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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는이야기 Oct 26. 2016

탄자니아 여행, 킬리만자로를 향해

[트레킹으로 지구 한 바퀴] 대체 라면에 무슨 짓을...

거울 앞에서 물었다. "너, 지금 행복하니?" 이 질문의 답은 '사표'였다. 배낭을 멨고, 지구를 한 바퀴 돌겠다며 길을 나섰다. 좌충우돌 세계일주 여행기를 연재한다.



                                                         

[이야기①] 킬리만자로 트레킹 중 찾아온 '멘붕'

킬리만자로 등정의 시작점 마랑구 게이트(1970m) 앞. 출발 전 가이드로 소개받은 '찰스'가 이번 산행을 같이하게 될 네덜란드 처자 아나와 네나 그리고 호주인 랄스 아저씨를 소개했다.

이번 킬리만자로 산행은 850달러에 계약했다. 협상력이 좋은 한국 여행자 중에는 최저가 700달러에도 네고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음식이 부실해질 가능성이 높다. 밥심이 산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에 난 적당한 선에서 가격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동행이 있다는 건 출발 전 전혀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조인해서 산행을 해야 하는 거였다면 가격협상이 당연히 다른 양상을 보였을 거다. 일단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기서 다시 가격협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모시로 돌아가 따질 수도 없었다.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짚어 주고 출발했다. 일단은 기분 좋게 산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산행을 하면서 안 사실이지만 나머지 3명은 모두 6일짜리 일정이었고 난 5일짜리 일정이었다. 사흘째부터는 나 혼자 산행을 해야 했다. 산행은 울창한 밀림에서 시작됐다. 길도 그리 험하지 않았다. 완만한 경사가 계속되는 손쉬운 길이었다. 속도를 내기 안성맞춤이었다. 킬리만자로는 화산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의 한라산과 분위기가 여러모로 닮아 있었다. 전체적인 루트의 구조도 한라산을 빼닮아 있었다. 한라산을 5895m로 높여 놓은 느낌이었다.



첫날 찰스는 '천천히'란 뜻의 스와힐리어인 "뽈레뽈레"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조금만 속도를 내도 여지없이 찰스는 "뽈레뽈레"라고 말했다. 한 시간 반 정도 쉬엄쉬엄 경치를 구경하며 걸으니 어느새 점심 장소가 나왔다. 


출발 전 가이드가 나눠 준 점심 도시락을 꺼내 식사를 했다. 그런대로 구색이 갖춰진 도시락이었다. 도시락을 먹고는 산책로 같은 평탄한 길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뒷짐을 지고 '산보'하는 마음으로 산을 즐기자 어느새 만다라 산장(2700m)이 눈에 들어왔다.



4명이 함께 쓸 수 있는 산장 한 동을 배정받고 짐을 풀었다. 휴식 시간을 갖곤 가이드와 한 시간 정도 마운디 분화구로 고소 적응 겸 산책을 나섰다. 마운디 분화구는 만다라 산장 근처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다. 분화구에 올라서자 끝없이 이어지는 아프리카의 초원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



짧은 산책 뒤에는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프와 빵, 각종 야채볶음이 나왔고 감자요리가 메인이었다. 난 수프와 빵을 먹고는 감자에는 거의 손을 못 댔다. 도대체 감자에다 무슨 장난을 했는지…. 아나가 물었다.


"킴, 왜 안 먹어?" 

"배가 불러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내뱉었다. 아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쳐다봤다. 아나는 23살이었고, 거의 내 양의 3배를 먹어 치웠다. 그 정도 먹성이면 내 먹는 양이 걱정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잘 먹어서 나와 키가 비슷한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엄청난 식성과 체격이었다.


아나는 감자를 으깨서 쉼 없이 입 속에 밀어 넣었다. 그 옆에 있던 네나도 잘 먹긴 마찬가지였다. 네나의 나이는 22살이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킬리만자로 등정에 나선 랄스 아저씨는 나랑 먹는 양이 비슷했다. 랄스 아저씨와 난 아나와 네나의 먹성을 그저 부럽게 바라보기만 했다.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오랜만에 하는 혼숙이 편치 않아 제일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요리사는 세숫물을 받아왔다. 고양이 세수를 한 뒤 식사를 마치자 가이드는 점심 도시락을 나눠 주었다.


호롬보 산장은 해발 3780m에 자리 잡고 있다. 1080m를 올라야 하는 일정이었다. 산행 시간은 어림잡아 5~6시간 정도다. 오전 8시 '뽈레뽈레'란 구령에 맞춰 힘차게 하루를 시작했다. 산행 시작과 함께 울창한 밀림이 사라졌다. 어느덧 발걸음이 구름 위에 올라와 있었다. 다들 즐겁게 산행을 이어갔다. 서서히 킬리만자로 정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킬리만자로 만년설이 찢어진 하얀 도포를 걸쳐 입고 있었다. 아직은 충분히 매혹적인 자태였다. 힘차게 달려가면 2~3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지척처럼 느껴졌다.


만다라 산장을 출발한 지 5시간 45분 만에 호롬보 산장에 도착했다. 걱정했던 고산증은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 야딩 트레킹에서 경험해 봤지만, 해발 4500m 정도를 넘어야 두통이 시작되는 걸 감안하면 아직 걱정할 단계는 아니었다. 난 내일 키보 산장(4703m)으로 가야하고, 나머지 3명은 여기서 하루를 더 머물며 고소 적응을 하게 된다. 동행과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밤이었다.



저녁 식사 전 요리사는 팝콘과 차를 내왔다. 그리고 난 요리사에게 알토란 같은 안성탕면 한 봉지를 내밀었다. 호롬보 산장을 샅샅이 뒤져봐도 딱 하나밖에 없는 금쪽같은 라면이었다. 이 라면은 모시에서 만난 한국인 대학생이 선물로 주고 간 거였다. 여행 중 라면 한 봉지가 주는 위안은 이루 말할수 없이 컸다.


라면을 끓여 본 적이 있는지 요리사에게 물었다. 요리사는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래도 검은 피부색을 가진 탄자니아 요리사가 못 미더워 재차 확인했다. 그는 "라면을 요리해 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표정과 어조 모두 경험에서 배어나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난 저녁식사 시간에 먹을 수 있게 해달라며 기분 좋게 라면을 넘겨주었다.



저녁 식사까지는 아직 2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런데 배에선 벌써 '꼬르륵' 소리가 났다. 킬리만자로에서 라면 한 봉지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생각만으로 입 속에 침이 고였다. 난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에 등장하는 한 마리 개가 돼 있었다. 그럴수록 시간은 굼벵이처럼 더디게 흘러갔다.


드디어 만찬 시간이 돌아왔다. 일단 요리사가 빵과 야채수프를 내왔다. 수프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우고 초조함을 숨긴 채 MSG가 듬뿍 들어가 있는 라면을 기다렸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나와 네나는 내 앞에서 빵에 땅콩버터를 듬뿍 발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그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때마침 요리사가 내 머리 뒤에서 인기척을 냈다.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그는 작은 쟁반을 들고서 있었다. 그… 런… 데… 그… 만… 기대가 순간 절망으로 바뀌었다. 냉동인간이 된 것처럼 내 사지는 순식간에 마비증상을 보였다. 토끼 눈을 하고 요리사를 올려다봤다.


"아놔!"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의 충격,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머릿속을 때렸다. 그리곤 '멘붕'이 찾아왔다. 요리사가 들고 있는 건 냄비 안에 매콤한 냄새를 풍기며 둥둥 떠 있어야 할 면발이 아니었다. 면은 사정없이 볶아져 있었다. 좌절(OTL)이었다.


"이게 뭐야!"


순간 요리사의 면상에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욕이 혀끝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라면 하나에 이성을 잃은 한국인이 되고 싶지 않아 욕지거리를 힘겹게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볶아져 있는 면발을 멍하니 바라봤다. 절대 공황의 순간이었다.


'이걸 어쩌지. 하나밖에 없는 라면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자, 아나가 물었다.


"이거 어떻게 요리하는 거니?"

"어…어…어… 그게…." 


무엇인가 말을 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떠오르는 영어 단어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울고 싶었다. 그리고 요리사의 얼굴을 보며 절규했다.


"It's noodle Soup!"

"걱정하지 마. 킴!" 


요리사는 내 일그러진 얼굴을 보곤 물을 넣고 다시 끓여오겠다며 황급히 사라졌다.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울고 있었다. '후루룩~' 면발을 흡입하려고 했던 내 작은 소망이 이렇게 산산이 조각날 줄은 미처 몰랐다. 요리사가 다시 묵사발 난 라면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두번째 충격이 엄습했다.


"어~엄~마~."


볶음면이 '라볶이'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마시고 싶던 국물은 극소량이었고 맛은 엄청나게 짰다.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면을 더 끓였다가는 죽이 될 게 뻔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나에겐 킬리만자로에서 먹은 라면이 그랬다.




[이야기②] '우후르피크' 넌 자유였어!


이른 아침 혼자 산장을 빠져나왔다. 아나, 네나, 랄스 아저씨는 여기서 하룻밤을 더 보내게 되고 난 오늘 4703m에 위치한 키보 산장으로 가야 했다. 아침을 챙겨 먹자 하산까지 내 전담 가이드를 해줄 아도니스가 일정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포터는 내 큰 배낭을 메고 이미 떠난 뒤였다.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식당 앞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단체 트레킹을 온 독일인팀을 위해 포터와 가이드가 오늘 산행의 안전과 평안을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는 스와힐리어로 '걱정거리가 없다'란 뜻이다. 노래를 들으며 오늘 하루가 아무런 걱정 없이 마무리되길 기도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발걸음을 옮기는 게 점점 힘겨워졌다. 한 시간 정도 산을 오르자 풀 한 포기 없는 삭막한 풍경이 펼쳐졌다. 척박한 땅의 기운은 트레커들을 두렵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제 슬슬 킬리만자로가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뽈레뽈레' 발걸음을 늦추었다. 


길을 가다 헬렌이란 미국인과 동행하게 됐다. 약관의 나이인 헬렌은 킬리만자로에서 유일하게 나보다 빨리 걷는 여자였다. 여길 오려고 매일 조깅으로 체력을 단련했다고 한다. 거침없는 발걸음이 정말 놀라운 수준이었다. 성격은 내가 만난 미국인 중에선 최고였다.



"잠보!"


헬렌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현지식 인사를 건네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힘이 남아도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국인 특유의 하이톤이 배어 있어 슬며시 날 웃게 만들었다. 하지만 헬렌의 동부 영어는 정말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런 나에게 헬렌은 계속 질문을 쏟아냈다.


헬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키보 산장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정상을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쉬어갈 장소였다. 키보 산장 뒤로 킬리만자로 정상이 우뚝 솟아 있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 킬리만자로 정상을 보면서 4시간 40분간의 산행을 마쳤다.



키보 산장에 들어서자마자 고산증으로 트레커 한 명이 급히 실려 가는 모습이 보였다. 본게임이 시작된 느낌이었다. 어느 곳보다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영화 속 느린 화면처럼 보였다.


트레커들은 최대한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정상에 도전할 시간을 기다렸다. 보통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6~7시간 정도 소요된다. 시간상으로는 부담이 없었지만, 문제는 4703m에서 5895m까지 1192m를 단번에 올라야 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 고산증을 겪는다. 가이드는 12인실 방으로 날 안내했다. 헬렌과 난 다른 트레커보다 조금 빨리 올라온 덕분에 좋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조용히 침대에 누워 체력을 비축했다. 자연스럽게 몸이 고산에 적응되길 기다리는 일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후 5시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침낭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모두들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산장 안에 머물고 있는 트레커들 모두 말이 없었다. 밤 11시. 따뜻한 침낭에서 몸을 빼냈다. 따뜻한 차와 쿠키로 요기를 한 뒤 미리 두통약 한 알을 삼켰다. 결전의 순간이었다. 어느 트레킹보다 각오는 비장했으나 등정에 대해서는 의문부호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


밤 12시 15분 가이드와 숙소를 나섰다. 가진 옷을 모두 껴입었지만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해발 4703m의 한기는 차디찼다. 정상 공략은 공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우회로는 없다. 키보 산장 뒤편으로 솟은 가파른 경사를 치고 올라야 한다. 미리 출발한 트레커들의 헤드 랜턴이 저 멀리 경사를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1192m를 올라야 했다. 해발 0m에서 출발하는 산행이라면 이런 긴장감은 필요가 없다. 다행히 키보 산장에 머물 동안 고산증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 두통이 찾아올지 몰랐다.


"뽈레뽈레."


출발은 순조로웠다. 어둠 속에선 대화도, 야경도 없었다. 천천히 땅을 보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게 다였다. 한 시간 뒤 밑을 내려다봤다. 희미한 헤드 랜턴 불빛이 길게 줄지어 조


금씩 산을 오르고 있었다. '저길 올라온 거구나. 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 정도 더 오르자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흠~~~슈으웃~ 흠~~~슈으웃~'


해발고도가 5000m를 넘자 약간만 호흡이 엉켜도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날숨과 들숨이 아니었다.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갈수록 호흡은 엉망이 됐다. 그리고는 두통이 찾아왔다. 키보 산장을 출발한 지 3시간 만이었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가파른 경사를 30분 정도 더 올랐을 때였다. 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속이 울렁이는 게 토할 것 같았다. 가이드는 내게 심호흡을 크게 하라고 했다. 다행히도 위장 속 음식물들이 솟구치려던 자세를 고쳐 잡으며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두통은 더욱 심해져 있었다. 두통약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느껴졌다. 작은 약통을 꺼내 파란색 알약을 삼켰다. 고산증에 효과가 있다는 '비아그라'였다. 비아그라를 복용하고 나자 두통의 강도가 조금은 약해졌다.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난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 가고 있었다.


끝도 안 보이는 검은 실루엣을 쫓아 한 시간쯤 더 산을 오르자 다시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누군가 날카로운 연필심으로 머릿속에 '포기'란 단어를 쉼 없이 써대고 있는 것 같았다. 5분도 못 가 다시 멈춰 섰다. 한 발을 떼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 날 집어삼킬 것 같은 검은 실루엣이 조금씩 끝자락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도니스는 조금만 가면 끝이 난다고 했다. 그가 이야기한 조금이 결코 조금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힘이 생겼다.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좀비처럼 천천히 오른 경사의 끝에는 길만스포인트(5681m)가 기다리고 있었다. 능선의 시작이었다.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런데 가이드는 여기서부터 정상까지 1시간 30분을 더 가야 한다고 했다.


"뭐!"


정상까지의 고도차는 214m였다. 도대체 능선이 얼마나 길다는 이야기인가. 사실 능선이 긴 게 아니라 고산증 탓에 속도를 낼 수 없는 게 문제였다. 조금만 속도를 올려도 머릿속에 들어간 갈고리가 작동을 시작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짓을 하는지 다 포기하고 싶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는 깨져나갈 것 같았다. 이때 내 옆으로 가이드의 부축을 받으며 중환자처럼 걸음을 옮기고 있는 나이 지긋한 서양인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잡념이 사라졌다.


오르락내리락 능선을 따라 1시간 남짓. 뇌는 쪼그라드는 듯했고, 얼음장 같은 바람은 더욱 매섭고 맹렬하게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극심한 추위였다. 손발의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눈꺼풀도 중력의 힘을 못 이기고 점점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저 멀리 '우후르피크(킬리만자로는 1889년 10월 5일 독일 지리학자인 한스 메이어, 오스트리아의 산악인 루드비히 푸르첼러 그리고 지역 가이드 요나스 로우에게 처음 정상을 허락했다. 이후 킬리만자로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는 독일 황제의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1961년 탄자니아가 독립을 쟁취한 후 킬리만자로 정상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스와힐리어로 우후르(Uhuru)는 자유를 뜻한다)'가 눈에 들어왔다. 키보 산장을 출발한 지 6시간 만이었다.



먼저 도착한 독일인들의 노래가 정상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곧이어 정상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갔다. 눈물이 날 것 같이 가슴이 벅차올랐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킬리만자로는 '불꽃' 같은 일출을 선물로 안겨주었다. 장엄한 모습이었다.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또 한 번 이전에 내가 아닌 날 만들었다.



여행정보

- 고산증에 걸리지 않으려면?
"고산에 안 가면 된다."

- 고산증을 치료하는 약은?
"하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한라산이다. 2000m가 채 되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 살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갑자기 3000~4000m 높이에 올라가게 되면 고산증이 오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세계 일주를 다니다 보면 한국 기준으로 말도 안 되는 높이에 마을이 있고 도시가 있다.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는 해발고도가 3000m를 넘는다.

자신의 한계를 테스트해보고자 킬리만자로 등정 등을 계획했다면 고산증 대비는 필수다. 고산증은 주로 두통에서 시작해 구토 등으로 이어지면서 몸이 무기력해진다. 심하면 폐부종이 오기도 한다. 이는 매우 위험한 단계다. 고산증을 완벽하게 치료해 주는 약은 현재 없다. 고도를 내리는 것이 완벽한 해결책이다.

일단 고산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아주 천천히 고도를 올려야 한다. 4박 5일짜리 일정으로 킬리만자로 등정에 도전한다면 4일째 1000m 이상 고도를 올려야 한다. 여기서 두통은 기본이고, 구토까지 경험하게 된다. 고산증이 심하면 마지막 캠프에서 정상을 오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짧은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는 셈이다. 아주 느린 스텝으로 움직여야 한다. 킬리만자로 산행에서 가이드는 '천천히'란 뜻의 "뽈레뽈레"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고산증은 희박한 산소 때문에 발생한다. 호흡법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깊게 들이마시고 빨리 내뱉는 의식적인 호흡이 필요하다. 그래도 두통이 생긴다면 이부프로펜(Ibuprofen) 계열의 두통약을 복용하는 게 효과적이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고산에서는 타이레놀보다 이부프로펜의 통증 완화 효과가 낫다고 한다.

또 고산에서 많이 쓰는 다이나막스(이뇨제)를 사용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이 약을 사용할 계획이라면 평소보다 물을 더 많이 마셔야 한다. 고산에서는 보통 하루에 4리터 이상의 물을 마시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준비하면 좋은 것이 비아그라다. 이 약은 혈관을 확장해 혈액순환을 도와 몸속의 산소공급을 원활하게 해준다고 알려져 있다. 킬리만자로 등반 시 복용했을 때는 두통이 개선되는 효과를 보긴 했지만, 약효가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비아그라는 산악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약이다. 정확하게 고산에서 어떤 효과들이 있는지 과학적으로 증명된 건 없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김동우 시민기자가 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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