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 방명록

[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여름 이야기

by 오묘미

새벽부터 열이 오르고 어지러워진 지수는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잡고 토했다. 어제 저녁에 먹은 음식을 모두 게워낸 지수는 변기를 내리고 눈물을 짜냈다.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부엌 서랍에서 해열제를 꺼내 두 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똬리 튼 뱀처럼 꼬인 이불에 몸을 대충 눕혔다. 토하고 나니 명치에서 응어리졌던 것이 빠져나간 것만 같아 조금은 편안했지만, 열은 내리지 않았다. 벌써 겨울이라도 온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어젯밤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아 어떻게든 퇴근까지 버텨냈는데, 아니나 다를까 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지수는 밤새도록 배를 잡고 끙끙댔고,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2시였다. 출근 전까지 살아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깨끗이 회복될 걸 알면서도, 이렇게 아플 때면 꼭 큰 병에 걸린 것만 같다. 이보다 더 아픈 이들은 어떻게 버티는 것일까.



블라인드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지수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온몸에 둘둘 만 이불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머리카락이 이마에 아무렇게나 달라붙어 있었다. 땀을 잔뜩 흘려서 그런지 열이 현저히 가라앉은 것 같았다. 속은 허했지만 오히려 편했다. 시간을 보니 오전 7시 40분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벌써 나갈 채비를 끝내야 했을 시간. 출근을 포기하고 대표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핸드폰을 머리맡에 던져두고 잠시 뒤 대표에게 푹 쉬고 몸조리 잘하라는 답장을 받았다. 지수는 그제야 제대로 몸을 뉘었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아픈 건 딱 질색이다. 아무리 희망찬 미래가 눈앞에 있다고 해도, 감기 하나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무너져 내린다. 그럴 때면 몸보다 정신이 먼저 무너졌는데, 죽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까지 나아갔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해열제가 드디어 효과를 내는지 온몸 구석구석이 심장박동에 맞춰 두근댔다. 낮에 병원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민구 미니홈피의 작은 방에는 축구 유니폼을 입은 캐릭터가 서 있었다. 방명록에는 세상을 떠난 민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들이 쌓여있었다. 특수문자를 조합해 만든 화환도 있었다.


지수는 어두운 거실, 컴퓨터 앞에 앉아 방명록을 읽었다. 홀로 선 민구의 캐릭터가 쓸쓸해 보이는가 하면,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슬픔에 잠긴 글, 일찍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는 글, 신에게 억울함을 표하는 글까지. 지수는 글을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 명치에 끓는 쇳물을 떨어뜨린 듯 마음이 무겁고 뜨거웠다. 지수가 앉은 의자 뒤에서 자는 남동생 수호가 뒤척였다. 지수는 얼른 눈물을 닦고 종이에 적어 온 글을 방명록에 옮겼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영한은 이마에 팔을 대고 빈 천장만 바라봤다. 천장을 봐도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흙과 모래와 파도, 차가운 땅과 진흙, 신체를 파먹는 벌레가 우글댔다. 이어폰에서 나오는 우울한 가사의 노래를 락으로 바꿨다. 눈을 부릅뜨고 어둠을 직시하던 영한의 시야가 눈물로 번져 흐릿해져 갔다. 손으로 이불을 꽉 쥐고 눈물을 닦았다.


죽음이 무섭냐 묻던 민구에게 영한은 무섭지 않다고 말했다. 죽음은 무섭지 않다. 죽으면 고통도 두려움도 스트레스도 입시 따위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 그 말을 들은 민구는 씁쓸하게 웃으며 친구가 있지 않냐고 말했다. 민구는 영한에게 수능을 망쳐도 절대 죽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삼촌의 장례식장에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고 했다. 죽음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의 주머니 속에서 슬픔을 훔치는 일이란 것을.


그런데 왜 네가 그렇게 된 거야. 영한은 민구의 어머니에게 민구가 당한 어떤 사고에 대해 들었다. 영한은 너무 허무해 믿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일부의 죽음은 성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이건 너무 허무하다. 허무한 건 절망스럽다. 신이 필요에 의해 민구를 일꾼으로 데려간 것만 같다. 너무 쉽게 손잡고 간 거 아니냐. 강민구!



방안에만 틀어박힌 영한이 걱정된 엄마가 노크하고 들어왔다. 과일을 먹으라며 쟁반을 놓고 아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둠 속에서 아무 말 없는 영한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엄마는 문을 살짝 열어 실내화를 걸쳐두고 나갔다.


영한은 벌떡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민구의 미니홈피에 들어갔다. 죽음 후 이곳에 들어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민구의 캐릭터는 여전히 방긋 웃고 있었다. 방명록에 수많은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그 속에 죽음을 조롱하는 글도 보였다. 도대체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미니홈피의 주인이 아니라 삭제할 수도 없었다. 민구의 엄마에게 연락해 미니홈피를 폐쇄해 달라고 해야 할까. 마우스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스크롤을 내리니 추모하는 글이 끝도 없었다. 전교생이 다 쓴 것만 같았다. 영한 혼자가 아니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자의로 슬픔을 찾으러 방문한 사람들. 슬픔을 잃어 슬픈 사람들. 또 허무한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오히려 미안해하는 사람들까지. 슬픔에 매몰되지 않으면, 슬픔의 빈자리에는 각자의 다른 것들로 채워 갖는다.


다시 등교한 영한은 일부 불량한 아이들 사이에서 번진 소문과 괴담을 전해 들었다. 민구가 자살했다느니, 집에서 여학생들과 모여 술을 마시다 베란다에서 떨어져 사고를 당했다느니.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떠돌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의 학교 안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괴담은 무분별하게 퍼졌다. 비밀에 싸인 죽음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려는 태도들은 가지각색일 수밖에 없었다. 민구의 얼굴조차도 모르는 애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영한의 배 안에서 알 수 없는 꿀렁임을 느꼈다. 뭔가를 해야 했다. 뭔가를.



의사는 급체라고 진단했다. 지수처럼 말복 더위에 지쳐 체력이 떨어져 병에 걸린 환자가 늘었다고 했다. 지수는 주사를 맞고 약을 처방받은 뒤 죽을 하나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밖에 나갔다 오니 오히려 몸이 좀 더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괜히 아깝게 연차를 쓴 것만 같았다. 그 생각도 무색하게 죽을 한 숟가락 떠먹은 지수는 곧장 토를 했다.


약을 먹고 멍하니 천장을 보고 누워있던 지수는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벌떡 일어나 서랍을 뒤졌다. 서랍 안에서 찾아낸 것은 오래된 작은 상자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친구들과 선물을 주고받았던 과자 상자였다. 열어보니 그 안에는 펜팔과 편지들이 가득했다. 그때 쓰던 다이어리도 있었다. 쓰지 않고 아껴준 스티커가 썩지 않고 남아있었다.


지수는 그 안에서 팸플릿 한 장을 찾아냈다. 고등학교 여름 축제 때 체육관에서 있었던 동아리 발표회였다. 삼단으로 접힌 팸플릿을 펼쳤다. 두 번째 순서에 '여름 비망록'이라는 연극의 제목이 적혀있었다. 기획은 교내 연극 동아리였고, 작가와 배우 등등. 동아리원의 이름 속에서 오영한의 이름을 발견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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