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태규 Jun 13. 2022

일본 특수검찰의 '국책수사' 만들어낸 영웅

사토 마사루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잘 나가는 외교 평론가다. 그는 외무성 재직 시절, 옛 소련과 러시아의 은밀한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는 정보 전문가로 활약했다. 일본에는 한국의 국가정보원과 같은 정보기관이 따로 없다. 따라서 총리실에 있는 내각조사국과  외무성 등이 각자 국정원과 같은 정보 업무를 한다.


사토 마사루는 1990년대 말 일본의 대러정책, 특히 러일 평화조약에 깊숙하게 관여했다. 정치권에서는 스즈키 무네오 당시 자민당 관방부장관이 대러 비밀외교의 핵심이었고, 사토 마사루는 외무성 국제정보분석국에 정보 분석관으로 근무하면서 스즈키 의원을 밀착 지원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소련 붕괴를 계기로 탄생한 러시아를 상대로 북방 4개 섬을 반환한다는 숙원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2000년까지 평화협정을 맺어 북방 4개 섬 문제를 완전히 타결한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때의 핵심 인물이 스즈키 무네오 의원과 사토 분석관이었다.


그러나 2001년 4월 고이즈미 총리의 등장과 함께 국내외 정세가 급변한다.  고이즈미 총리는 내정에서는 자민당 주류였던 경세회의 해체와 신자유주의 경제를, 외교에서는 미일동맹 중시, 미국 추종 전략을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내, 외정에서 구체제를 상징하는 인물인 스즈키 의원이 희생양으로 선택됐고, 스즈키의 핵심 측근인 사토 분석관도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국가의 덫>(신조사, 사토 마사루 지음, 2005년)은 사토 분석관이 2002년 5월 검찰에 구속된 뒤 보석될 때까지 512일 동안의 기록을 담은 충격의 옥중수기다. 옥중 수기이지만 소소한 개인적인 감상을 담은 것이 아니라, 정보통답게 이런 사건이 어떤 정치, 외교적 배경에서 일어났는지를 묵중하고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는 스즈키 의원과 자신을 타겟으로 한 수사를 '국책수사'로 정의한다. 우리나라 용어로 바꾸면, '정치 수사'와 '기획수사', '하명수사'를 합쳐 놓은 개념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사실은 국책수사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사토 분석관이 아니라 사토를 취조한 도쿄지검 특수부 검사다. 그는 사토 분석관이 취조에 완강하게 반발하자 이 사건은 국책수사이기 때문에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나갈 수 없다고 말한다.


 사토 분석관은 두 가지 혐의로 수사를 받고 기소된다. 하나가 이스라엘의 유명한 러시아 전문가를 일본이 만든 옛 소련 연방 12개국의 지원하기 위해 만든 국제기구인 지원위원회의 자금으로 초청했다는 배임 혐의이고, 또 하나가 북방 4섬에 디젤 발전기를 지원하는 사업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미쓰이물산을 지원했다는 위계 업무방해 혐의다. 사토 분석관은 검찰의 이런 혐의가 스즈키 의원을 잡기 위해 들씌어진 것이라고 완강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특수검찰의 수사를 받으면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국익을 훼손하지 않고 자신이 획득한 특수정보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선에서 검찰과 적절하게 타협한다. 형식적으로는 타협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검찰이 그린 그림에 전혀 호응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관철한다.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 검찰 수사에 철저하게 저항하는 사토 분석관의 정신력도 대단하지만, 취조하는 특수 검사가 그의 논리를 수용하는 모습도 대단하다. 이처럼 피의자와 특수 검찰의 지적이고 논리적인 대결은 한국 특수 검찰의 우악스런 풍토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광경일 것이다.


사토 분석관은 스즈키와 자신이 타겟이 된 이 국책수사의 배경으로, 일본을 지배해왔던 패러다임이 고이즈미 총리의 등장과 함께 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내정에서는 '케인즈 형의 공평 분배 정책'이 '하이에크 형의 차등 분배 정책'으로 전환됐고, 외정에서는 국제협조주의에서 배외주의적 내셔널리즘으로 전환이 이뤄지면서 뭔가 희생양을 통한 계기 마련이 필요했는데, 그에 딱 맞는 인물이 그동안 내정애서 공평 분배, 외정에서 국제협조주의에 힘써온 스즈키 의원이라는 것이다. 


사토의 분석은 상당히 일리 있어 보인다. 이 시건은 내가 도쿄 특파원 시절에 벌어졌는데, 당시에는 북방 4섬의 반환 문제와 관련해 4개 섬 일괄반환론자인 고이즈미 총리가 이전의 2개 섬(하보마이, 시코탄) 우선 반환론자인 스즈키 의원을 제거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책을 읽어 보니 사토 분석관은 스즈키를 비롯한 자신들은 4개 섬의 주권이 일본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이지 절대 2개 섬의 선행 반환론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방 4개 섬의 반환 문제를 둘러싸고 4개 섬 일괄 반환론자와 2개 섬 우선 반환론자가 대립하고 있는 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어느 세력이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부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의 묘미 중 하나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외무성 안에 어떤 노선 대립이 있으며 어떻게 노선이 변해가는지, 정치 세계와 외무성의 관계와 외무성 안의 경쟁 구도는 어떤지를 엿볼 수 있는 점이다.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공사를 지낸 뒤 주미대사까지 한 스기야마 신스케와 한국계인 도고 가즈히코 전 네덜란드 대사 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외교관에 대한 평가와 민낮도 만날 수 있다.


사토 분석관은 이 사건과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완전히 새로운 경지의 삶을 살고 있다. 외무성 재직 때는 논캐리어 출신의 분석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일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전천후 외교 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다. 일본의 주요 시사 월간지에 그의 기고나 인터뷰가 실리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고, 일간지나 방송에도 나오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일본 특수검찰은 그를 일시적으로 덫에 가두는 데 성공했찌만, 그 덫은 그에게 새로운 날개를 달아줬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무의미하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