.  -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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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사업, 직장, 사업. 도돌이표같은 일상에 번아웃이 찾아왔다. 매우 불편한 놈이다. 무기력으로 시작해 불면증과 우울감까지. 내겐 변화가 절실했다. 낯선 곳에 가자, 그리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 나를 던지자. 그래서 선택한 곳은 말레이시아였다. 한없이 낯선 그 곳에 지친 나를 끌고 들어가 분주하고 소란한 일상을 지내다 보면 번아웃 그놈도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나 싶은 막연한 기대를 했다. 그게 갑작스러운 말레이시아행 이유의 전부였다. 


“엄마, 우리 말레이시아에 가요? 거기는 엄청 덥대요. 모기도 많겠다” 


‘7살 내 아들은 모기가 걱정이구나, 이 애미는 영.알.못 소심쟁이인 내가 걱정이구나.. 너한테 든든하고 멋진 엄마이고 싶은데 말이지’ 아이를 바라보며 불안한 나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웃어보였다. 어쩌면 MBTI 극 I 인 내게 아주 쥐약 같은 처방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깐 했다. 하지만 그 놈을 깔끔하게 제거하고 싶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의 인생 2막에 걸림돌이 되면 안되니까. 




예상대로 말레이시아에 도착하자마자 혼이 나갈 만큼 바빴다. 정말이지 생존(?)을 위한 하루하루였다. 우선, 에어비엔비로 일주일 동안 임시로 머물면서 1년 동안 살 집을 알아봐야했다. 일주일 뒤면 아이 학교 시작이라 서둘러야 했던 상황. 영어 일자무식인 내가 타국에서 손짓 발짓 눈빛으로 집을 구했다. 그것도 깨나 마음에 드는 컨디션의 집을 좋은 렌트비로 말이다. ’오! 신이시여 내가 해냈나이다’ 무신론자가 신을 찾을 만큼 칭찬 받고 싶은 순간이었다. 작은 소형차 장기 렌트 계약도 하고(이건 한국 업체라 쉽게), 이케아에서 크고 작은 살림살이 사다 나르기를 수십번 하다 보니 불면증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매일매일 넉다운이 되어서 잠이 들었다. 그래도 흐믓했다. 아니, 그래서 좋았다.

‘니가 바라던 매일매일이잖아, 잡념 없이 정신없이 지내기’ 


“엄마! 조슈아가 오늘 내 간식 도시락 보고 멋있대. 술탄은 김을 스낵으로 싸왔어요. 한국 김이 맛있대요. 

그리고 잠깐 물통을 운동장에 두고왔는데 완전 뜨거운 물이 됐어요. 음… 또 그리고 수영시간에 갑자기 번개가 쳐서 사이렌이 울렸어요. 좀 무서웠는데 금방 괜찮아졌어요” 


재잘재잘 아이는 어느새 말레이시아 학교에 적응을 했는지 한동안 그리워 했던 한국 유치원 친구들 이름 대신 낯선 외국 친구들 이야기로 하루를 마무리 하곤 했다. 두달 남짓을 미션 클리어 하듯 보냈던 나도 여유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좀 쉴 수 있겠네’ 했는데… 헉, 나에게 또 숙제가 떨어졌다.


‘다음 주 Ryan(아들 영어 이름)의 생일파티를 할거야. 케이크와 간식 준비해줄래?’

아이 담임쌤(파란눈 영국인 선생님)으로 부터 온 이메일 내용이다. 급하게 구글링으로 주변 베이커리를 찾아갔다. 또 말도 안되게 어버버버한 영어발음과 손짓 눈빛으로 케이크 주문을 시도 했다. 제대로 된  문장이라고는 없는..  


“마이 썬 벌쓰데이 (핸드폰 달력을 가리키며) 디스 데이…. 아이 픽업 케이크. 오케이?”


주인은 알아들었는지 케이크 카탈로그를 꺼내와 보여주며 뭐라뭐라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충 이해하기로는 데코레이션, 레터링 등등 상당히 디테일한 내용인듯 했으나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몰라서 ‘으으 어어 으응' 하면서 그냥 연신 고개만 끄덕끄덕 거렸다. 그런 내 모습이 반벙어리 같았는지 조용히 카탈로그를 닫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멈춰줘서 고마워요..ㅎㅎㅎ’ 




생일 날 아침, 무사히 케이크를 들고 아들 교실 앞에 서있을 때 이제 전달만 하면 숙제 끝이구나 하며 안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파란눈의 쌤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란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쭈뼛쭈뼛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국제학교인지라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 우루르르 나를 뱅 둘러싸더니 영어로 속사포 처럼 질문을 던져대는데 그때부터 나의 정신은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뭐라고 답해줄 수도 없는 나. 선생님도 나한테 자꾸 “Can you 뭐라뭐라? Can you 쏼라쏼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못알아 듣겠고. 나는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좀처럼 입밖으로 터지지 않는 나의 영어 때문에 입술 주변이 파르르 떨리고 애먼 손동작만 허공에서 춤을 추니 마치 뇌의 통제를 받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얼굴엔 울긋불긋 열꽃이 화~~알짝 만개했으며 겨드랑이엔 한바가지의 땀으로 흥건했다. ‘아—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 


그런 아이들 사이로 보이는 누군가의 시선이 따가웠다. 아들…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의 눈빛은 불안함과 부끄러움 그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집에서 잔소리 퍼부을 때는 그렇게나 대차고 일사천리로 쏟아 붓던 엄마인데 지금은 백치 아다다급 반벙어리가 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란… 너의 눈에도 얼마나 하찮아 보였을지… 아들에게 창피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날밤은 교실 속 나의 모습을 되새김질 하다가 이불킥 수만번에 뒤척뒤척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그렇게 계획에 없던 어학원을 등록했다. 예상대로 기초반에 배정 받은 나는 긴장 모드 상태로 수업에 들어갔다. ‘그래, 이런 긴장감… 나쁘지 않아, 이렇게 또 바쁘게 지내다 보면 번아웃도 사라지고 아들한테도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 수 있을거야’ 

선생님은 나이 지긋한 영국 남자 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느린 말투가 내 마음에 들었다. ‘오- 이 선생님 느낌 좋아’ 돌아가면서 간단히 자기 소개의 시간.  은퇴 후, 말레이시아에서 보내려고 왔다는 일본인 할머니, 말레이시아 남성과 결혼 해서 살고 있다는 중국인 여성, 일자리 구하러 왔다는 히잡을 쓴 인도네시아 여성 까지… 자기 소개를 마치고 내 차례가 왔을 때 


“I am eunhee. I am Korean. and…. I like red color…” 


그때 훅 들어온 선생님의 지적. 나의 ‘R’ 발음이 거슬렸던 것. 그 큰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자신의 입모양을 잘 보라는 제스처를 했다. 그리고는 혀를 말아 제대로 된 ‘R’ 발음을 내고는 따라 해보라고 했다. 

“R”

“알” 

“No, R”

“알” 

“No No, R!” 

“알” 

"외로운 나의 R"


정말이지 내 혀는 소가 여물 먹을 때의 혓바닥 처럼 낼름낼름 입 속에서 요동치며 방황을 했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표정은 쓴웃음과 안쓰러움 그 어딘가에 멈춰있었다. 하도 알알(RR) 거렸더니 그 때 처음 혓바닥에도 쥐가 날 수 있구나 몸소 체험했다. 선생님은 하도 답답했던지 급기야 일본인 할머니한테도 ‘R’을 해보라며 재촉했다. 이건 뭐지? 뜻밖의 한.일전인가? 서러워졌다. 나 이러려고 말레이시아 온 거 아닌데, 갑자기 엄마도 보고싶고 아빠도 보고싶고 이런 내모습을 보면서 데굴데굴 구르며 웃을 것만 같은 남동생 마저 그리웠다. 타국땅 어학원에서 찾은 뜻밖의 가족애라니. 그렇게 선생님의 ‘R’과 나의 ‘알’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첫 수업을 마쳤다.


하루이틀… 그리고  일주일 이주일, 나는 여전히 ‘R’ 발음이 어색한 우리반 꼴등이었지만 꼬박꼬박 출석 했다. 개근이 실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좀 문제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라지 않았나. 뭐라도 하니 나았다. 잡념이 사라지니 불면증이 줄고 잠을 잘 자니 활력이 생겼다. 

나 이렇게 번아웃과 이별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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