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첫 수박

[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여름 이야기

by 오묘미

지방 소도시에서 혼자 사는 엄마의 집에 찾아간 지수는 심플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실내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온 가족이 함께 살았을 때는 식탁에 가득했던 영수증, 영양제 등이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었다. 지금 식탁에는 잡다한 물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직 책 한 권, 수첩과 볼펜, 꽃이 꽂힌 화병만 놓여있었다. 조심성 없는 식구들의 발소리 때문에 깔았던 카펫도 없었다. 강마루에 먼지나 머리카락 한 톨 보이지 않고 깨끗했다.


이웃에게 물려받았다는 3단 찻장에는 여러 나라를 관광하고 사 온 기념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세 명의 고등학교 동창들과 어깨동무하거나, 기념탑 앞에 둘러서서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꿈도 못 꿀 크기의 햇볕 드는 발코니에 다양한 화분이 자라고 있었다. 가로로 긴 넓은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침에 새가 와서 지저귀는 소릴 들으면 얼마나 평화로운지 몰라."


엄마는 식탁에 바윗덩이만 한 수박을 올려놓고 싹둑싹둑 자르며 말했다.


지수는 나름대로 소소하게 꾸미고 사는 엄마의 모습에 그동안의 염려와 걱정이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엄마의 그 말을 듣자 이상하게 사춘기 중학생처럼 삐뚤어지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도둑 들어오면 어쩌려고 창문을 저렇게 활짝 열어놨어!"


바람이 솔솔 통하는 넓은 창문에는 방범창이 없었다. 지수는 도둑이 배관을 타고 3층 높이까지 올라와 침입하는 상상을 해버렸다. 엄마는 지수의 말에 괜한 걱정이라며 훔쳐 갈 것도 없다고 말했다. 지수는 미간을 구기고는 "없긴 왜 없어!" 하고 투덜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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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향이 지수의 코끝을 맴돌았다. 지수는 빨갛게 익은 조각 수박을 두 손에 쥐었다. 수박은 어우러진 색깔만 봐도 시원함이 느껴진다. 초록색, 흰색, 빨간색, 소량의 검은색까지. 수박은 자연이 품은 가장 풍요로운 과일이 아닐까. 지수는 씨 없는 부분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을 꾹 다물어 오물오물 씹었다. 입술 사이로 수박즙이 흘렀다. 엄마는 그런 지수를 보며 칠칠찮다면서 두 손을 못 쓰는 지수를 대신해 티슈를 뽑아 입을 닦아줬다. 지수는 끝까지 수박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올해에 맛본 첫 수박은 정말 달았다.


씨를 흰색 접시에 툭툭 뱉어내던 엄마는 먹다 말고 일어나 반쪽짜리 수박 한 덩어리를 싱크대에서 서걱서걱 자르기 시작했다. "다 먹고 배 터지라고?" 지수가 말하자 엄마는 조각 수박 위에 비닐을 씌우고는 이웃집 할머니께 갖다 드릴 거라고 말했다.


벌써 주변 이웃들과 얼굴을 트셨구나. 지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어딜 가든 잘 어울리고 사랑받을 사람이다. 누구보다 선하고, 누구보다 남을 챙기고 배려한다. 엄마는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자식은 가끔 열불이 나는데도...


지수가 수박 끄트머리까지 앞니로 잘라먹을 때쯤, 엄마가 수박이 담긴 쟁반을 들고 일어났다. 지수도 다 먹은 수박 끄트머리를 내려놓고 엄마가 든 쟁반을 넘겨받았다.


지수는 엄마를 따라 아파트 계단을 내려와 출구로 나왔다. 거대한 은행나무 밑 원두막에서 할머니 세 분이 먼 논밭 쪽을 보고 앉아 아무 말 없이 부채질하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엄마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슬리퍼를 질질 끌며 뒤따라오는 지수를 보고는 한양에서 딸이 왔냐고 물으며, 엄마를 닮아서 피부가 곱다고 칭찬했다.


지수는 할머니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수박이 담긴 쟁반을 앞에 내려놓았다. 엄마는 할머니 손에 수박을 한 조각씩 쥐여드렸다. 모시 조끼를 입은 할머니는 작은 입으로 수박을 베어 먹고는 달고 시원하니 좋다고 말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센 할머니는 한쪽 손바닥을 고이 모아 씨를 퉤퉤 뱉어 모았다. 마지막 할머니는 작은 수박을 또 반으로 쪼개 먹으며, 어릴 적에 밭에서 수박서리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세 할머니 앞에 앉아 별다른 말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할머니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것일까. 엄마는 몸을 돌려 나무 그늘 밑에서 맴도는 바람을 쐤다. 지수는 조금 떨어져 앉아 뒤로 벌러덩 누웠다. 저 멀리 논밭에서 들려오는 농기계 소리 위로 수박 부서지는 소리가 음표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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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동네 개천을 따라가면 큰 시장이 나온다며 거기서 저녁거리를 사자고 지수를 끌고 갔다. 지수는 더위가 한껏 달아오른 시간대라 집안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싶어 저녁은 시켜 먹자고 했지만, 엄마는 딸이 오랜만에 왔는데 그럴 수 없다며 완강했다.


시장은 한산했다. 엄마는 골목골목 너무나 잘 아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목적지로 향했다. 더 좁은 골목에 들어가자 한 음식점 앞에 젊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지수의 눈에는 그 광경이 환상처럼 보였다. 문 앞에는 빛바랜 공중파 방송 출연 사진이, 내부 벽에는 연예인 사인들이 붙어 있었다. 엄마는 음식점 앞을 지나가며 남자 친구 생기면 꼭 와 보라며 이 동네 맛집이라고 소개했다.


엄마는 단골집에서 된장을 샀다. 지수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로 저녁 밥상을 차릴 생각이었다. 지수의 의중은 안중에도 없이 이미 정해진 메뉴였지만, 지수는 이의를 달 생각은 없었다. 엄마의 곁에서 저녁거리가 든 봉투를 달랑달랑 들고 걷던 지수는 언젠가 친구들과 여행 가서 들렀던 시장이 떠올랐다. 그때와는 기분이 사뭇 달랐다.


집으로 돌아가며 지수는 엄마에게 이 도시에 젊은 사람이 취업하기에 적당한 직장이 없을지 물었다. 엄마는 그럴 필요가 있냐며, 젊을 때는 더 복잡하고 바쁜 환경에 자신을 떨어뜨려 놓고 정신없이 살라고 말했다. 자신을 돌아볼 시간은 그 이후에도 충분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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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는 저녁을 먹고 거실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어두워진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해 에어컨을 켤 필요도 없었다. 지수는 설거지하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엄마는 그럼 여기서 평생 혼자 살 거야?"

"언제 혼자 산대?"


지수는 옆으로 누워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야... 애인이라도 생긴 거야?"

"왜? 그러면 안 돼?"


'엄마가 언제부터 이렇게 당돌해지셨을까.' 지수는 다시 방바닥에 몸을 굴려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둥근달 같이 튀어나온 조명 커버에 러브버그가 죽어 있었다.


"난, 환영이야."


설거지를 마친 엄마는 딸을 슬쩍 바라보더니,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화 안 된다며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장날에 산 새 이불을 깔았다.


지수는 엄마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가 이불에 누웠다. 이불의 부드러운 감촉이 온몸을 감쌌다. 세수하고 나온 엄마는 간이 화장대 앞에서 로션을 바르고, 얼굴에 광택을 뽐내며 지수의 옆에 앉았다. 엄마는 남동생이 일본에서 사다 준 파스를 꺼내더니 등에 붙여달라고 부탁했다. 지수가 일어나 앉아 엄마의 등에 파스를 붙였다. 엄마는 내일 몇 시 기차냐고 물었다. 지수는 내일 오전 8시 기차라고 말했다.


누워있으니 거실에서 들어오는 찬바람에 오히려 추웠다. 이렇게 추운 여름이 또 있을까. 엄마의 새근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성인이 되고 독립한 이후로 오랜만에 듣는 숨소리다. 지수는 홀로 살며 끊지 못했던 걱정들이 어느 정도 사라져 마음이 편안해졌다. 정말 오길 잘했어.


그런데 저렇게 창문을 활짝 열고 살면 괜찮을까. 어쩌면 엄마는 누군가 와서 모든 걸 훔쳐 가길 바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잃어갈수록 자유를 얻는 것일까.


과연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를 버텨낼 수 있을까. 그때가 언제일까. 지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