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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세일 Apr 13. 2024

무욕(無慾) 그리고 익숙함

사람 이야기

고죽국의 군위를 놓고 형제가 서로 양보하다 수양산에 은거하며 굶어 죽었다는 ‘백이와 숙제’. 우리에겐 성삼문의 시조로 더 친숙한 ‘이제’는 은주교체기를 살았으니 기원전 11C 사람들입니다. 지금의 관점에서야 당연히 이해 불가지만, 공자의 시대인 기원전 6C의 관점에서도 둘의 삶은 범상을 벗어났었나 봅니다.     


‘백이와 숙제’의 삶을 놓고 공자, 공자와 뜻을 달리하는 몇 사람이 마주 앉아 논쟁을 벌입니다. ‘도’ 안의 삶과 ‘도’ 밖의 삶, 오늘날에도 충분히 논쟁이 될 만한 주제입니다. 대화의 내용으로 짐작건대 그 시대에도 ‘도’란 고리타분한 화두였나 봅니다. 공자의 토론 상대였던 사람들은 “‘도’ 안의 백이와 숙제는 결국 굶어 죽었으니 ‘도’ 밖의 삶이 더 가치 있다.”라는 논리로 ‘도’의 무용론을 펼치며 공자를 몰아세웁니다.     


옳고 그름은 ‘신념과 신념에서 비롯된 가치’에 따라 다르겠지요. 수학 공식도 아니고, 과학 실험실도 아니고, 교감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결론 낼 수 있는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공자니까 뭔가 특이하고 특색 있는 특별한 마무리가 있지 않았을까요? 공자가 카운트 펀치로 날린 멘트가 있었는데 상대방이 그 펀치에 녹다운됐는지 사뿐히 피하고 역공했는지는 기록에 없어 모르겠습니다.     


“군자는 세상을 마친 후에도 이름이 칭송되지 못함을 부끄러워한다.”     


압도적인 결과를 만들지는 못했겠지만, 이후부터는 "너희는 군자가 아니다"는 전제로 대화가 이어질 테니 유효타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점잖게 마주 앉아 도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밝히고, 공감하고, 부연하는 자리가 아니었으니 공자로서는 곤혹스러운 자리였을 것 같네요.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연을 만드는 일이 점점 더 망설여집니다. 낯가림과 어색함에 대한 불편은 나이가 들어도 나아지지 않으니 가끔은 스스로 바보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 것도 같고, 낮은 자존감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아니면 익숙한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일 수도 있겠네요.     


원인이 무엇이든, 점점 더 지배적으로 바뀌는 생각, “이 나이에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새로운 누군가와 불편을 참아가며 말을 섞고 술잔을 나누겠는가?” 그리하여 제 주변에는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끔찍하게 익숙한 사람들만 남아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나 봅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평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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