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은 처음입니다만

냉장고는 나보다 더 많은 걸 기억한다

by 충청도 여장사람


냉장고 문을 열면,

차가운 공기보다 먼저 나를 덮치는 건 부끄러움과 약간의 수치심이다.

나보다 오래된 반찬들이, 나보다 더 성실하게 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사실.


다이어트를 결심한 날 사둔 샐러드 채소,

놀이터 지박령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쟁여둔 바나나우유,

‘오늘은 꼭 만들어줘야지’ 하며 저장해둔 SNS 속 반찬거리들.

냉장고는 나의 결심과 죄책감, 그리고 귀찮음을

아무 말 없이 차곡차곡, 차갑게 정리해둔다.


마음먹고 청소라도 하려 문을 활짝 열면,

그 안은 거의 내 몇 달치 일기장 같다.

식어버린 국은 캐캐묵은 대화 같고,

곰팡이가 핀 반찬통은 ‘이번 주는 꼭 해야지!’라는 다짐의 사체 같다.

냉장고는 나의 생활기록부이자, 나의 기억 창고다.

내가 잊어버리고, 까먹고, 묵혀둔 날들을 대신 저장해주는 유일한 가전.


그래서일까. 오래된 반찬통을 비우면 속이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묘하게 망설여진다.

나름 정성껏 만들고, 나름의 의미를 담았던 것들이니까.

버림과 정리를 통해 그날의 한 장면을 지우고,

비워냄으로써 다음 결심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


나는 오늘도 냉장고를 비우고 또 채운다.

지난 다이어트의 실패를 비우고,

요즘 유행하는 새로운 다이어트로 다시금 채워보는 냉장고.


냉장고속에 유통기한이 지난건 음식이 아니라 나의 다이어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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