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싫어병의 상황별 분석

근황: 왜 나는 공부가 하기 싫은가

by 익명의 오소리

얼마 전에 알리익스프레스에서 구입한 블루투스 키보드로 처음 글을 쓴다. 타자 치는 느낌이 썩 유쾌하지 않아서일까, 아이디와 비밀번호 입력할 때 말고는 쓸 일이 없던 키보드를 간만에 두들기는 게 썩 적응이 쉽진 않았다. 결국 키보드 밑에 작은 타올을 깔고 나니 한결 낫기는 하다.


장기적으로 직업을 바꾸고자 공부를 시작했다. 시작은 거창하게 인강도 지르고 책도 사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나의 가장 강력한 욕구는 뭔가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공부를 안하고 싶다는 욕구였다. 공부도 안 할거면서 이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이렇게 버틸 이유가 없는데. 그래서 왜 공부가 하기 싫은지를 생각해 보니 기본적 하기싫어병 시리즈를 뛰어넘는 또다른 몇 가지 강력한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 이유는, 지금껏 공부를 통한 직접적 목표달성의 경험이 없다는 것. 100% 그렇다기에는 어폐가 있긴 하지만 노력의 결과는 내가 원한 A가 아닌 A”였던 일만 허다했다. 시원하게 말아먹은 데다 두번 치를 여력도 없었던 수능과 편입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원 가려고 벼락치기로 아이엘츠 성적은 어찌어찌 만들어 놓고도 유학을 못갔고 등등... 그러다 보니 일시적인 즐거움을 포기한 채 체력을 갈아넣는 노오력과 시간 투자를 하는 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한다고 되기는 될까, 장담할 수 있는 미래가 올 것인가에 대한 나 자신을 향한 강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도 안 될 것 같으므로 하기 싫다 -> 안한다! 는 알고리즘을 박살내지 않으면 10년 뒤에도 이러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개선이 필요하다.


두번째 이유는, 피로와 스트레스에 대한 두려움. 22살 때 1년간 4시 반에 일어나야 했음에도 나는 결국 새벽형 인간이 되지 못했고 잠도 줄이지 못했다. 수면시간이 7시간 밑으로 떨어지면 만성피로는 물론 머리속 지우개가 1주일을 통으로 날려버리는 등의 기억력 손상, 극도의 불행함, 복부팽만과 변비, 체중증가 등 온갖 끔찍한 상황이 몰려오는 데다 카페인에도 예민하다 보니 커피도 마실 수가 없다. 심지어 오래 앉아서 공부를 하니 허리디스크에서 오는 통증까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닌가. 경제활동을 위해 야행성 인간 본연의 바이오리듬을 무시하고 아침에 어떻게든 나를 깨우고 달래서 회사에 가는 것만으로도 지치는데, 돌아와서 다시 책상에 앉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방에 들어오면 침대가 그대여 내 품으로 오라며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손짓을 하다 보니, 공부를 시작하고 며칠 못 가서 퇴근하자마자 침대에서 눈을 붙이고는 아침을 맞는 일이 허다하다. 이렇게 쓰레기같이 살 순 없어! 하면서 다시 나를 다잡아 오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너무나 멀고도 험난하다. 그래서 다시 PT 20회를 끊었고 식이조절도 시작할 예정이다.


결국 문제는 고장난 알고리즘 그리고 체력의 문제였다. 해결이 필요하다.


1-1. 잘못된 알고리즘의 개선: 사소한 성공경험을 통해 다시 공부습관을 확립한다 -> 시험접수에 필요한 토익을 먼저 보고 온다. 그나마 쉽게 공부할 수 있는 어학 시험이니, 공부를 하면 좋은 성적이 나온다는 긍정적 사이클을 회복하면 공부를 하면 효과가 있다는 믿음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2-1. 체력 문제: 운동을 한다, 보약을 먹는다, 식이조절을 한다, 규칙적으로 생활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허투루 낭비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그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잘 것.

냉정하게 뜯어보면, 6시간 반-7시간을 자고 회사에서 칼퇴가 가능하다고 가정했을 때 깨어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면 하루 5시간까지도 공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매우 한정적이며 집중을 하러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 시간까지의 로딩이 너무나 오래 걸린다.


살림에 허비하는 시간이 많다. 일상의 단순화가 매우 절실하다. 특히 식생활이 단순해져야 할 필요를 많이 느낀다. 냉장고에 돌아다니는 식재료들을 최대한 빨리 소비/처분하고, 저탄고지, 야채 과일의 섭취를 늘려야겠다. 안타깝지만 멜라토닌이 많이 함유된 음식(잔뜩 가지고 있는 견과류, 바나나, 파인애플...)은 당분간 자제해야 할듯 싶다. 1일 닭가슴살 큐브 2봉지로 아침/저녁을 해결하는 식의 심플 라이프가 필요하다. 그리고 공부하려면... 정말 홍삼이 필요할 것 같다.


또하나, 하기싫어병의 가장 나쁜 증상은, 사실은 하나도 궁금하지도 않은 것들에 대한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시간을 허비하게 하고야 만다는 것. 더군다나 이 증상이 가장 나쁜 이유는 스트레스로 CPU에 발열이 돌면서 리소스가 부족할 때에 잠도 안 자고 이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땐 냉정하게 나의 전원을 끄고 재울 것인지, 리프레시가 필요한지를 재빠르게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보통은 그게 안 되고 하기싫어 모드로 바로 넘어가는 것 자체가 문제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는 예방차원의 넛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시간을 허비하며 보고 있는 기사 하나, 웹툰 한 편이 나의 인생에 무슨 도움을 주는가? 를 끊임없이 묻고자 한다. 그러다 보면 네이버 뉴스를 헤집고 다니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할일을 다시 하게 된다. 인강 듣다가 쓸데없는 게 궁금해질 때마다 적어보는 노트도 마련하려고 한다. 나중에 보면 '이걸 당장 찾아보지 않아도 인생에 아무 지장이 없는 것'이 알량한 호기심의 대부분이라는 것을 방증할 테니.


결국 지금의 문제해결 방안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체력개선, 식습관 개선, 환경의 단순화 및 수면시간 확보 -> 의욕 있음 -> 하기싫어병으로 인한 버퍼링(자원낭비 및 불필요 손실의 축소) -> 집중해서 공부 열심히 (효율 증대 및 절대적 공부량 확보) -> 성취감 -> 성공의 길


조용한 ADHD 환자에 가깝고 사회성도 어지간히 없는 나를 지금껏 잘 길들여서 사회화를 하느라 많이 애썼다. 앞으로는 사회에 가까스로 적응해서 어떻게든 버티는 차원을 넘어 더 큰 세계로 나가서 활약할 수 있는 큰 인물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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