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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1. 따뜻해지면 만나요

[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봄 이야기

by 오묘미 Apr 06.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지수는 출근길에 마스크를 벗었다. 마스크 필터를 뚫고 반가운 냄새가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겨울의 끝을 알리는 봄의 냄새였다. 지수는 마스크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환절기에 콜록대는 승객이 있어 마스크를 버린 것을 잠깐 후회됐지만, 어떻게든 문 쪽에 버티고 서서 새로 유입되는 공기를 마셨다.


  열차 문이 열리고 환승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탔다. 그때 익숙한 향수 냄새가 지수의 코끝을 스치고 열차 밖으로 사라졌다. 냄새의 정체를 파악할 틈도 없었다. 신체 기관을 한 바퀴 훑고 남은 잔향이 지수의 기억을 헤집어놨다. 무작위 단어들이 인터넷 팝업처럼 떠올랐다. 단어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서로 물고 늘어져 문장으로 이어졌고, 서로 뭉치고 흩어지며 이미지를 만들었다. 지수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핸드폰만 바라보는 승객들 속에서 지수의 시야는 선명했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띠리리리... 경고음과 함께 지수의 등 뒤로 열차 문이 닫혔다. 몸이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지수는 내려야 할 곳이 아닌 곳에서 하차했다. 열차는 떠나고 사람들은 하나의 물결이 되어 계단을 올라갔다. 한마디 말도 들리지 않고 터벅터벅 발소리만 들렸다. 지수는 머릿속에서 맴도는 수십 개의 이미지 중 하나에 초점을 맞췄다. 이미지 속에서 한 사람의 몽타주가 선명해져 갔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장소들이 수십 장의 슬라이드로 빠르게 넘어갔다. 어딘가로 흩어졌다 돌아온 향수 냄새가 또다시 지수의 코끝을 스쳐 계단 위로 향하는 인파의 물결 속으로 흘러갔다.


  지수는 크로스백을 뒤로 휙 돌려 매고 냄새를 쫓아 계단을 올랐다. 강한 맞바람 안에서 나는 다양한 냄새가 지수의 선명했던 이미지에 방해를 놓았다. 샴푸 냄새, 섬유유연제 냄새, 담배 냄새, 낯선 향수 냄새까지. 지수는 그 사이에서 자신의 기억을 헤집어놨던 그 향수 냄새만 집요하게 쫓았다.


  지수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파고들어 환승구를 지났다. 냄새는 지수의 속도와 인파의 흐름에 따라 앞서 갔다 머물렀다가를 반복했다. 평지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던 지수는 몇 계단을 남겨놓고 멈춰 섰다. 인파의 줄기는 혼잡한 환승 지옥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 군데군데에서 소용돌이쳤다. 먼 쪽 입구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냄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수는 길을 잃었다. 아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길을 찾으려 애쓰다 목적지를 잃은 기분이었다. 지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고개를 들어 되돌아갈 노선을 찾았다. 그때 지수의 코끝에 향수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지수는 인파 속에 섞인 한 남자의 뒷모습을 찾아냈다.


  굵게 펌한 머리에, 회색 목티, 검정 재킷에 크로스백을 멘 남자. 지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만 같았다. 복잡한 머릿속에서 후회의 먹구름이 커져갔다.


대체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쫓아왔지?


  남자는 몰려오는 환승 인파를 정면으로 돌파해 나갔다. 그 인파는 계단 위에 선 지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핸드폰만 보며 걷던 중년의 회사원이 지수의 어깨를 툭 치고 한껏 이상한 눈으로 노려본 뒤 지나갔다. 지수는 두려웠다. 냄새가 사라지기를 빌었다. 남자는 소용돌이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환상이었을까.


브런치 글 이미지 2


  지수는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출근 때마다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없으니 그제야 털컥 겁이 났다. 5분 10분 정도 지각했다고 회사에서 잘리지는 않겠지만,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출근하는 동료들을 맞이하던 루틴이 깨져버렸다는 공포감이 몰려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한가한 두려움인가. 고등학생 때 늦잠 자고 지각해 혼자 모래 운동장을 걸으며 맡았던 냄새가 떠올랐다. 급식소에서 음식 냄새가 났었다. 지수는 그 냄새가 싫었다. 식판의 철제 냄새도 싫었다. 그 냄새들을 맡으며 걸으면 마치 사육장으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지수는 자신이 밟아 작동한 멀지떨이 기계의 요란한 소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든 냄새가 사라졌다.


  회사 출입문에서 지문을 찍으며 변명거리를 떠올렸다. 지수는 양심에 반하는 행위는 딱 질색이었다. 항상 도착 예상 시간보다 일찍 나와 어떻게든 지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오늘은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대표님 방문이 열려있으면 인사를 먼저 해야겠지. 내 자리까지 걸어가려면 직원들 세 명은 지나쳐야 하는데 그 따가운 시선과 함께 ‘세상에 지수 씨가 지각을 다하네.’하는 미소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문을 열고 들어간 지수는 바닥에 찍힌 흙자국을 보고 좌절했다. 몇 걸음 걸어가 안쪽을 보니 대표 방의 불은 꺼져있었다. 막내 직원 한 명이 자기 자리에 앉아서 핸드크림을 바르며 지수를 보고 꾸벅 인사했다. 막내 직원은 숨이 차올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지수를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오늘 대표님 출장이라 다들 좀 늦나봐요.”


  지수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건너편에서 핸드크림 향기가 흘러왔다. 핸드크림의 솜사탕처럼 달콤한 향이 강렬했다. 지수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열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곧 나무의 이파리도 활짝 열릴 것이다. 나무에서 나는 냄새는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그럼 기억도 환기가 되겠지.


  하루 종일 일하면서도 그 향수 냄새가 잊히지 않았다. 냄새는 사라졌는데 기억은 왜 다시 떠오르는 것일까. 후각과 기억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정말 악랄한 조합이다. 이처럼 조잡하고 자잘한 업무에 열중하는 이유가 뭘까.


  지수는 창밖을 보고 커피를 마시며 공상에 빠졌다. 지수는 입술에 닿는 도자기 컵의 촉감을 좋아했다. 대학교 실습 시간에 처음 만든 도자기 컵이었다. 도자기 컵에는 동기들이 적어준 메시지와 지수가 직접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후로 몇 개의 도자기 컵을 만들었지만, 첫 작품이 가장 애착이 갔다. 대학에서 우연한 계기로 디자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면, 지금쯤 작은 도자기 공방을 차렸을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은 지수가 꿈꾸던 모습이 아니었다. 생계를 위한 적당한 돈이 필요했기에 그에 맞는 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모든 현대인의 비애가 아닐까. 어쨌든 디자인을 업으로 하게 된 경위를 따지자면 지하철에서 맡았던 그 냄새의 근원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밤이 되니 따뜻했던 낮과 달리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해가 길어져 오후 6시가 지났는데도 하늘이 밝았다. 지수는 모두가 퇴근한 뒤 업무를 마무리하고 가방을 들고일어나 사무실을 나왔다. 짙은 파란색의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퇴근하는 직장인들은 열차를 타러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지수도 무의식적으로 인파에 섞여 들어가려다 멈춰 섰다. 날씨가 아까웠다. 그러나 변명거리가 없었다. 지수는 옆길로 빠져나와 저번에 우연히 본 새로 생긴 베이글 가게를 검색했다.


  인적 드문 조용한 골목에 위치한 베이글 가게는 포장을 전문으로 하는지 아주 조그마했다. 어두워지는 주택 사이, 밝게 조명을 켠 작은 공간 안에서 앞치마를 둘러맨 젊은 사장이 분주히 움직였다. 베이글 냄새를 맡자 곧바로 지수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지수는 기다리는 손님 뒤로 서서 어깨너머로 한두 개씩 남은 베이글 중 어떤 걸 고를지 고민했다.


  공원은 산책 나온 젊은 가족, 데이트하는 연인, 보드를 타는 청소년들로 북적였다. 모두 지수와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아직 쌀쌀했지만, 다들 얇은 겉옷을 걸치고 행복한 표정으로 공원을 거닐었다. 나무에 걸린 둥근 조명들이 켜졌다. 베이글이 담긴 종이봉투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든 지수는 보드장과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주변에 베이글 냄새가 풍겨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봉투를 열자 기다렸다는 듯 후끈한 베이글 냄새가 지수의 얼굴로 달려들었다. 지수는 베이글을 꺼내 들어 한입 베어 물고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입안에서 베이글과 커피가 고루 혼합돼 목을 타고 넘어가 위장으로 향했다. 온몸에 포근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수는 보드 타는 청소년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남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보드 기술 연마에 열중했다. 그 와중에 까부는 남학생들은 바닥에 앉아 여학생들과 핸드폰으로 뭔가를 공유하며 낄낄대고 웃었다. 베이글을 오물대던 지수는 갑자기 허전함을 느껴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또 핸드폰을 꺼내 들어 단톡방을 훑어봤다. 꽤 밑까지 내려갔다. 작년 겨울에 동결된 고등학교 친구들 단톡방이 보였다. 지수는 그 방에 들어갔다. 마지막 카톡은 한 친구의 메시지로 끝났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따뜻해지면 만나자!'


  지수는 주저했지만 과감해지고 싶었다. 또 과감해지려다가도 엄지가 허공에서 혼자 까딱이기만 했다. 다시 핸드폰을 옆에 내려놨다. 베이글을 한입 물고 아메리카노로 적셨다. 아이들은 이제 바닥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하늘로 든 채 엄지만 까딱이는 놀이에 빠졌다.


  지수는 또다시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적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금방 삭제하려고 했지만,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버렸다. 지수는 남은 베이글을 종이 봉투에 포장하고 커피를 들고 일어났다.


'우리... 따뜻해졌으니까 만날래?'


  먼저 약속을 잡는 성격이 아닌 지수로서는 큰 용기였다. 그 과감함 속에는 변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 친구들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냄새가 품은 기억을. 그 냄새의 범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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