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
거만하게 시작한 첫 제목이 부끄럽게, 나도 나를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얘기는 내가 조금 더 솔직해졌을 때의 얘기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라는 것은 내게 없으면 안될 것이었다. 초등학교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1학년 때까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원래 초등학생들과 같은 아이들을 좋아했고, 초등학교 선생님께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이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은 어른들을 위한 꿈이었을 순간도 있었다. 그 어린친구가 "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될거에요!"라고 당차게 말하면, 외할머니며 어른분들이 좋아해주셨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꿈은 내 것이자 남의 것이 되어있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1학년 때, '연기'에 관심이 갔다.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무대에 서보는 경험을 하는 연극부우가 되고 싶었던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렇게 바로 고등학교 연극동아리에 들어가게 됐고, 소히 예쁜친구들만 간다는 곳에 친구에 껴서 간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낀 체로라도 들아가게 됐다.
연극부에 들어가서 연기를 해보고 또, 더 나아가 학교연합으로 하는 연극부까지 들어가보게 됐던 경험은 생각보다 '스토리'에 더 큰 시야를 확장하게 하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같이 희곡부터 무대까지 만들어 공연한 '영어 연극 대회'는 내가 희곡이라는 연극을 창작하고 하나의 무대를 감독하며 기획하는 것에 큰 흥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때, 나의 포효하는 연기를 보고 칭찬을 해준 친구들의 얘기가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뒤였다. '정말 내가 연극배우가 되고싶나?'라는 질문을 가로막는 곳에는 '외모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리고 '소속감'이라는 것이 가로막았다. 후자의 얘기를 먼저 해보다 보면 자연스레 전자의 얘기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연극 동아리는 아무래도 소히 학교내에서 난다긴다하는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왔다. 친구도 많고 마르고 예쁜 그런 친구들로만 가득차 보이면서 동시에 안경도 끼고 그 중에 제일 체중이 많이 나갔을 나는 그야말로 의기소침이었다. 동아리 밖의 반친구들과는 그렇게 활발한 애가 없는데, 격주 금요일마다오는 동아리 시간이 그렇게 싫었을 수가 없다. 엎친데덮친격으로 여자분들이 많으셨던 선배들 사이에서는 나의 존재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는 분도 계셨고, 남자후배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분들도 많으셨고(만약 남자분들이 많았다면 또 비슷하게 여자후배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의 비중이 늘었을 것이다), 그런 뭔가 '연기'와 '연극'보다는 다소 다른 분위기 속에서 점점 더 소외감을 느껴갔다. 같이 갔던 친구조차 의지가 되지 않은 체로 심리적으로 상처만 계속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선배들과의 트러블과 더 나아가 동기 사이에서도 의기소침한 스스로는 잘 어울리지 못했고, 자존심이 상했고, 소외감에 외로워했다. 문득, 이러한 것들을 다 견딜정도로 연기가 좋나?하는 질문에, NO가 나왔다.
당연하게도 그때는 신물이 났다.
그러다 앞서 말했 듯, 늘 꿈이 있게 살아온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을까 생각했다. 어쩌면, 아무 목적과 목표없이 살아가는 순간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처구니 없겠지만, 내 영화에 대한 꿈을 찾아준 곳은 워크넷의 진로적성검사이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자면, 이 질문에서 시작됐다.
나는 왜 연극배우가 하고 싶었을까?
그리고, 나는 사람들에게 스토리를 전달하는 영향력을 긍적적으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더 자기자신을 사랑하고, 또, 환경과 주위 사람들과의 사랑에 대해서도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훈계와 강연이 아니라, 스토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영화기획자를 꿈꿨다.
처음엔 영화감독이 되고 싶지 않고 왜, 영화기획자일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나는 각 쇼트마다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영화감독은 너무 벅차서 못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곳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기획을 좋아했다.
이것이 잘 이끌어지도록 씨앗을 발굴하고, 열매까지 거둬들이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드라마감독이라면(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금 더 유연할 것 같았어요!) 연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영화감독은 부담스러웠다.
내가 만든 스토리로 강압적이지 않게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라는 매체를 만들 수 있다니, 영화기획자라는 일은 참 설렜다. 말 그대로 설렜었던 것 같다.
벌써 이것이 내가 고등학교 1학년때 겪었던 생각이니, 어언 9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그렇게 나도 변했다.
영화를 좋아하던 소녀는, 영화를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주눅들고, 영화기획자라는 직함만으로 설렜던 대학생은 두 번 다시 제작부 현장을 가지 않겠다며 소문을 냈다.
그리고 요즘은 영화감독을 하고 싶어한다.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영화를 연출하는 일은 내게 이제, 몸 속에서 상상한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환상감으로 매료시켰다. '몸 속에서 상상했다'는 말은 참 우숩다. 그렇지만, 머릿속으로 하기엔 너무 딱딱하고, 가슴으로 했다기엔 너무 뜨겁다. 몸 속은 너무 물 속을 부유하는 것 같지만, 어찌됐던 나의 속와 밖으로 나온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것 같다.
연출을 좋아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할지 모르겠던 순간도 있었다.
4학년 1학기는 그런 고뇌에 휩싸인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능력이 없어' '나는 연출로서의 자격이 없어'를 되뇌이던 나는 끝끝내 연출이 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지 못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다른 친구들에게 말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됐다.
아마 자신이 향하지 않던 길로 꿈을 향하는 바람을 원하는 사람은 이해해주실거라 생각하는 것은 방황감이다. 내가..., 내가....?
가끔은 아니 자주 그 말 속에 숨었다. 아니 솔직하게는, 자주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온전히 그 말 속에 숨었던 것 같다.
단락을 나눌 수 밖에 없던 나의 변화는 그렇게 한 번 더 찾아왔다. 영화기획자 -> 영화PD -> 영화감독 -> '영화감독을 원하기엔 나는 자질이 안돼' 라는 생각을 배회하다가,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하자'로 생각을 도착시키게 됐다.
왜, 어떻게는 나도 모른다. 이 생각까지 오기까지 많은 자신을 깎아내리는 순간과 친구들에게 엉겨붙는 순간이 있었다. 다만, 그렇게 겪다겪다가도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아마 정말 내가 잘 해보고 싶어서였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이번 졸업프로젝트를 잘 찍기 위해서, '단편시나리오 쓰는법'을 읽는다. 촬영을 잘 알기 위해서 클래스101 1인 영화촬영관련한 강의를 듣는다. 사람을 잘 이해하고, 사람이 주는 인상을 캡쳐하고, 또 원래는 콘티를 잘 그리기 위해서 '제스쳐 드로잉'수업을 듣는다.
하나씩 한다.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물론 그런데 반전이지만, 영화 제작부도 하고 싶다. 어쩌면 두 사랑을 하고 있는 기분이기도 하다. 연출은 내가 직접 무언가를 만든다는 느낌, 제작은 다같이 영화의 일부가 되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느낌. 이 다른 느낌의 충족감은 모두 영화만들기로 연결된다.
가끔은 나는 왜 영화가 하고 싶은지를 반문한다.
그것을 몇 번이고 대답해 봤지만, 일관된 것은 사람하나였다.
이제는 내가 연출이 왜 하고 싶은지를 질문해야 할 때가 왔다.
잘 하는지도 모르겠고, 다른 더 잘하는 사람도 많고, 나는 제작일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나는 왜 지금 연출이 하고 싶고, 나의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물론 이것도 다같이 스탭과 만들지만, 그런 말장난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알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나만의 예술적 세계를 창작하고 싶다. 예술을 좋아해서, 예술가가 되고 싶은 것 같다. 영화는 내가 생각하는 예술중 제일 매력적인 예술이다. 그런 예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위치인 감독이 되고 싶다.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 그것도, 한국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대학원을 가서 미국에서도 활동을 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 그리고, 앞서 말한 이유인, 나만의 개성이 반영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독립영화감독이 되고 싶다.
큰 꿈을 꾸는 것은 무섭다.
그렇지만, 만약 꿈을 꾸고 있지 않는다면 죽어있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낀다.
브런치에 글을 남기면 무엇이라고 흔적이 남아 내게 자극이 될까 작은 기대를 남겨보며 마무리한다.
이 글이 앞선 2022년의 할리우드 워크오브페임을 걸었던 일화와 엮여지는 것은 이 이유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때의 즐거움
이것은 아무도 아무것도 따라올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즐거움이다.
꿈을 꿀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은 없다지만 지금 20대라는 것에 감사한다. 그와 동시에 다들 취직을 향해 나아가는 20대 중반으로서 또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 무섭기도 하다.
본질에 집중하여 노력에 노력을 하는 것을 잊지 말길.
결국 그 두려움을 안겨주는 큰 꿈은 내가 어떻게 얼마나 노력하고 믿는지에 따라 나의 길을 안내해줄 중앙선일 것을 잊지 않고, 차선을 지켜가며 갈 예정이다.
지금은 예정이지만, 그 이후는 당연한 것이 되고, 그리고 이 다음은 습관이 정말 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두서없이 쓴 그 문체자체가 지금의 나의 모습인 마무리 부분을 읽으며, 앞서 작성된 할리우드에서 맛있는 크레페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나를 겹쳐서 봐주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