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여름 이야기
지수는 여름 방학을 맞아 계곡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부모님은 수험생인 지수를 배려해 여행을 취소하려고 했지만, 지수는 오히려 가족 여행을 적극 추진했다. 그 결정에 가장 신난 건 아빠였다. 회사에서 나온 보너스로 산 텐트와 캠핑용품을 창고에서 꺼내 처음으로 사용할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남동생 수호는 친구들과 게임하고 싶었기에 매년 진행되는 가족 행사에서 빠지려고 했지만, 그런 수호의 계획을 미리 간파한 엄마는 밥과 반찬이 없으니 그러면 알아서 챙겨 먹으라며 반협박으로 여행에 동참시켰다.
아빠는 어젯밤 10시에 퇴근하고도 오랜 시간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운전했다. 새벽 라디오에서는 노래가 주로 나와 졸릴 수 있다며 켜지도 않고 묵묵히 액셀을 밟았다. 지수는 헤드셋을 끼고 카세트 플레이어로 믹스테이프를 재생했다. 지수가 공들여 만든 작품이었다. 잠잘 때 머리맡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시작에 맞춰 녹음과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수는 이 믹스테이프를 그 어떤 물건보다도 아꼈다.
도심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도로에는 차가 거의 없었다. 지수는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차가 높은 지대로 올라왔는지 사방으로 산봉우리가 보였다. 산너머로 엄마의 뱃속에서 떠오르듯 안갯속에서 붉은 태양이 솟아올랐다. 자연은 어떤 예술품보다도 아름답다. 그림? 사진? 영화? 자연이 자아내는 그라데이션을 흉내 낼 수 있을까. 지수는 이것을 볼 수 있는 온전한 눈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눈을 꼭 감으니 어둠 속에서 빛이 타올랐다. 그날에 본 폭죽은 잊을 수 없었다. 밤하늘에서 폭발했던 건 응어리졌던 감정이었다. 연극 무대에 선 영한의 연기와 극의 흐름은 투박했다. 하지만, 지수는 객석에서 영한의 빛나는 눈을 보았다. 우주를 품고 있는 눈이었다. 그가 지닌 감정은 따라 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친한 친구의 죽음과 함께 몰려온 슬픔과 허전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한참을 같은 속도로 달리던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멈춰 섰다. 지수가 눈을 뜨고 보니 휴게소에 도착해 있었고, 밖은 벌써 해가 높게 떠올라 새하얗게 바랬다. 지수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식당에서 가족과 아침을 먹었다. 이 시간엔 오히려 도시보다 휴게소가 더 붐비는 듯했다. 아침을 먹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었나. 가족이나 연인 단위의 사람들이 주류였다. 운송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조용한 침묵도 흐르고 있었다. 지수는 튀김우동을, 아빠는 산채비빔밥, 엄마는 된장찌개를, 수호는 수제 돈가스를 먹었다. 지수는 우동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차에 타기 전 통감자까지 샀다.
관광안내 표지판에는 목적지인 강원도 계곡이 표시돼 있었다. 아빠는 서점에서 산 전국 지도를 꺼내 길을 확인했다. 한때 운송업에 종사했던지라 전국을 훤히 꿰고 있었다. 아빠는 지쳐 보이는 가족에게 1시간 정도 남았다고 말했다. 곧 차는 꼬부랑길에 진입했다. 지수는 멀미로 머리가 뱅글뱅글 돌아 아침에 우동을 먹을 것을 후회했다. 얼마나 올라온 걸까. 귀가 먹먹해지자 산 아래로 굽이치는 강이 내려다 보였다. 기다렸던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즐비하게 늘어선 음식점들이 나왔다.
평지에 도달해 농기계 길로 들어섰다. 넓은 평야를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길 오른쪽으로는 농지가 있었다. 산등성이 밑으로는 오래된 가옥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길 왼쪽으로는 야트막한 산 밑에 평평한 계곡이 따라 흘렀다. 야영객들은 자갈밭 곳곳에 텐트를 쳐두고 깨끗한 계곡에 들어가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튜브를 타는 아이들이 보였다. 성인들은 텐트 앞에서 양은 냄비에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아빠는 적당한 지점에 차를 세웠다. 지수는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 찌뿌둥한 몸을 쭉 폈다. 맑은 공기를 코 깊숙이 들이마셨다. 수호는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았다. 엄마가 수호의 어깨를 두드려 깨웠다. 아빠는 트렁크에서 꺼낸 텐트를 들고 지수를 불러 물가로 향했다. 슬리퍼를 신은 지수의 발목이 자갈에 수평을 잃어 쩔뚝일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모래와 자갈이 적당히 섞인 평평한 곳을 골라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지수는 멀뚱히 서 있다가 아빠의 부름에 움직이며 돕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기를 반복했다.
멀찍이 텐트 세 개가 보였고 어른들 몇 명이 부스스한 몰골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수는 문득 이 시간이면 학교에서 몇 교시 수업을 듣고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잠겼다. 그때, 텐트에서 나온 수영 팬티만 입은 지수 또래의 한 남자아이가 계곡물로 걸어가더니 준비 동작도 없이 능숙하게 수영했다. 지수는 아이를 바라보며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차가움에 온몸에 찌릿한 전기가 흘렀다. "앗 차가워!"
아이는 능숙한 수영 솜씨로 반대편 산 밑으로 헤엄쳐갔다. 텐트에서 식기를 정리하던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를 향해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외쳤다.
지수는 1박 2일 동안 이곳에서 어떻게 보낼지 궁리했다. 가지고 온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책을 다 읽을 목표 하나, 곧 있을 시험을 위해 영어 단어 100개 암기하기 둘... 그리고... 반대편을 찍고 돌아온 아이가 물에서 나와 텐트로 걸어갔다. 단단하고 마른 몸매에 새까맣게 탄 피부, 바짝 자른 상고머리까지. 낯이 익다는 느낌과 동시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납작한 자갈에 찍힌 아이의 맨 발바닥 자국이 서서히 증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