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냉장고 비우기
감정이란 건 때때로 멍청해져서
흰색 물감으로 채운 그림 위에 찍힌 검은 점이
전체를 바꿔버릴 때가 있다
분명 흰색 물감으로 하루를 채웠는데
고작 점 하나로 검은 하루가 된다니
너무 손해 보는 일 아닌가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망친 감정은 폐기해 버리면 그뿐이다
나는 감정을 꺼내는 데 영 재주가 없다
냉동고에 꾸역꾸역 쌓아두고 냉동고가 터질 때쯤
몰아서 비우거나 아니면 정말로
냉동고가 터져버리거나
홍시를 좋아해서 물러터진 건 가
고구마를 많이 먹어서 답답해진 건가
단호박을 수없이 먹었지만 단호해지는 데엔 실패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 했는데 좋은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안 좋아 하나도
마음은 냉동고, 관계는 마치 냉장고 같다
냉장고는 냉동고 보다 감정을 얼리는 힘이 약해서
제 때 꺼내지 않으면 상해버리고 오래 묵히면
냄새가 배어 다른 감정까지 망가뜨린다
버릴 것과 걱정 없이 둬도 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보통 에너지로는 어림도 없다
습관처럼 감정을 요리해 하루에도 몇 번씩
뚜껑조차 닫지 않은 채 건네는 사람들이 있다
상한 줄도 모르고.
자신은 정이라 믿겠지만
알고도 건넨 거라면 더 고약하다
입맛이라는 게 사람마다 다르다
내 입에 최고인 요리를 누군가는
구역질 나게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물러터진 홍시는 몇 년이나 답을 내준다
음식의 재료와 익힘 정도 그리고 수고로움까지.
처음 몇 번은 그대로 삼켜버렸던 적이 있더랬다
나를 챙겨주는 마음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했다
냉동고가 한계에 다다랐을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이건 상한 감정이고 더는 받지 않겠다고.
말이 통할 사람이었으면
자기 입에 먼저 넣어봤을 테지
타인의 자기 연민이나 인정욕구까지 들이기엔
내 냉동고가 너무 좁다
몰랐다
나를 위한 마음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요리하는 자신에 취한 연출된 친절이었다
나는 그저 자존감을 튕겨주는 트램펄린이었고
조회수 1짜리 성장스토리 라이브 방송에
단단히 잘못 걸린 PPL이었다
의미는 과잉되고 감정은 처리되지 않는다
온통 자기애로 가득 찬 서사는
조용한 불편함을 낳고
소리 없는 거리감으로 자라 버렸다
언젠가 블로그에
우리는 스스로의 삶에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지금도 생각은 같다
다만 타인의 서사에서까지 주연을 자처하는 순간
갈등의 기원으로 기록된다
관계는 언제나
제 자리를 지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때로는 이름 없는 단역이 가장 중요한 공기를 만든다
누군가의 삶에서 나는
조용한 조연일 수도
불편한 반동일 수도
혹은
하루의 먼지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존재의 스펙트럼은
늘 상대의 시선에 기대어 비로소 드러나는 법이다
단호박을 더 많이 먹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