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서늘한 기억

[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여름 이야기

by 오묘미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지수는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겉보기에 잔잔했던 것과 달리 물속의 흐름은 거셌다. 무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고 있지만, 속에서는 거센 기가 흐르는 것처럼, 계곡물은 산이 뿜어낸 거대한 혈류와 같았다. 하마터면 그 세기에 지수의 슬리퍼가 휩쓸릴 뻔했다. 겨우 발가락 끝에 걸쳐진 슬리퍼는 자꾸만 누군가가 끌어당기는 듯한 기운에 가까스로 버텼다. 지수는 오히려 그 세기에 경쟁심이 생겼다. 발을 위로 세차게 들어 저항하며 슬리퍼를 낚아챘다. 그리곤 슬리퍼를 뒤꿈치 넘어까지 바짝 신었다. 발을 돌 위로 내딛자 이끼에 미끄러워 양손을 좌우로 뻗어 줄 위의 곡예사처럼 중심을 잡았다. 어느새 지수의 뺨이 상기돼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수가 한 발짝씩 물길을 가로지르는 사이, 아빠는 타이어 소재로 만들어진 검은 고무 튜브에 바람을 빵빵하게 불어넣었다. 아빠가 지수에게 튜브를 쓰라고 말했지만, 이미 목표 지점인 바위에 다다르고 있어서 필요 없다고 말했다. 텐트 안에 누워 만화책만 보던 남동생 수호는 그 소리를 듣고 텐트 밖으로 뛰어나와 튜브를 낚아채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물로 들어갔다. 튜브를 허리에 낀 수호는 유독 발을 심하게 첨벙대며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일찌감치 저녁 준비를 하던 엄마는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동네 스포츠센터에서 3년 넘게 수영을 배운 수호의 자신감에 제동을 걸 순 없었다.



바위에 도착한 지수의 입술이 차가운 수온에 파랗게 질렸다. 햇볕에 달궈진 바위는 사우나 맥반석처럼 뜨끈했다. 바위에 올라가 앉자, 온몸을 타고 오르는 온기에 닭살이 돋았다. 지수는 책에 물 한 방울 적시지 않았다는 것에 흡족해했다. 책 읽을 자세를 잡고 반대편을 바라봤다. 텐트 쪽에서 봤을 때와는 다른 경치였다. 이곳이 천상이라면 저곳은 인간의 세계다. 텐트 앞의 엄마와 아빠의 모습과 뒤로 펼쳐진 논밭과 산등성이가 액자에 담긴 듯 아름다웠다.


공상에 빠진 지수에게 수호가 헤엄쳐 다가왔다. 지수는 평소의 태도와 달리 기분이 좋아졌는지 동생이 그동안 헛수고라고 치부했던 수영 실력에 칭찬을 곁들였다. 수호는 그 말에 뿌듯했는지 튜브는 필요 없다며 바위에 올려놓고는 능숙한 자유형으로 계곡을 자기 땅처럼 자유롭게 누볐다. 지수는 책에 꽂힌 책갈피를 잡고 페이지를 열었다. 초반부만 반복해 진도를 나가지 못한 어려운 소설을 이번 기회에 끝장을 보리라 다짐했다.



해는 도시보다 일찍 저물었다. 오후 3시밖에 안 되었는데도 산그림자가 드리웠다. 가족들은 한바탕 계곡물에서 물놀이를 끝내고 진이 빠져 각자 나름대로 쉬고 있었다. 아빠는 오는 길 표지판에서 기념관이 있는 걸 봤다며 그곳에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지수도 그 표지판을 보고 이 깊은 산속에 기념관이 있다는 것이 신기해 궁금했던 차였다. 가족들은 다 같이 차를 타고 기념관으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15분 정도 가다 보니 표지판이 보였다. 안쪽 길로 들어서자 나름 잘 갖춰진 주차장이 나타났다. 주차장에는 승용차 한두 대 세워져 있을 뿐 찾는 발길은 많지 않아 보였다. 차에서 내린 지수는 산 밑에 익숙한 마감재의 공공기관 같은 건물을 발견했다. 해가 저물어 어두운 그늘에 안개가 깔려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폐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번엔 호기심이 생겼는지 신나게 앞장서는 수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무료 관람이어서 그런지 관리원은 보이지 않았다.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안에서 성우의 대사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비명이 정적을 깼다. 지수는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가족들은 벌써 팸플릿을 들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지수는 그제야 이 기념관이 20세기 초에 특정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고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곳이란 걸 알았다.



모형으로 재현한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건 잔인한 공포 영화를 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영화가 주는 이미지는 사고를 먼저 거치지만, 눈으로 직접 보고 그곳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체험하는 공포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무언가 가슴을 옥죄어오는 듯해 숨이 턱 막혔다. 지수는 설명을 읽어가며 전시를 관람하는 가족들을 두고 빠른 걸음으로 출구로 나왔다. 도대체 왜 이런 공포를 무료로 체험시키는 걸까.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지수가 이 기념관에서 겪은 공포의 냄새는 평생을 따라다닐 것 같았다.


기념관을 나와 차를 타고 계곡으로 돌아가는 길, 지수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는 여러 가지 죽음이 있지만, 서러움이 짙게 서리고 살아남은 이들의 속을 후벼 파는 죽음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기도를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죽음이란 게 없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영생을 누리는 불멸만 있다면 인간이 지닌 기억과 감정으로 엮인 추억. 그 외의 많은 감정들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또한 원래부터 탄생도 없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구와 인류의 탄생과 거대한 빅뱅 폭발의 에너지까지 과학적으로 증명될 필요 없고, 부정의 시도조차 필요 없어지지 않을까. 어느새 지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두피가 찌릿해졌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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