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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고즈넉 Oct 27. 2022

마흔.. 불혹(不惑)과 불불혹(不不惑)

아직 절반의 케이크가 남아있다.

현 한국 사회의 평균 연령은 43.9세(남 42.7세, 여 45.1세)
기대수명은 83.5세(남 80.5세, 여 86.5세)

                                                      * 출처: 대한민국 통계청


나는 대한민국 연령분포의 딱 평균, 그 위치에 있으며 기대수명의 절반 즈음을 지나고 있다. 

내 나이가 마흔이라는 걸 인지한지도 벌써 두어 가 지나간다.

내가 마흔이라니.. 내가 마흔이라니.. 를 친구와 외치던 것도 벌써 과거형이 된 지 한참이다.

두 자릿수 나이에서 앞자리 숫자가 바뀐다는 건 인생의 변곡점으로 다가온다. 물론 열아홉에서 스물이 되는 건 젊음의 연장이자 청춘의 지속일 뿐으로 큰 변화는 아니다.

문제의 인식은 서른부터 시작된다.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될 때에는 '이제 나는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거 같아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그런데 서른아홉에서 마흔이 되는 것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 나는 늙어간다'라는 객관적 명제를 나이라는 수치로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마음은 이십 대 때와 똑같다는 말들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항변한들 누가 대수롭게 들어주지도 않는 나이가 되었다.


손예진 배우도 피해갈 수 없는 마흔.. 하지만 우리도 그 얼굴이 마흔일 거라고는 상상해보지 않았거든요?                



나는 마흔이 되면 무언가 위대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100인에 든다거나 내가 속한 분야를 쥐락펴락하는 강항 영향력을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아실현적 의미에서 위대한 사람 말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던 그 불혹(不惑)이 될 거라 생각했다. 자연스럽고 당연하게도 마흔이 되면 불혹이 될 줄 알았다. 마치 겨울이 되어서 패딩점퍼를 꺼내 입듯이, 여름 바캉스에 수영복과 선글라스를 챙기듯이 말이다.


불혹(不惑)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공자가 40세에 이르러 직접 체험한 것으로 논어 위정 편에 언급된 내용이다.

    또는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음을 가리킨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하지만, 공자는 달리 공자가 아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히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분이다.

그런 분의 경험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공자가 겪으셨다는 불혹은 우사인 볼트의 100m 기록(9.58초)이고, 만 29세 손흥민의 연봉(약 108억 + 광고수입 등)과 같은 레벨인 것이다.

나이만 평균이 아니라, 재능도 능력도 평균치에 불과한 나에게 그런 불혹이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니.

불혹의 나는 불혹의 의미가 무색하게도 이렇게 순진하고 미혹하다.


여러분, 마흔이 돼도 불혹(不惑)은 오지 않습니다.
특히, 기대가 컸을 30대들에게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40대를 살아가는 나는 불불혹(不不惑)의 상태이다. 

어지러운 주변 상황과 성숙하지 못한 내가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오늘도 불불혹의 하루를 살고 있다.


불불혹(不不惑)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일상화되었음을 뜻한다.

   평범한 대한민국의 40대가 직접 체험하고 있는 것으로 매일 밤 이불킥과 함께 언급된다.

   또는 어떤 유혹도 반가움을 가리킨다.

              *출처: 나의 마음


마흔의 삶은 여전히 고군분투이다.

사회생활의 경쟁은 눈에 보일 정도로 치열하고 인간관계는 여전히 어렵다.

연로해지시는 부모님에 대한 마음은 짠하지만 새삼스레 살갑게 다가가기도 힘들다. 육아는 육체적 단계를 건너 고차원적인 정신적 단계로 넘어간다.

몸은 다소 편해졌지만 아이와의 정서적 거리감은 자꾸 느는 것만 같아 불안하다.

잘 생기고 예쁘진 않아도 젊고 건강하다는 자신감은 있었는데 이젠 자꾸 자신이 없어진다. 머리숱은 줄어가고 허리둘레는 늘어간다.

나에 대한 주변의 관심은 줄고 주변에 대한 나의 불필요한 의식은 늘어간다. 

나이 오십은 하늘의 뜻을 깨닫는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하던데 그때는 또 어떤 당혹스러움으로 그 나이를 맞이할지 모르겠다.


인샌의 절반을 살아온 지금, 남은 절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불혹과 불불혹을 떠나 마음만 조급해진다. 

경험칙상 남은 절반은 지나온 절반보다 그 속도가 복리의 기적처럼 불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불혹도 저 지천명도 그저 나의 소중한 일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련미 있게 인생의 멋을 즐기며 보내는 하루도 있고, 여전히 어설프고 나약한 나를 직면하는 하루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미숙한 세상살이이지만, 조금씩은 성숙해지고 있지 않을까?' 이런 낙천적인 기대와 함께 그 기대를 무참하게 저버리는 하루도 있을 것이다.

그런 하루하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그래도 마흔에 이른 내가 부끄럽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에 더 집중할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나의 생일 케이크는 아직 절반이나 남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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