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여름 이야기
학교는 축제 분위기로 북적였다. 천막 여러 개가 세워진 중정에서 자수 동아리 학생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저렴하게 팔고 있었고, 코스프레를 한 애니메이션 동아리 학생들이 돌아다니며 이목을 끌었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설 때마다 열리는 동아리 발표회는 이 고등학교의 오랜 전통이었다. 카메라를 든 방송부원들은 교내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취재했다. 하루 종일 스피커에서 유행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두 명의 남녀 학생 라디오 진행자는 똑 부러진 말투로 전교생에게 받은 설문 조사에 대해 토론했다.
야외 행사가 주를 이뤄 오후의 2부 행사 장소인 체육관에는 일부 학생들과 외부에서 온 성인 스태프가 무대를 만들고 장비를 체크했다. 체육관에 들어온 방송부원 준호는 어깨에 짊어진 삼각대를 내려놓고, 한 손에 8미리 캠코더를 낀 채 어슬렁어슬렁 체육관을 둘러봤다. 농구 골대가 한쪽 구석으로 밀어져 있었고, 무대에는 붉은 벨벳 커튼이 달려있었다. 2층과 3층에 파란색 관중석이 배치돼 있었고, 벽에는 여닫이 창문이 가로로 둘려있었다. 준호는 2층 객석으로 올라가 무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를 잡고 삼각대 위에 캠코더를 설치했다.
댄스 동아리와 함께 쓰는 나무 바닥으로 된 연습실에서 영한은 동아리원들과 함께 무대에 올릴 연극의 최종 리허설 중이었다. 연극 동아리의 담당 선생은 학생들과 어울린 영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영한의 단짝인 민구의 장례식 이후 학교에 출석하지 않았던 영한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한은 학생3 정도로 큰 역할은 아니었지만, 진지하게 연습에 임하고 있었다.
담당 선생은 동아리 발표회가 있기 석 달 전, 동아리부에 발표회 때 무대에 올릴 희곡을 제출하라고 했다. 3분의 1은 마감 시간을 지키지 못했고, 3분의 1은 이야기의 끝을 맺지 못했다. 남은 3분의 1, 즉 두 편이 최종 결선에 올라 부원들의 투표가 진행됐다. 한편은 영한이 제출한 '비망록'이라는 제목의 평범한 우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담당 선생과 동아리 회장은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현장에서 개표하고 투표 결과만 발표했다. 결과는 영한보다 한 기수 선배의 작품인 고등학생의 첫사랑 이야기가 뽑혔다. 모두가 수긍했고 곧바로 작품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본을 읽고 동선을 짜다 보니, 대부분 공통된 지점에서 부족함을 느꼈다. 우리의 생활과 너무 밀접하게 느껴져서 그런 걸까. 한 글자, 한 문장에서도 각자의 주관이 들어갔다. 단순한 대사에도 이질감을 느껴 캐릭터에 이입할 수 없었다. 그 의지가 온몸에 족쇄를 채운 듯해 연습의 초입부터 난항을 겪었다.
담당 선생은 학생들과 둘러앉아 회의를 진행했고, 결선에 오른 영한의 작품의 일부 요소와 적절히 섞어보기를 제안했다. 하지만 영한은 그 자리에서 거부했다. 담당 선생은 영한에게 공동 연출 권한도 부여하려고 했지만, 영한은 끝까지 거절했다. 담당 선생이 이유를 물어도 특별한 말 없이 사랑이야기가 좋다고만 했다. 담당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쓴 학생에게 고전 작가의 작품을 오마주한 수정을 권했다.
동아리 발표회를 2주 앞두고 3면으로 된 팜플렛이 배포됐다. 그와 동시에 학교는 벌써 축제가 벌어진 듯 설렘으로 가득 찼고 서로가 관심 가는 동아리를 공유했다.
홍보차 세 장의 팜플렛을 받은 영한은 누구에게 전달할지 고민했다. 한 장은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한 장은 어릴 때 처음으로 대학로 구경을 시켜줬던 외삼촌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리고 남은 한 장을 손에 든 영한은 노을 지는 폐노선 위에 서서 한참 고민에 빠졌다.
오후 행사는 운동장과 체육관 두 군데에서 진행됐다. 학교는 외부인에게도 열려있어 학생의 가족에서부터 주변에 사는 주민까지 선선해진 날씨에 마실을 나왔다. 체육관에서 공연 위주의 발표회로 구성된 2부 행사가 시작됐다. 교감 선생과 시청 관계자의 축사가 끝나고, 라디오에서 나오던 두 남녀 학생 진행자가 TV 음악프로그램 톤으로 2부의 시작을 알렸다.
첫 번째 무대에서 댄스 동아리가 관객을 휘저어 놓았다. 맨 앞 좌석에 배치된 선생들은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학생들을 보며 어색하게 박수를 쳤다. 바로 뒤에 있는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들의 정수리 위까지 손을 뻗어 환호했다. 두 번째, 세 번째 무대도 학생들의 신나는 공연으로 이어졌다.
사회자는 마지막 순서인 연극동아리를 소개했다. 학교 창립과 동시에 만들어진 동아리로서 가수와 연예인이 된 동아리 출신의 선배들을 나열했다. 연극의 제목은 <FUN한 러브스토리>였다. 처음부터 이런 진부한 제목이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달아오른 분위기에 고이 묻혀 기억에 남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40분이라는 짧은 시간은 이 분위기 속에 허락할 수 있는 정도의 길이였다.
학생들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장내는 어수선했다. 열기에 기가 빨린 선생들은 일찍이 자리를 떴다. 몇몇 학생들은 볼 것을 다 봤다는 듯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연극 동아리가 활동이 적어 인지도가 낮은 것도 그랬지만, 2부 종료와 동시에 운동장에서 폭죽놀이가 계획되어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 메인 조명이 서서히 꺼지자 체육관이 어둠에 잠겼다. 학생들의 장난치는 소리와 히죽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붙은 야광 마스킹 테이프를 따라 무대 중앙에 도착한 교복 입은 영한은 X자 마킹된 위치에 축구공을 내려놓았다. 나머지 배우들도 무대로 나와 축구공을 중심으로 모였다. 한 줄기 조명이 축구공을 비췄다. 어정쩡한 타이밍에 진행자가 연극 소개를 반복했다. "연극 동아리가 펼치는 두 남녀 학생의 뻔뻔한 러브스토리가 펼쳐집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2층에 서 있던 준호는 녹화 버튼을 꾹 눌렀다. 캠코더 안에서 테이프가 돌아갔다. 그때 뛰어온 방송반 학생은 담임 선생님이 야외 정리를 돕지 않은 학생을 불러오라고 했다며 준호를 데리고 나갔다. 혼자 서 있는 캠코더가 붉은 눈빛을 깜박였다.
영한은 축구공을 내려다보니 가슴이 울컥해졌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끝까지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왜 여기에 서 있는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무대 아래로 내려가고 싶었다. 그때 무대 뒤에서 지켜보던 담당 선생이 휘슬을 불었다. 축구공 주위에 둘러섰던 배우들이 그 소리에 맞춰 사방으로 퍼졌다.
긴장 때문인지 조명 때문인지 영한의 눈앞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대 위에 우리들만의 세상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영한의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고개가 점점 바닥으로 떨어지려 하자, 정면 먼 곳을 주시하라는 담당 선생의 연출이 생각나 다시 고개를 들어 2층 객석을 바라봤다. 붉은빛이 혼자 깜박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대 중앙에서 주인공 역할인 여학생이 대사를 읊었다.
"여기는 어둠 속이지만, 우리들의 머릿속에는 새하얀 세상이 펼쳐진다. 여기는 불안하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르나, 우리의 이야기 속엔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고, 흰 구름이 무념무상하게 떠 간다. 여기가 어딘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방황한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목표를 정해줘도, 우리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걷는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끼고 내가 말하는 대로 세상은 움직인다. 아무도 나를 조정하지 못한다."
영한은 비스듬한 각도에서 주인공을 바라봤다. 조명받은 주인공은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신의 조각상처럼 표면에 광채가 흘렀다. 반질반질하니 마치 붓으로 성수라도 바른 듯했다. 둘은 꼭 프로 배우처럼 연기했다. 연극 내내 영한은 주인공 옆에서 거들고 리액션했다. 주인공이 영한을 바라볼 때면 단순한 대사였는데도 그 말에 반응해야 하는 인간의 형태가 됐다. 이게 캐릭터라는 것일까.
두 주인공이 대화를 나누고 웃고 싸우며 감정을 드러냈다가 숨겼다. 영한은 그 모습이 진짜처럼 보였다. 유체 이탈을 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영한은 친구2와 함께 주인공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고, 주인공의 안무에 맞춰 뒤에서 춤동작을 했다. 그동안 달달 외웠던 노력 덕분에 영한은 그럭저럭 극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지만, 삐걱대고 덜컥대는 몸치는 역시 숨겨지지 않았다. 영한의 모습은 반 박자 느린 태엽 인형처럼 보였다.
연극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 영한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모든 배우가 똑같았다. 하지만 조명 아래 그 모습은 아름다웠다. 무의미하게 흘린 땀은 새로 빤 옷에 꿉꿉한 냄새를 남기지만, 몰두의 끝에 흘린 땀에서는 좋은 향수 냄새가 풍긴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안무가 음악과 함께 시작됐다. 유명한 외국 고전영화에 나오는 뮤지컬 장면을 각색한 것이었다. 안무가 끝나고 포즈를 취하자, 영한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조명에 번져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지문에 적힌 대로 '조명이 서서히 꺼지고, 막이 내린다.'는 지문이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로 기다렸다. 조명이 완전히 꺼지는 동시에 붉은 벨벳 커튼이 완전히 닫혔다.
관객석 학생들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숨죽인 침묵. 3층에 열린 창문으로 물씬 차가워진 가을바람이 들어왔다. 하절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살갗을 스치는 바람에 솜털이 바짝 섰다. 알 수 없는 정전기가 체육관 안을 스쳤다. 계절은 그렇게 지나가고 소리 없이 다가온다. 기쁨과 환희와 즐거움 속에 잊혔던 기억이 다시금 되새겨진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자연이 불러일으킨 듯했다. 체육관 밖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객석의 반응에 당황스러운 건 커튼 뒤에 선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영한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뺨에 흐른 물방울을 교복 앞깃을 들어 닦았다. 무대 뒤에서 당황한 눈빛으로 무대에 선 학생들을 지켜보던 담당 선생이 크게 외쳤다. "끝났습니다. 연극이 끝났어요." 담당 선생이 박수를 세게 치자, 객석에서도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주인공 배역을 맡은 학생의 실명을 부르는 학생도 있었다. 담당 선생의 손짓에 무대 스태프가 커튼을 열었고, 무대와 객석에 조명이 켜졌다. 무대에 선 학생들은 중앙으로 모여 손을 잡고 서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영한은 그제야 객석이 보였다. 박수를 치는 학생들의 눈가에 눈물이 보였다. 영한의 귓가에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영한! 영한아...'
학교 운동장에는 학생들과 인근 주민들이 모여 폭죽을 기다리고 있었다. 8시 55분이 되자 교장 선생이 단상에 서서 축제를 마무리하는 멘트를 했다. 8시 59분부터 웅성대는 소리가 더 커졌고, 모두 고개를 들어 밤하늘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10초 정도가 흘렀을까. 학교 외 공터에서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혜성 같은 것이 하늘로 솟구치더니, 펑하고 터졌다. 폭죽놀이가 시작됐다.
연극을 마친 학생들은 분장을 채 지우지도 못한 채 체육관을 나와 폭죽을 구경했다. 영한도 그 무리에 섞여 화려하게 터지는 폭죽을 바라봤다. 온 동네가 떠나가라 터지는 폭죽 소리에 놀란 유모차에 탄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들고 불꽃을 바라보던 영한은 시선을 옮겨 혼자 빛을 내는 보석처럼 빛나는 별을 찾아냈다. 폭죽보다 더 높은 곳에 떠 있는 저 별에서 누군가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