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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는이야기 Jun 15. 2016

지옥길, 살짝만 밀려도 난 죽는다

[트레킹으로 지구 한 바퀴] 이상한 나라 파키스탄의 마지막 여정

거울 앞에서 물었다. "너, 지금 행복하니?" 이 질문의 답은 '사표'였다. 배낭을 멨고, 지구를 한 바퀴 돌겠다며 길을 나섰다. 좌충우돌 세계일주 여행기를 연재한다.





[이야기 1] 꿈결 같은 페리메도우 트레킹


길기트에서 며칠 정비를 한 뒤 낭가파르바트를 볼 수 있는 페리메도우 트레킹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페리메도우 트레킹을 위해서는 3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길기트 남쪽에 자리 잡은 라이콧브리지까지 가는 게 먼저였다.

라이콧브리지에서 내리는 승객은 나뿐이었다. 손님 맞이라도 하듯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고약한 날이었다. 다리 앞에는 지프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발견하고 지프를 대절할 거냐고 물었다. 가격은 6000루피였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가격이었다. 페리메도우 트레킹을 하려면 라이콧브리지에서 트레킹 시작점까지 차량을 이용해야 한다. 물론 걸어가도 되지만 앞뒤로 배낭을 메고 산길을 몇 시간 동안 걷는 건 무리였다.

이 지역 주민들은 지프 대절비용을 담합하고 있어 협상은 불가능했다. 지프 기사들이 흥정을 걸어왔지만 깎으려는 나와 협상이 될 턱이 없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됐다. 다른 여행자가 나타나 지프를 조인해야만 트레킹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모래바람 속에서 한 시간 정도 기다렸을 때쯤 5명의 파키스탄 여행자들이 나타났다. 모두 남자들이었다. 천운이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정중히 지프를 같이 빌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편도에 700루피만 내라고 했다. 손쉽게 딜이 됐다. 지프를 타고 오르는 길은 아찔했다. 지프 한 대가 간신히 다닐 수 있는 길은 간담을 서늘케 했다. 타이어가 50cm만 밖으로 밀려나도 그대로 이승과는 생이별이었다. 깎아지른 절벽 밑은 천 길 낭떠러지였다. 간이 콩알만 해졌지만 지프 기사는 능수능란했다. 절벽을 깎아 만든 길 위에 지프가 위태로운 모습으로 멈춰섰다. 

지프 기사는 보닛을 열고 물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잠시 내려 낭떠러지 밑을 바라봤다. 오금이 저려왔다. 제대로 눈을 뜨고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길을 한 시간 정도 오르자 길이 끊겼다. 지프가 갈 수 있는 한계점이었다. 이곳에서부터 페리메도우까지는 보통 2시간 30분 정도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지프를 같이 타고 온 친구들을 따라 나섰다. 필요한 짐만 챙기고 배낭 하나는 근처 게스트하우스에 맡겨 놓을 심산이었다. 점심도 먹어야 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이 친구들을 쫓아가고 있었다.

"너희들 어디까지 가니?"
"너 페리메도우 간다며?"
"중간에 게스트하우스 없니?"
"지나왔는데... (게스트하우스는) 밑에 있던 게 전부야."
"진짜?"

아침, 점심을 거르고 내가 가진 짐을 모두 메고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이건 내가 계획했던 일이 결코 아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눈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하늘이 노랗게 변할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산을 오르지 못하고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산은 먹은 만큼 오를 수 있다. 그래서 정직하다. 계속 가든지 내려가든지 결정해야 했다. 이 길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신발끈을 고쳐 묶었다. 어찌 됐건 가야 했다. 각오를 다시 새롭게 하고 배낭을 메려고 할 때였다. 보다 못한 파키스탄 친구 하나가 내 큰 배낭을 자기가 메겠다고 나섰다.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오늘 너는 내 게스트야." 

이 친구는 중국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올 때 아민잔이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내뱉었다. 가는 길에 몇 번이나 배낭을 바꾸자고 했지만, 그는 기어코 페리메도우까지 내 배낭을 들어주었다. 한순간에 '민폐남'이 되었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산에서 남에게 내 배낭을 맡겨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해발 3300m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배낭 속에는 입지도 않는 옷·빨래·넷북 등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산을 좀 아는 사람이 봤으면 혀를 찼을 일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아!"

3시간 뒤 페리메도우에서 하룻밤만 보내려고 했던 생각을 단숨에 바꿔주는 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낭가파르바트의 웅장한 위용과 페리메도우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페리메도우에는 요정이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진짜라고 믿고 싶을 만한 장관이었다. 탄성이 절로 흘렀다.

초원 한쪽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작은 웅덩이엔 낭가파르바트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예쁜 엽서그림이 따로 없었다. 여기까지 그 생고생을 하고 왔는데 하룻밤은 예의가 아니었다. 하루에 150루피를 내고 텐트를 치기로 했다. 서둘러 잠자리를 만들고 버너를 꺼내 마지막 남은 신라면을 끓였다. 오늘 나를 구원해준 진짜 요정들을 불러 한 젓가락씩 나눠 먹으니 냄비는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어느새 친구가 돼버린 이들에게 라면을 더 대접하지 못하는 손이 미안하기만 했다.

페리메도우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한쪽에선 모닥불이 피어 올랐다. 양 한 마리가 지글거리며 통째로 익어갔다. 통구이 바비큐 주변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입맛만 다시고 있는 내게 누군가 양고기 한 점을 내밀었다. 체면을 차릴 새도 없이 날름 고기를 받아 게걸스럽게 입에 물었다. 입안으로 양고기 육즙이 진하게 퍼졌다. 그는 환하게 웃는 내게 다시 양고기를 썰어 내밀었다. 고기를 씹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페리메도우의 밤하늘은 검은 도화지 위에 은빛 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였다.

'양고기를 썰고 있는 사람이 설마, 요정은 아니겠지?'


                                                

여행 정보

낭가파르바트는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산이다. 파키스탄에서 K2에 이어 2번째로 높은 산이기도 하다. 낭가파르바트는 우르두어로 '벌거벗은 산'을 의미한다. 셰르파어로는 '악마의 산'이라 불린다.

이 산의 남쪽에는 4500m의 루팔 벽이 버티고 있다. 히말라야를 오르는 등반가들에게 안나푸르나 남벽·마칼루 남서벽과 더불어 가장 어려운 코스로 꼽히는 곳이다. 루팔 벽은 1970년 이탈리아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첫 등정에 성공했고, 우리나라에서는 1999년 엄홍길이 등정에 성공했다.

만약 페리메도우 트레킹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엄청난 거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루팔 코스를 선택했을 것 같다. 특히 루팔마을은 파키스탄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난 곳이다.

루팔 벽을 보기 위해서는 우선 길기트에서 지프를 대절해 타라싱 까지 7시간 정도를 달려야 한다. 트레킹은 타라싱을 시작으로 헤르리히코퍼베이스캠프(3550m)~샤이기리(3655m)~타라싱으로 이어지며 2박 3일이 소요된다.





[이야기 2] "눈물이 날 것 같았어!"


"똑, 똑, 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깼다. 텐트를 나서니 낭가파르바트가 흰 구름 모자를 쓰고 있었다. 피톤치드를 듬뿍 머금은 상쾌한 공기가 폐 속의 더운 공기를 밀어냈다. 기지개를 켜고 주변을 둘러봤다. 싱그러운 아침이었다.

                                                                                         

전날 내 배낭을 들어 준 파키스탄 친구들이 낭가파르바트 베이스캠프에 다녀올 계획이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이들은 날 보고 같이 트레킹을 하자고 했다. 못해도 왕복 6~7시간 거리였다. 이런 오지 트레킹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음식 조달이었다. 기껏해야 비스킷 조각으로 허기를 달래야 하는 처지에 베이스캠프까지 다녀오는 건 무리였다.

친구들을 배웅하고 혼자서 페리메도우 근처를 산책했다. 동네 아이들이 드넓은 초원에서 크리켓을 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같이 게임을 하자고 했다. 크리켓 방식으로 팔을 돌려 공을 한번 던져봤다. 땅을 한 번 바운드시켜야 하는데 공이 야구공처럼 직선으로 날아갔다. 혼자 '피식' 웃고는 산책을 즐겼다. 몇몇 동네 꼬마아이들이 날 따라나섰다. 아이들에게 스프라이트를 내밀었다. 가장 키가 큰 꼬마가 고양이처럼 잽싸게 음료수 캔을 낚아채 갔다. 물질 결핍에서 오는 갈망과 욕구가 엿보였다.

페리메도우 한쪽에 현지인들이 사는 마을이 궁금해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원초적인 그네들의 삶이 먼발치서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이방인을 발견한 동네주민이, 가까이 오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이방인의 접근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듯했다.



산책 뒤에는 어제 저녁 수줍게 양고기를 나눠주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방학을 즐기러 온 10명 정도 되는 대학생들은 모두 건축디자인을 전공한다고 했다. 피부가 좀 검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학생에게 물었다.

"너 탈레반이니?"
"뭐!"
"ㅋㅋㅋ."


이들은 극동에서 온 내게 관심이 많았다. 이것저것 질문이 많았고 난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주었다. 한 친구가 나무껍질에 손수 페리메도우를 그려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여행 중 받아보는 첫 번째 선물이었다.

대학생들과 짧은 인사를 하고 오수를 즐겼다. 베이스캠프로 떠난 친구들이 오후 늦게 돌아왔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쉽지 않은 코스인 듯했다. 이들은 도착과 동시에 곧장 숙소로 들어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낮에 만난 학생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난 식사를 하며 대통령 후보 검증수준과 맞먹는 엄청난 양의 질문을 받아내야 했다. 10명은 계속 질문만 했고, 한 명은 계속 답변만 해야 하는 즐거우면서 피곤한 시간이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다음날 아침 이슬라마바드로 가기 위해 다시 지프에 몸을 실었다. 밤사이 내린 비와 우박으로 지옥 길은 더욱 위험천만해 보였다. 악몽 같은 길이 다시 시작됐다. 앞자리에 앉은 난 안전장치 없는 롤러코스터에 탄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라이콧브리지에 도착했다. "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나머지 지프 비용을 내밀었다. 첫날 같이 지프를 타고 온 친구들은 그새 정이 들었는지 한사코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래도 줄 돈은 줘야 마음이 편했다. 안 받겠다는 돈을 한국식으로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3일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과 만든 추억은 3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것 같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언제 올지 모를 이슬라마바드행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한 시간 정도 망연히 버스를 기다렸을까. 텅 빈 25인승 버스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라이콧브리지 앞에 정차했다. 놀란 마음에 승객이 하나도 없는 텅 빈 버스에 올랐다. 파키스탄에서 본 가장 좋은 버스였다.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본능적으로 불안감이 찾아들었다. 이런 좋은 차가 빈 차로 운행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왜 승객이 아무도 없죠?"
"근처 호텔로 학생들을 태우러 가는 길이에요."
"네? 학생들이라니요?"
"페리메도우에서 내려온 학생들에게 전화가 왔어요. 라이콧브리지에서 외국인 한 명을 태우고 오라고..."
"정말요? 이슬라마바드에서 온 학생들인가요?"
"맞아요!"


이날 아침 먼저 라이콧브리지로 내려간 10여 명의 대학생들이었다. 전날 학생 중 한 명이 버스를 같이 타고 가자는 말을 하긴 했지만, 지프를 타고 하산하는 시간이 달라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확신을 못했다.

버스 기사는 학생들이 라이콧브리지 근처 호텔에서 짐을 찾은 뒤 쉬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 가지 않아 호텔 앞에 버스가 섰다. 텅 빈 버스 안에 혼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하나둘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슈크리아(감사합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행 정보

파키스탄에서 물보다 더 많이 마신 짜이는 이 나라뿐 아니라 인도를 비롯해 남아시아권 국가에서 차를 의미하는 말로 통용된다. 짜이의 원조는 인도다. 인도인의 홍차 문화는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 생겨난 것이다. 이 때문에 컵의 내용물을 접시받침에 옮겨 마시는 등 낡은 영국풍의 차 문화가 남아 있는 곳이 일부 있다. 

짜이는 매우 서민적인 음료로 홍차를 끓여낸 후 많은 양의 우유를 더해 장시간 우려내면 완성된다. 거기다 기호에 맞게 설탕을 첨가하면 나만의 짜이가 완성된다. 파키스탄을 떠난 뒤에도 짜이는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았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데 없어선 안 될 짜이. 파키스탄                                   




[이야기 3] 트레킹보다 힘든 버스, 버스, 버스


이슬라마바드로 가는 16시간 동안은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의 연속이었다. 이동 중 두 번의 식사를 했고, 2~3시간마다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또 버스는 기도시간마다 정확히 모스크 앞에 멈춰 섰다. 

그런데 내가 쓴 돈은 차비밖에 없었다. 밥과 차, 음료수 등 모든 게 무료서비스로 제공됐다. 열 살도 더 어린 파키스탄 대학생들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낼 틈조차 주지 않았다. 현지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도리어 고마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없어 보이는 여행자라고는 하지만 이건 인간 대 인간으로 도리가 아니었다.



무엇으로든 답례를 하고 싶었다. 버스가 휴게소에 정차했다. 조용히 음료수를 꺼내와 가게 주인장 앞에 섰다. 행동이 커지면 학생들이 분명 날 막아설 게 뻔했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음료수를 품에 안고 값을 치르려고 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은 내게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내 뒤를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왔는지 학생 한 명이 내 뒤에 서 있었다.

'된장! 걸렸다!'

저녁을 먹기 전 버스가 하얀 먼지를 날리며 모스크 앞에 정차했다.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하니?"
"킴, 네 종교는 뭐야?"
"가톨릭."
"오! 그래. 그럼 우리 형제네. 우리는 너의 행복과 평안 그리고 지구와 우주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
"진짜? 네가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니?"
"그럴 때도 있지만, 보통은 주위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기도해."


짧은 대화였지만 이슬람교에 대한 선입견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여행은 관점이 바뀔 때 가장 가치있다. 우리의 종교는 분명 달랐지만, 너와 내가 평화롭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은 같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뿌리는 하나 아닌가.


                                                                                         

새벽 4시 30분쯤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했다. 학생들은 내 행선지를 묻고는 택시기사와 가격협상까지 해주었다. 개중에는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전화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한국에 가면 나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이슬라마바드 근처 라왈핀디 대우 버스터미널. 파키스탄에서는 '대우 버스'란 이름으로 우리 기업이 운수업을 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최고급형 버스를 보유하고 있는 회사이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45인승 버스가 파키스탄에서는 가장 좋은 버스인 셈이다.

곧장 파키스탄의 남쪽 끝 도시 카라치로 가는 버스를 타야했다. 24시간이 걸리는 이동이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터미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카라치행 버스는 9시부터 티켓을 판매한다고 했다. 4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별수 없이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말벗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혼자 남겨지면 화장실에 가는 게 가장 큰 고민거리다. 마땅히 짐을 맡겨 놓을 곳도 없고, 배낭을 메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도 여의치 않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에게 배낭을 좀 봐달라고 했다. 그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손짓으로 내 배낭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 9시가 다 돼서야 탑승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승무원은 30분 뒤 첫차가 출발하니 그때 이름을 부르면 오라고 했다. 현지어로 안내방송이 나왔다. 티켓부스에선 '미스터 킴'을 찾고 있었다.

"버스 요금이 얼마죠?"
"3750루피입니다."
"잠... 잠깐만요... 뭐라고요?"
"3750루피."
"이럴 리가 없는데." 


지갑을 탈탈 털어보니 3200루피밖에 없었다. 사전 정보에 따르면 버스가격이 이렇게 비싸지 않았다. 그새 버스요금이 오른 건가 아니면 내가 정보를 잘못 찾은 건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승무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분명 다른 사람도 똑같이 3750루피를 내고 있었다. 사기를 치는 건 아니었다. 승무원은 돈이 없다는 날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는 ATM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카드가 먹질 않았다.

"아놔!" 

급히 배낭을 둘러메고 밖으로 나갔다. 상점에 들어가 근처에 ATM이나 환전할 곳이 있느냐고 물으니 시내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순식간에 택시기사들이 날 둘러쌌다. 다들 라왈핀디 시내에 있는 시티은행까지 왕복으로 400루피를 내라고 했다. 급한 마음에 일단 300루피에 네고를 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기사는 은행들이 모여 있는 뱅크스트리스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물어물어 시티은행을 찾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때마침 ATM이 수리를 하고 있었다. 시트콤을 찍는 것도 아니고 인생이 이렇게 한순간에 꼬일 수 있다는 말인가. 시티은행의 초저가 1달러 수수료를 포기하고 옆에 있는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맙소사!' 여기 ATM도 고장이었다. 제대로 황당 시추에이션이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다시 시티은행으로 발길을 돌렸다. 왠지 시티은행에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터벅터벅 힘없이 다시 은행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은행직원이 날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는 15분 뒤면 수리가 다 된다고 했다.

"헐~"

서둘러 돈을 찾아 터미널로 돌아왔다. 요금을 내기 전 택시기사는 '씨익'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얼마 줄래?"
"300루피 준다고 했잖아."
"알지. 그런데 내가 너를 위해서 모르는 길을 열심히 찾아 주었잖아."
"(결국, 이거였지) 알았어, 알았어, 400루피."

오전 10시 30분 카라치행 버스에 올라타니 어여쁜 안내양이 음료수를 내밀었다. 중간에 간식을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버스는 24시간 동안 달려 다음날 오전 카라치 대우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페리메도우에서 시작한 50시간이 넘는 긴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번 여정에서 하나는 분명해졌다. 앞으로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이런 초장거리 이동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그들이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야피, 라우드 알 라야힌


난 점점 여행에 미쳐가고 있었다.


                                                                                                                                           

여행 정보

파키스탄의 가장 남쪽 도시 카라치는 보통 여행자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여행 정보를 찾는 데 애를 먹은 곳 중 하나다.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은 비행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행자 숙소는 사다르 바자르에 몰려 있다. 현지에서 '사다르'라고 하면 알아듣지 못하고 '사달~'이라고 하면 더 잘 이해한다. 사실 카라치에는 마땅한 여행자 숙소가 없다. 그나마 갈 수 있는 곳은 바자르 안쪽에 걸프호텔, 유나이트호텔, 릴리안스호텔 등이다. 

난 걸프호텔에 묵었다. 하룻밤에 2200루피짜리 방을 2000루피에 투숙했다. 여행 중 가장 비싼 방이었다. 에어컨이 있고, 화장실이 딸려 있는 시설에 만족했다. 걸프호텔에서 공항까지는 30~40분 걸린다. 호텔밴은 공항까지 800루피를 달라고 했다. 주변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택시를 타면 500~700루피 사이라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공항까지 택시를 타고 지불한 돈은 350루피였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김동우 시민기자가 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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