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11C 초, 이란에서 창업한 셀주크제국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튀르크족이 세운 나라입니다. 6~8C에 제국을 건설해 고구려와도 관계가 있던 ‘돌궐’, 오스만제국, 터키가 칠면조를 연상하게 한다고 국명을 바꾼 튀르키예,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 연방의 몇몇 공화국, 아제르바이잔, 중국의 신장 위구루 자치구 등이 튀르크 제족이 세운 나라입니다. 셀주크 제국이 서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차지합니다. 1071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는 셀주크 제국의 성장을 견제하고자 소아시아라고도 부르는 아나톨리아반도의 동쪽 끝 만지케르트라는 곳에서 셀주크제국 군대와 마주합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한 동로마제국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1077년에는 예루살렘마저 이슬람 세력에 넘겨줘 2백 년 동안 벌어지는 십자군 전쟁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1077년, 성직자 임명권을 놓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면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권의 정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하지만, 이후 교황은 황제에게 굴욕준 대가를 톡톡히 치릅니다. 1984년 황제가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은 이탈리아 남부로 피난 가 이듬해 그곳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를 이어 추대된 빅토르 3세는 2년 재임 후 병사하고 사십 대 중반의 우르바노스 2세가 교황에 선출됩니다.
“신이 바라신다(데우스 불트, Deus Vult)!”
교황은 셀주크제국이 점령한 예루살렘을 이용해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고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합니다. 1096년 1차 십자군이 결성돼 원정을 시작합니다. 아나톨리아를 종단한 십자군은 레반트 지역(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 등)을 차례로 점령하며 1099년 마침내 예루살렘을 되찾습니다. 1차 십자군은 레반트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포함해 4개의 십자군 국가를 건설합니다. 한 세기 가까이 존립한 예루살렘 왕국은 1187년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을 넘깁니다. 이 과정을 각색한 영화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Kingdom of Heaven’입니다.
1차 십자군에 포함해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민중 십자군이 본대에 앞서 출정합니다. 민중 십자군의 중심에 은자(속세를 떠나 고행하는 수도자) 피에르가 있습니다. 우르바노스 2세가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자 피에르는 프랑스의 도시를 돌며 십자군 참여를 독려합니다. 피에르의 선동적인 설교는 수많은 사람을 십자군 원정에 동참하게 만듭니다. 이들 중에는 일부 귀족도 있었지만 대부분 빈민이었기에 민중 십자군이라고 따로 구분합니다. 피에르가 이끄는 10만의 민중 십자군은 1차 십자군에 앞서 예루살렘을 목표로 진군합니다. 병참이란 개념조차 없던 민중 십자군은 굶주림을 약탈로 해결하다 기독교 국가의 반격을 받아 대다수 인명이 살상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아나톨리아에 상륙하지만 셀주크제국의 일족인 룸 술탄국의 정규군에게 대패합니다. 피에르를 포함해 살아남은 소수의 인원은 뒤이어 도착하는 1차 십자군에 합류합니다.
1차 십자군도 아나톨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의 안티오키아를 공격할 때 식량 부족으로 인해 곤란을 겪습니다. 식량공급이 원만치 않자 탈주자가 생깁니다. 탈주자는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했기 때문에 대부분 중간에 잡혀 소환됩니다. 잡혀 온 탈주자 중에 은자 피에르가 있습니다. 무수한 그리고 무고한 사람들을 선동해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가 굶주림을 피해 도망가다 잡혀 온 것입니다.
신념이든 사익 추구든 아니면 그 둘의 혼재든 어느 시대나 선동가가 있습니다. 시대가 흐르고 바뀌어도 미혹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선동가의 출현은 그치지 않겠지요. 정치의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투표소로 향하던 발길, 이번엔 그 발길을 멈춰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망설임 없이 선택하던 30여 년 지지정당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 같은 당혹스러운 날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