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비 오는 날 맥도날드에서

[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여름 이야기

by 오묘미

어둠이 짙어오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장맛비가 쏟아졌다. 지수의 귓가에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우산을 챙겨가라던 엄마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엄마가 현관문 앞에 둔 우산을 봤는데도 지수는 무슨 심보인지 챙기지 않았다. 아파트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지수는 늦잠 자는 남동생이 챙겨가겠지 하고 생각했다.


야자가 끝나자 지수는 우산 쓴 친구의 곁에 바짝 붙어 정문 앞까지만 같이 쓰자며 졸랐다. 다행히 학원차가 도착해 있었다. 친구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헤어진 후 차에 올라탔다. 차 안은 에어컨이 빵빵했다. 운전석에 앉은 기사가 라디오로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듣고 있었다.


지수도 맨 뒷자리에 앉아 해설진의 중계 소리를 들었다. 우리나라가 골을 넣어도 기사는 반응 없이 창틀에 팔을 걸치고 빗물이 흐르는 앞 유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미처 비를 피하지 못해 젖은 옷과 머리카락이 에어컨 바람에 금방 말랐다. 오늘 학원차에 타는 학생은 지수뿐이었다. 매일 정각에 출발하던 기사는 평소보다 3분 정도 늦게 출발했다.



하늘이 뻥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축구 해설진의 목소리는 더욱 고조되어 갔다. 모두 축구를 보려고 집 안에 머무르는 것인지 길거리는 한산했다. 고등학교를 경유해도 아무도 차에 타지 않았다. 경기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 학원 상가 앞에 멈춰 섰다. 2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지수가 묵직한 차 문을 열고 교복 상의를 우산 대용으로 쓰려고 준비하자, 오는 동안 한마디 없던 기사가 우산을 건네며, 누군가 놓고 내렸는데 찾아가질 않으니 쓰고 가라고 했다. 지수는 우산을 받아 들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후 내렸다.


항상 말이 없어서 무서워 보였던 기사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인자했다. 지수는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펼치고 문을 닫았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마치 비료 포대에 곡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풍요로웠다.


아까부터 지수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석식으로 좋아하지 않는 메뉴가 나와서 조금만 먹었기 때문이었다. 학원 건너편에 있는 맥도날드의 노란색 간판이 유화처럼 빗물에 선명히 번졌다. 맥도날드 매장은 2층까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갑자기 햄버거가 먹고 싶어진 지수는 맥도날드 매장으로 들어갔다.



매장 내부도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덥고 습한 외부에서 실내로 들어오니 지수의 블루라이트 차단용 안경에 습기가 찼다. 카운터 앞에 선 지수는 안경을 벗어 안경집에 넣고 메뉴를 살펴봤다. 주방에서 간헐적인 둔탁한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어딘가에서 축구 중계를 마무리하는 해설진의 목소리와 붉은 악마의 함성이 들렸다.


지수는 햄버거를 골라 주문대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 폴더폰으로 DMB를 보던 남자 직원이 기계처럼 일어나 주문대 앞에 섰다. “주문하시겠어요?” 그를 보는 순간 지수의 심장이 어두운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진 것만 같았다. 직원의 한쪽 가슴에 찬 귀여운 명찰에 ‘오영한’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지수는 조금 전까지 확실히 골랐던 메뉴를 말하지 못하고 어버버대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초점 없는 눈으로 메뉴를 훑어봤다.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영한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앞에 선 여학생을 바라봤다. 영한의 머릿속에 스쳐가는 이미지와 소리를 정리할 틈도 없이 지수가 메뉴를 읊었다. 영한은 기계적으로 주문을 받았고, 지수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넓은 2층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없을까. 지수는 창가 자리에 앉아 버려진 티슈로 테이블을 구석구석 박박 닦았다. 유리창에 물줄기가 여러 갈래로 흘렀다. 도시가 빗물에 물들어 검고 푸르게 번졌다. 잠깐 멎었던 비가 다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꼭 탈곡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쌀 알갱이가 포대에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어렸을 때 시골 할머니 댁에서 아빠를 따라 농사일을 돕던 때가 떠올랐다. 농번기 시골의 생활은 날씨에 크게 좌우된다. 뙤약볕에서 농사일을 하던 지수는 너무 힘들어 맑은 하늘에 대고 제발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다. 그래야 할머니가 지수는 비 맞으면 머리 빠진다며 집으로 들어가서 숙제나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서 황급히 빠져나온 지수는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펴봤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홀딱 젖은 머리는 제멋대로 뭉쳐있었다. 이게 뭐람... 빗을 꺼내 머리를 정돈하고 색 진한 틴트를 손가락에 묻힌 뒤 입술에 발랐다. 에어컨 찬바람에 지수의 팔에 닭살이 돋았다.


그때 저 멀리서 계단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지수가 돌아보자 영한이 햄버거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배가 고픈 걸 너무 티 냈나. 너무 많이 시켜서 무겁지나 않을까. 지수의 걱정과 달리 영한은 콜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능숙하게 들고 와 지수 앞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지수가 인사하자, 영한은 말없이 뒤돌아섰다. 가는 걸까...


영한이 다시 뒤돌아 지수를 바라봤다.


“혹시 체육 시간에 있지 않았어? 학교 운동장에.”


영한은 일주일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말했다. 아니, 그때의 기억을 동결시켜 놓은 것만 같았다. 어제의 지수도 그제의 지수도, 3일 전의 지수도, 4일 전의 지수도. 되새김질된 영한의 기억 속에서 더욱 견고하게 뭉쳐졌다. 너무 자주 오래 떠올렸던 것일까. 영한의 기억 속에 지수의 인상은 하나에서 열까지 변함없이 선명했고, 상상력이 침투해 변질될 일도 없었다.


지수가 멀뚱히 쳐다보자, 영한은 먼저 물어야 할 것을 알아차렸다.


“혹시 00고 아니야? 3학년 4반. ”

“응. 맞아.”

“아, 그렇구나...”


영한은 더 말을 잇지 못한 채 뒤돌아 1층으로 내려갔다.


지수는 갑자기 더워져 손으로 부채질했다. 얼굴이 상기돼 발갛게 달아올랐다. 햄버거를 입에 넣고 우물대며 에어컨이 너무 약한 게 아닌지 주위를 둘러봤다. 또다시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두 명의 남학생이 팥빙수 하나를 들고 왔다. 이제 지수는 어떻게 나갈지가 문제였다. 인사를 하고 나가야 하나? 아니면 주문받아 정신없을 때 몰래 빠져나가야 하나. 그런데 아무래도 손님이 더 늘 거 같진 않다. 에어컨 옆에 뒷문이 보였다.


저쪽으로 도망치면 되겠다.


지수는 좋아하는 마음 앞에서 도망칠 생각만 했다. 자신의 존재를 자꾸만 숨기려고 했다. 어쩌면 자신을 부정하고 가족을 부정했던 마음도 이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사랑이라는 감정을 부정하는 마음에서부터 말이다. 사랑이 먼저일까 부정이 먼저일까. 부정이 있어야만 사랑이 있는 걸까. 부정은 사랑의 충족 요소인 걸까.


도망치기로 마음먹어버린 지수는 시계를 확인했다. 학원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햄버거를 반쯤 남겨 포장지로 둥글게 감싸 가방에 챙겨 넣었다. 가방을 품에 안은 지수는 종종걸음으로 완전 반대편에 있는 뒷문까지 빠르게 걸었다. 팥빙수를 먹던 두 남학생이 매장을 가로지르는 지수를 슬쩍 쳐다보면서 수다를 계속 나눴다.


지수는 유령처럼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갑자기 습도가 올라갔다. 열기에 푹푹 쪘다. 낡은 상가 계단을 내려가 출구로 나왔다. 아차, 우산을 놓고 나온 지수는 다시 찾으러 갈지 잠시 고민했다가 어차피 내 것도 아닌 것, 필요한 누군가가 쓰겠지 하고 교복 상의를 머리에 쓰고 학원 건물로 뛰었다.



영한은 화장실에 갔던 동료가 돌아오자, 청소하러 2층으로 올라갔다. 창가 자리는 비어 있었다. 두 학생만 게임 이야기를 열띠게 나누고 있었다. 창가 자리에 가니 테이블에 뭐 하나 떨어져 있지 않고 깨끗했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괜히 행주로 테이블을 쓱 닦고 돌아서려던 영한은 의자에 놓인 우산을 발견했다. 여학생이 쓰고 다닐 법하진 않아 보여 잠시 머뭇거렸던 것도 잠시, 영한은 우산을 들고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출구 앞에 선 영한은 주위를 둘러봤다.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비가 소강상태여서 행인들은 우산을 쓰지 않았다.


알바를 끝내고 새벽에 가까운 시간, 영한이 우산을 들고 출구를 나왔다. 학원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학원차에 올라탔다. 영한은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전등 하나만 켜두고 빨래를 접고 있던 엄마는 들어오는 영한의 손에 들린 우산을 보고 언제 우산을 챙겼냐고 물었다. 영한은 매장에서 주웠다고 말했다. 방으로 들어간 영한은 가방을 풀고 의자에 앉아 선풍기를 틀었다. 자꾸만 지수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가까이서 정면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영한의 기억 속에 지수의 새로운 이미지가 추가됐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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