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 야광별

[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봄 이야기

by 오묘미

지수는 어두운 방 안에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봄 냄새가 들어왔다. 이 냄새는 단순히 신체를 훑고 지나간 정도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침투해 기억을 헤집어놨다. 도대체 이 냄새는 뭘까. 어떻게 배합해야 이런 냄새가 날까. 저 멀리서 도시의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어둠 속에 누워 있으면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야광별 하나가 천장에 붙어 빛을 내고 있었다. 지수는 자신이 붙인 기억도 없는 의문의 야광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5년 전 이 아파트로 이사 오며 전체 도배를 했었는데 저 야광별은 언제부터 저기에 붙어있었던 걸까. 누나의 물러터진 감각을 조롱하려고 꾸민 남동생의 장난일까. 아니면 하나뿐인 작은 방을 차지하기 위한 계략일까. 어둠 속에서 지수의 눈빛이 번뜩였다. 추리 소설 애독자인 지수의 두뇌가 빠르게 돌아갔다.


빛을 축적했던 야광별의 수명이 다해가는 듯 빛이 서서히 사라지자, 지수는 침대에서 내려와 후드집업을 꺼내 입고 MP3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잠가둔 방문을 천천히 열고 안방에서 드라마를 보는 가족 몰래 조용히 집을 나가려 했다. 지수가 방을 나와 고개를 돌려 안방을 보니 남동생이 문지방에 머리를 대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가게?” 남동생이 말했다.

옆에 누워 드라마를 보던 엄마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디 가? 오밤중에.”

“올 때 아이스크림 하나 사 와라.” 아빠의 목소리만 들렸다.

“나는 거북알.” 남동생이 장단을 맞췄다.


순간 지수의 얼굴이 짜증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이 집안은 한 사람이 말하면 꼭 다른 사람이 한술 더 뜬다. 누구 하나 비밀을 알게 되면 온 집안에 소문이 퍼진다. 비밀이란 없는 집안이다. 4인 가족에게는 턱없이 좁은 집에서 평생 부대끼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수는 지금 살고 있는 19평 아파트로 이사 와서야 처음으로 자신의 방을 갖게 됐다. 그전까지 하나뿐인 작은 방을 반 갈라 공유하던 남동생은 컴퓨터가 있는 거실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지수는 대답도 않고 신발을 신으며 장바구니를 챙겼다. 엄마는 다시 드라마로 시선을 돌렸지만, 남동생은 지수의 느릿한 준비 동작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 시선을 알고 있는 지수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끝까지 참았다. 아빠가 남동생을 발로 툭 차며 TV 소리 좀 키우라고 다그쳐서야 남동생은 안으로 들어갔다. 지수는 현관문을 나서며 직감했다. 남동생이 곧 사춘기에 접어들면 자신의 방을 내어줘야 할 것이 분명하다. 지수는 하루빨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 자취하고 싶었다. 온전히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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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가 사는 아파트는 이 계획도시가 생길 때부터 만들어졌으니, 연식이 꽤 오래된 아파트였다. 아파트가 지어지며 함께 뿌리내린 가로수의 두께도 만만치 않았는데, 날이 풀려 잎이 활짝 열리면 우중충했던 아파트도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지수는 아파트 사이사이에 조성된 가로수 길을 걷는 걸 좋아했다. 구획이 딱 떨어진 것보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힌 숲과 길을 사랑했다. 아파트는 곳곳의 페인트가 벗겨지고, 엘리베이터는 성인 세 사람만 타도 비좁았지만, 무엇보다도 애착이 많이 가는 아파트였다. 이 도시의 이곳저곳으로 이사 다녔지만, 지수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 아파트에서 10년을 넘게 살고 또 이번에 두 번째로 들어왔으니 쌓인 추억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아파트 건물로 둘러싸인 놀이터에는 사람 한 명 없이 썰렁했다. 각 세대에서 들리는 다양한 소리가 중심부에 울려 퍼졌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지수가 모래를 밟고 걸어가 뺑뺑이('회전무대'라는 놀이기구)에 올라탔다. 힘을 주지 않아도 혼자 천천히 돌아갔다. 지수는 뺑뺑이에 앉아 MP3를 틀었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아파트와 밤하늘을 바라봤다. 그래도 떠나야 한다면 언젠가는 이곳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지수!"


은혜가 2층 복도에서 지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참 뺑뺑이를 돌며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지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뺑뺑이가 멈추지 않고 도는 탓에 지수의 시야에 은혜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한 바퀴 돌고 속도가 조금 줄고 나서야 지수는 은혜를 볼 수 있었다. 지수가 다시 돌며 등을 보이자 은혜는 계단을 내려와 아파트 정문에서 나왔다. 뺑뺑이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자, 지수는 다가오는 은혜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아름이네 갈 건데 같이 갈래?" 은혜가 말했다.


지수는 이어폰을 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재생되는 음악을 끝까지 듣고 싶었다. 은혜는 지수의 행동이 대수롭지 않은 듯 뺑뺑이에 올라탔다. 속도가 느려지던 뺑뺑이가 다시 빨라졌다. 은혜는 지수에게 연락해도 받지 않아 직접 지수의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고 말했다. 아름이네 어머니가 운영하는 노래방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민지는 벌써 도착해 있다고 했다. 지수는 듣던 음악이 끝나자,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가자!"


지수와 은혜는 벚꽃이 만발한 조용한 밤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댔다. 지수와 은혜가 노래방에 도착하니 카운터에 앉아 있던 아름의 어머니가 두 사람을 알아봤다. 은혜는 아름의 어머니를 자주 봤던지 인사를 하고 두 친구가 들어간 방을 알려달라고 했다. 아름의 어머니가 알려준 호수로 은혜가 거침없이 걸었다. 지수는 은혜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양쪽으로 난 노래방 창문 안을 훔쳐봤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신나게 춤을 추고 노래 부르고 있었다.


지수와 은혜가 가장 끝방에 도착하자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아름과 민지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지수와 은혜가 방 안으로 들어온 줄도 모르고 아름과 민지는 노래에 열중했다. 은혜는 두 친구 사이에 껴서 후렴구를 함께 불렀다. 지수는 뒤로 물러나 낡은 가죽 소파에 앉았다. 오래된 가죽에서 온갖 것으로 찌든 꿉꿉한 냄새가 났다. 테이블에는 탄산음료와 과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세 친구가 노래를 부르며 지수를 사이에 두고 소파에 앉아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몸을 흔들었다. 민지는 목이 말랐던지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아름은 어머니 몰래 꺼내온 캔맥주를 따서 마시고는 상에 굴러다니는 오징어 땅콩 과자를 집어 먹었다.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지수는 그제야 아빠와 동생이 사다 달라고 했던 아이스크림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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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에 진눈깨비가 내리더니 이삼일 쌀쌀했다. 지구가 감기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오늘 오전부터 기온이 올라가더니 낮은 포근했다. 회사 건물 지하에 있는 한식 뷔페에서 매번 끼니를 해결하던 지수는 막내 직원의 유혹에 넘어가 조금 멀리까지 걸어가 점심을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막내 직원이 가고 싶다고 한 유명한 카페에 들렀다. 주택 골목 어딘가에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커피 향과 한낮의 따사로운 골목의 냄새가 뒤섞이니 취한 듯 황홀했다. 두 사람은 커피를 하나씩 들고 사무실에 들어가기 싫은 마음을 달래고자 가로수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막내 직원이 벚꽃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누군가에게 카톡을 보내며 즐거워하는 사이, 지수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지수의 기억으로는 그때 아이스크림을 사서 들어갔는데 가족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새벽 1시가 넘었다지만, 지수는 소름 끼치는 정적이 원망스럽고 서운해서 눈물을 흘렸다. 지수는 주방 식탁 앞에 앉아 어둠 속에서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자신의 작은 방 천장에 붙은 야광별이 빛나고 있었던 것이 기억나 닭살이 돋았다. 지수의 손에 들린 따뜻한 커피의 온도가 온몸에 빠르게 흡수돼 퍼졌다.

"야광별은 혼자 빛을 낼 수도 있는 종류의 것이었나?" 지수가 혼잣말을 흘리니 사진 보정 중인 막내 직원은 어떻게 들었는지 이 어이없는 질문에 대답했다. "혼자서는 힘들겠죠. 아무래도 오랫동안 아무도 모르게 빛을 바짝 축적해 놓고 때가 됐을 때 어둠 속에서 발광하는 거 아닐까요?"


은혜, 아름, 민지, 지수. 네 사람의 채팅방은 지난주부터 시끌벅적했다.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결혼한 두 친구의 육아와 결혼생활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가정이 있는 친구들을 배려해 그 친구들이 사는 쪽으로 약속 장소를 정하려고 했지만, 두 친구는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동시에 완강히 거부했다. 오랜만에 콧바람 좀 쐬고 싶다고 했다. 약속 장소는 두 친구가 동시에 오케이 한 대학가로 정했고, 약속 시간은 저녁 6시 30분이었다. 오늘, 한껏 축적된 기억들이 만발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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