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여름 이야기
점심시간에 맞춰 사무실을 나온 지수는 빌딩 숲을 벗어나 오래된 상가가 밀집한 곳으로 향했다. 매미 소리만 요란하게 울던 거리는 음식점을 찾는 회사원들로 북적였다. 맛집으로 소문난 음식점 앞에는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은혜와 만나기로 약속한 삼계탕집도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기에 웨이팅이 길까 걱정 됐다.
뙤약볕에 양산을 쓰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니, 몇십 년 전통의 삼계탕집 간판이 보였다. 다행히 웨이팅 하는 사람은 일행으로 보이는 두 명뿐이었다. 그 뒤로 가서 줄을 선 지수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지수를 안으로 안내했다.
손님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삼계탕을 먹고 있었다. 운 좋게 에어컨 밑에 앉은 지수는 은혜에게 식당 안으로 들어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금방 은혜가 들어왔다. 은혜는 지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둘은 삼계탕을 주문하고 옆자리에 앉은 대학생들의 테이블에 놓인 동동주를 한참 뚫어지게 쳐다봤다. 찬물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결국 입가심만 할 생각으로 동동주를 한 잔씩 시켰다.
둘은 그간의 안부를 나눴다. 지수는 최근에 엄마가 사는 집의 고즈넉한 시골 분위기를 묘사하며, 다 때려치우고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고 싶다는 직장인들의 익숙한 패턴의 애환을 꺼냈다. 은혜는 현실적으로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릇에 담긴 적나라한 모습의 삼계탕이 두 사람의 앞에 나왔다. 지수의 머릿속에 닭이 마당을 뛰어다니는 모습과 닭장 안에서 알을 낳는 모습이 떠올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은혜는 본인도 그런 생각을 가끔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비건으로 살아갈까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수는 인삼을 씹으며 그래도 요즘 더위에 체력이 너무 딸려 먹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동동주로 건배한 뒤, 은혜는 오늘은 더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악몽으로 잠을 설쳤다고 운을 뗐다. 지수는 원룸이 너무 조용해 이상한 잡생각 때문에 잠을 잘 자지 못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은혜의 반복되는 악몽에는 비견할 게 못 되는 듯했다. 은혜는 살점을 바르고 밥을 국물에 말며,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다는 악몽을 꺼냈다.
지수와 고등학교 동창인 은혜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마치 그때로 돌아간 당사자처럼 이야기했다.
"사실 다른 반에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었어. 걔도 날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랑 학원도 같이 다니고 그랬어. 걔도 걔 나름대로 고민을 안고 있었나 봐. 뭐, 다 똑같지. 성적이라던가 꿈에 대한 부모님의 반대라던가. 걔는 공부도 꽤 하는 편이었지만, 확실한 꿈이 없다 보니까 부모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어.“
“어느 날은 스트레스가 많았던지 나한테 가출하고 싶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어. 난 끝까지 말렸지. 여름방학 동안 연락이 끊겼었는데, 방학이 끝나고도 학교에서 보이지 않는 거야. 그 친구 반에 찾아가 복도에서 기웃거리며 물어봤는데, 집안 사정 때문이라는 말밖에 못 들었어. 그리고 3일이 훌쩍 지나고 난 뒤에 말이야..."
은혜는 앙상한 뼈를 뼈통에 담았다. 땅그랑! 지수는 남은 동동주를 한 모금에 비웠다.
"수업을 듣는데 창가 자리에 앉은 애들이 갑자기 수군대면서 창밖을 보길래, 나도 뒤로 가서 내다봤어. 운동장에 운구 버스가 서 있었어. 검은 상복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버스에서 내리는데 꼭 저승사자 같았어. 사람들은 액자를 든 학생을 앞세우고 일렬로 섰어. 너무 멀어서 검은 띠가 둘러진 영정사진에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어 그때까지는."
"교실마다 교감 선생님 목소리가 방송으로 나왔어. 3학년 강민구 학생이 유명을 달리했으니, 모두 명복을 빌어주자고."
운구 행렬은 학생이 평소 자주 지나다니던 장소를 걸었다. 운동장, 체육관, 야외 매점, 중앙 계단, 차가운 복도까지. 지수는 은혜를 따라 교실을 뛰쳐나와 복도를 달렸다. 한 교실 앞에 운구 행렬이 도착해 있었다. 유족들은 제자리에 서서 교감 선생의 안내를 받고 있었다.
지수는 맨 앞에서 민구의 영정사진을 품에 안은 교복 차림의 영한을 봤다. 지수의 눈앞이 아득해져 몸이 휘청였고 은혜의 팔을 잡고 의지했다. 은혜는 입을 막고 울음을 참고 있었다. 교감 선생의 안내에 따라 영정사진을 든 영한과 일부 유족들이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에 남은 남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교감 선생이 강민구 학생이 좋아했던 교실이라고 말하자, 뒤에 부축받고 서 있던 민구의 어머니가 마른 울음을 터뜨렸다. 교실 한쪽에서 훌쩍대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와 은혜는 복도 쪽 창문에 바짝 붙어 안을 들여다봤다. 영한은 입술을 꾹 깨물고 꽃이 놓인 민구의 빈자리 앞에 섰다. 교감 선생은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갖겠다고 말했다. 묵념 신호에 맞춰 모두 고개를 숙였다. 창틀을 붙잡고 선 은혜와 지수도 고개를 숙였다. 은혜의 질끈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눈물이 주룩 뺨을 타고 흘렀다.
그날 점심으로 삼계탕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같은 반 학생들은 삼계탕과 수박을 잔뜩 담은 식판을 민구가 자주 앉던 햇빛 잘 드는 자리에 꽃과 함께 놓아줬다. 교정에 인삼의 쌉쌀한 향이 퍼졌다.
날마다 축구하는 학생들로 가득 찼던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축구하겠다는 학생이 몇 있었지만, 각 반 담임은 그들을 타이르며 학교가 소란스럽지 않도록 통제했다.
지수와 은혜는 화단에 핀 꽃을 꺾어 색지로 포장했다. 각 반에서 모은 롤링페이퍼에 메시지를 쓰고, 민구의 반으로 향했다. 지수와 은혜는 민구의 자리 앞에 섰다. 활짝 핀 꽃과 과자, 자주 신던 축구화와 유명 축구 선수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이 책상 위 물건들을 흔들었고, 그것들은 잠시 숨을 쉬는 듯 떨렸다.
은혜가 꽃다발을 책상 한쪽에 내려놓고 지수와 함께 기도했다. '좋은 곳에 가서 행복해야 해.' 은혜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카페로 이동해 악몽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 은혜는 깨고 보니 자신의 베개가 눈물로 젖어 있었다고 말했다. 지수도 슬픈 꿈을 꾸면 그런다고 말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지수는 은혜와 들췄던 그 악몽을 상기했다. 그건 꿈이 아니었다. 고3 여름방학이 끝나고 일어난 현실이었다.
은혜가 좋아했던 민구의 죽음은 세상이 무너질 듯한 큰 충격이었다. 은혜는 한동안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자퇴하려고도 했고, 외국에서 사업하는 부모를 따라 해외로 떠나려는 생각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한 달쯤 지나 은혜는 더 차분해진 모습으로 돌아왔고, 지수와 친구들의 걱정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꾸했다.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워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망각이라는 것이 그 일을 대신하긴 하지만, 선택적 망각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망각은 참 눈치 없는 일꾼처럼 보인다. 이 눈치 없는 망각을 보완할 방법이 있다. 잊고 싶은 과거의 기억 위에 상상을 덧칠해 원형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원형이 달라 보일지라고 그 냄새와 감촉은 완벽히 씻어낼 수 없다. 시간이 돌고 돌듯, 사계절이 반복되듯. 잊혔는가 하면 다시 찾아와 밤잠을 설치게 하는 이 악몽 같은 기억은 자신과의 사투 그 자체이다. 언제쯤 악몽과의 완전한 작별을 고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