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 이불 위 떠가는 배

[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여름 이야기

by 오묘미

퇴근한 지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에어컨을 틀었다. 샤워를 하고 저번에 엄마가 보내준 반찬으로 밥상을 차려 밥을 먹었다. 그릇을 깨끗이 설거지하고 세탁한 빨래를 널고 매트리스 위에 앉았다. 원룸 생활은 답답하고 꾸밀 여지도 적어 썩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이 집에서 살아오며 그나마 만족하는 것은 층간 소음이 적다는 것이었다. 그간 살았던 집을 통틀어 이렇게 소음이 적은 집은 처음이었다. 지수는 독립해 처음 입주한 집에서 소음 때문에 신경안정제까지 처방받았었던 적이 있던지라 이 집의 정적은 사뭇 낯설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 원룸에서 산 지 2년쯤 되어가니, 그 낯섦은 지수에게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방안에 존재하는 자신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를 무념무상 참아내고 집으로 돌아와 차가운 에어컨 속에 몸을 식히면 꼭 그렇게 느껴졌던 것이다. 밤에 불을 끄고 누워 있으면, 밖에 사람이 있기나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어쩔 때는 옆집을 노크해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미는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다.


골치 아픈 일 없어 반복적인 회사 업무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이불 위에 앉아 있으면, 직장 동료들의 얼굴이 한 명 한 명 떠올랐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동료들은 꼭 실재하지 않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엄마, 남동생, 친구들, 과거의 일들까지도 의문의 손길이 뻗쳤다. 온 세상이 나를 속이기 위해 연기를 하는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한순간에 현실의 낯선 기운에 휩싸인 것이었다.


지수는 어릴 때도 종종 이런 기분에 푹 빠졌다. 집으로 놀러 온 친구와 이불 위에 앉아 혼자했던 상상을 나눴다.


"여기 이불 밖은 끝없는 바다야. 물은 정말 차가워. 온통 어두컴컴하지만, 하늘에 뜬 달빛 때문에 불이라도 켠 것처럼 밝아."


배는 잔잔한 바다 위에 떠서 목적지 없이 서서히 흐른다. 기울어지지 않게 조심 조심 끄트머리로 기어가 바닷속을 들여다보면, 촉수로 빛을 내며 헤엄치는 심해어가 보인다.


어린 지수는 불을 끄고 친구와 이불 위에 누워 천장에 붙은 반짝이는 야광별을 바라봤다. 아찔한 아늑함에 허벅지까지 찌릿해서 머리털 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지수는 친구와 누워 발을 동동 구르며 꺄- 하고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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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혼자 원룸 안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발을 동동 구르던 지수는 더욱 깊고 어두운 무의식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러한 행동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지수에게 독립과 자립은 벼랑 끝에 등 떠밀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 날. 고3이었던 지수가 전단지 알바로 번 돈으로 준비한 패밀리레스토랑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엄마는 이제 아빠와 따로 살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선언에는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지수와 남동생 수호는 그 선언에 온전히 따라야만 했다. 지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빠는 짐을 빼 시골 할머니댁으로 들어갔고, 지수는 한동안 엄마와 함께 살다가 서울 이모네에 얹혀살았다. 그 집에서 대학을 다니고 20대 중반에 취직한 직장 인근 원룸에서 첫 독립살이를 시작했다.


부모님은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로 진실을 말하길 피했다. 사건에서 파생된 감정을 번잡하게 치부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 선언에 의해 모든 일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지수에게 외면과 회피의 성질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인생의 중요한 선택과 고비의 순간마다 그 성향은 크게 영향을 끼쳤다.


밤마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나마 시간 날 때마다 도서관에서 읽었던 쉽게 풀이된 심리학 책들은 지수의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줬다. 불명확했던 과거의 행동과 감정을 심리학 용어로 정의하니 문제의 해답을 찾아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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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는 자신을 정의하기로는 끝을 보려고 하지 않는 회피형 인간으로 봤다. 자주 꿨던 똑같은 악몽도 이러한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악몽 속에서 지수는 학교를 가려고 아파트를 나오던 길에 누군가 투신자살했다는 속삭임을 듣게 된다. 지수는 끔찍한 장면을 마주치게 될 것이 두려워 멀찍이 떨어진 아파트 뒷문으로 빠져나온다. 실체를 확인하고 싶지 않은 몸부림. 상처받고 싶지 않은 연약한 마음의 속살. 진실을 알게 돼 상처받는 날 외면하려는 나 자신을 혐오했기 때문이 아닐까.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으려면, 투신자살한 시체가 있는 정문으로 나가야 한다. 꽃 핀 정원에 떨어져 으스러진 두개골과 흘러나오는 뇌수와 피 웅덩이를 두 눈으로 직시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똑바로 뜨고 정확히 또 샅샅이 봐야 한다. 실체와 마주해야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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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는 천장을 보고 누워 쭉 뻗은 다리를 살짝 꼬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나저나 얘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한참 외줄을 타다 하늘에 뜬 별을 바라보며 딴생각에 빠져든 것처럼 문득 친구들이 떠올랐다.


초봄에 잠깐 만나 급하게 헤어져버렸던 게 아쉬웠다. 은혜는 무슨 고민에 빠져있을까. 혹시 나처럼 어떤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때 은혜는 택시 안에서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난 기억을 믿지 않아. 과거에 대한 추억도, 사람을 떠올리는 향수도, 잊어버려 놓고 또 찾아내려는 물건들도. 기억은 삶을 날조하는 암초야. 기억에 걸려버리면 인간은 침몰하게 돼 있어. 그게 어느 지점인지 어느 때인지 아무도 알 수 없어. 본인조차도 말이야."


갑자기 방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옆에 놓인 핸드폰 액정에 불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도착한 카톡을 보니 은혜였다. 내일 점심에 만나 삼계탕을 먹자는 얘기였다. 지수는 문득 떠오른 생각이 현실에 반영되자 무서웠다. 좋다고 답장하고 약속 장소를 잡았다.


이럴 때마다 우연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닫는다. 아무렇게나 뜬 별들을 선으로 이어 별자리를 만들고 신화를 만든 것처럼. 나와 가족, 나와 은혜와 친구들, 회사 사람들, 영한과 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개별로 정처 없이 흘러가는 존재들에 선을 이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관계가 아닐까. 그것들이 이어져 삶과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닐까.



<사진출처> 표지:핀터레스트, 사진 1: 라이프 오브 파이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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