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오염

[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여름 이야기

by 오묘미

한낮의 끄트머리 모래 폭풍이 부는 고등학교 운동장에 긴장이 감돌았다. 같은 시간에 체육 시간이 겹친 고3 두 반이 반대항 축구 경기를 벌이기 직전이었다.


반팔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은 포지션에 맞는 각자의 자리에 서서 간단히 몸을 풀었다. 축구화를 신은 영한과 민구는 반 주장과 함께 어떻게 경기를 이끌어나갈지 작전을 짰다. 경기에 참여하지 않는 일부 남학생들은 벤치에 앉아 게임 얘기를 나눴다. 축구 경기 때문에 운동장에서 밀린 지수의 반은 농구 코트에서 자유투 연습을 했다.


젊은 남자 체육 선생의 지휘 아래 운동장 중앙에 모인 학생들이 인사하고 악수를 했다. 선수들이 각자 포지션으로 이동하자 남은 학생들은 하던 것을 멈추고 하나둘씩 운동장 끄트머리에 모여 앉아 싱겁게 응원을 시작했다. "시작!" 체육 선생의 허술한 신호와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같은 반인 지수와 은혜, 아름과 민지는 농구 코트 철조망 앞에 앉아 경기를 구경했다. 나뭇가지를 주워 모래를 끄적이던 민지는 축구하는 학생들 중에 아름이 짝사랑하는 남학생이 있다고 놀렸다. 아름은 자기가 아니라 민지가 좋아하는 애라며 떠넘겼다. 은혜는 평소답지 않게 둘을 끝까지 추궁했다. 아름과 민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 아이의 생김새를 장난스레 묘사했다. 지수는 주머니에 챙겨 온 영단어 수첩을 꺼내 단어를 외려고 했지만, 친구들의 이야기에 한쪽 귀가 쫑긋해 암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는 얼굴이 못생기고 키도 작아 오징어 땅콩이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했다. 줄여서 '오땅'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은혜와 지수의 각기 다른 기준에서 오땅을 찾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옆에서 아름과 민지가 키득대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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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은 여름 더위에 열화 된 새하얀 하늘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번갈아 날았다. 어느 쪽이 우위를 점했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했다. 그 속에 영한은 유독 기민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끌고 다녔다. 체육복 위에 걸친 펑퍼짐한 형광 조끼를 펄럭이며 민첩하게 공을 드리블하고 패스하고 슛을 날렸다. 골대 쪽으로 낮게 빨려 들어가던 공은 골문 앞에 서 있던 수비수의 정강이에 맞고 측면으로 빠져나갔다. 얼떨결에 위기를 모면한 학생은 친구들의 거친 칭찬을 받았다.


아름과 민지는 그 환상적인 순간을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지수는 두 사람을 힐끔 훔쳐봤지만, 대부분의 학생과 비슷한 반응을 보여 차이를 알아낼 수 없었다.


치열한 공방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흘러간 경기는 2:2 동점이 됐다. 그리고 때마침 수업 종료음이 울렸다. 학생들은 경기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구경하던 학생들은 어디론가 사라진 체육 선생을 찾다가 이내 교실로 향했다. 지수와 은혜도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며 교실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아름과 민지는 끝까지 보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곧 기지개를 켜며 창고에서 나온 체육 선생이 그만하고 교실로 들어가라고 힘없이 소리쳤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운동장을 돌던 공이 멈춰 섰다. 일부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신발주머니를 챙겨 들고 교실로 향했다. 영한과 민구는 아쉬운지 서로 볼을 툭툭 차 주고받았다. 각 반의 주장이 마주 서서 석식을 먹고 경기를 재개하자고 협의를 보고 나서야 학생들이 해산했다.


교실 천장에 달린 선풍기 밑에 모여든 남학생들은 손으로 체육복을 펄럭이며 선풍기를 따라 둥글게 회전했다. 세수하고 머리까지 감은 영한과 민구는 축구화를 사물함에 넣고, 곧장 교실을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같은 방향으로 걷는 학생들 무리에 섞인 민구가 영한에게 물었다.


“3학년 4반이더라. 네가 말한 애.”


영한이 대꾸가 없자, 민구는 몸으로 영한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못 봤어? 농구장에서 응원하던데.”

“난 못 봤는데.”

“미친, 그걸 못 보냐.”


식당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넓은 식당 내부는 밥 먹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음식 냄새와 쇳내가 영한의 코를 찔렀다. 영한은 무척 허기졌는데도 이 쇳내를 맡으면 꼭 입맛이 달아났다.


“야. 그냥 매점 갈래?”

“왜? 오늘 제육볶음 나와.”

“그럼 넌 먹어. 난 매점이나 갈란다.”

“뭐야, 같이 가!”


영한이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자 민구가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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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에서 내려가던 영한은 갑자기 3층에서 멈춰 복도를 걸었다. 뒤따라오던 민구가 어디 가냐고 물었다. 복도 중간쯤에 도달하자 3학년 4반 앞에 도착해 있었다. 민구도 눈치챘는지 영한의 옆으로 바짝 붙어 교실 안을 바라봤다. 급식시간이라 학생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아직 식당에 가지 않은 학생 몇 명이 남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몇 명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까치발을 들고 창문 안을 들여다보던 영한은 눈에 선명히 들어올 그녀를 찾지 못했다. 민구도 까치발을 들고 안을 들여다봤다.


그때 교탁 앞에서 여학생들과 웃고 떠드는 상태를 발견한 민구가 문을 벌컥 열고 호기롭게 들어갔다. 민구가 상태에게 가 반갑게 인사했다. 옆에 있던 여학생들이 누구냐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상태는 같은 중학교에서 잠깐 축구부에 함께 있었다며 민구를 소개했다. 저녁에 축구할 때 나오라고 했지만, 상태는 다리를 크게 다쳐 축구를 완전히 그만뒀다고 말했다.


영한은 어딜 가도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는 저 싹싹함이 부러웠다.


영한은 혼자 복도를 설렁설렁 걸었다. 교실에서 나온 민구가 영한을 쫓아왔다. 민구는 분명 저 반이 맞다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듣고 영한은 그 친구 얘기를 꺼냈냐고 물었다. 민구는 그렇다고 말하며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둥의 말은 하지 않았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영한은 펄쩍 뛰며 그걸 왜 물어보냐고 다그쳤다. 어이없는 민구는 영한의 그런 소극적인 태도는 버리라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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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자 야자를 빼고 일찍 학원에 가거나 예체능 대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가방을 쌌다. 창가 자리에 앉은 지수는 이어폰을 끼고 MP3로 음악을 들으며 하교하는 친구들을 부럽게 쳐다봤다.


아름과 민지가 소란스럽게 떠들며 지수 옆 창틀에 걸터앉아 운동장을 쳐다봤다. 저녁 6시, 노을이 지는 운동장은 꼭 축제로 북적이는 마을처럼 보였다. 30도가 넘는 폭염에도 운동장에는 축구하는 남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운동장에 여러 개의 경기가 진행됐는데 어느 순간 한 경기 안에 공이 두 개가 도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의 모습은 승부를 이유 삼아 넘치는 체력을 증발시켜 신체를 기화해 이곳의 담벼락을 넘어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것만 같았다.


<월리를 찾아라>나 다름없는 운동장 안에서 아름이 누군가를 찾아낸 듯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민지와 지수도 그 방향을 따라 쳐다봤다.


"오땅! 쟤가 오땅이야. 찾았어?"


비밀을 품은 쑥스러운 마음은 끓어오르는 주전자 같다. 어떨 때는 속에서 끓어올라도 뚜껑만 들썩일 뿐이지만, 어떤 순간에는 증기를 뿜어내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 이목을 주목시킨다.


지수는 학생들을 넘어 저 멀리 보이는 공업단지를 바라봤다. 저쪽에서 흘러오는 바람에 화학 물질 냄새가 섞여 온다. 그 냄새에 감염된 좀비처럼 학생들은 무한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격렬히 움직인다. 이 학교와 이 지역을 졸업하면 이런 냄새조차도 그리워지게 될까.


모두가 각자 개인의 모습을 기억하겠지만, 이 냄새에 오염된 우리들은 어쩌면 하나의 감각을 공유하며 특정하고 일관된 것으로 변형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은 우리들은 세상에 맞춰지는 중이지 않을까. 먹구름이 몰려온다. 이 뜨거운 열기를 일순간 식혀주기를 바라며.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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