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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Sep 11. 2023

눈물과 분노 없이 읽을 수 없는 '한통련의 고난기'

<야만의 시간>, 김대중, 재일동포, 유신정권, 간첩조작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앞으로 나아가는가? 20세기보다는 21세기에 더 나은 세상이 오고, 22세기에는 21세기보다 더 좋은 세상이 오는가?


적어도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뒤 전개되는 일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문명에서 야만으로 퇴화, 열화하는 일들을 목도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거의 없다. 


물론 큰 안목에서 보면 인류 문명은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해 왔다. 윤 정권의 퇴행은 그런 큰 흐름 속에서 작은 퇴보라고 대범하게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당대에 직접 역사의 퇴보를 맛보는 사람의 심정은 매우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야만의 시간>(진실의 힘, 김종철 지음, 2023년 8월)은 김종철 전 <한겨레> 기자가 우리나라도 이젠 민주화가 됐으니 '야만의 시간'은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걸 호소하기 위해 쓴 책이다. 


김 전 기자는 현역 기자 시절에 취재하다가 일본에서 반박정희, 반유신 독재 투쟁을 하다가 '반국가단체'라는 어마 무시한 족쇄를 차게 된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의 후신)의 존재와 억울한 사정을 알게 됐다. 그리고 2022년 정년퇴직을 한 마치 밀린 숙제를 하듯, 한통련의 누명을 벗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1년여의 작업 끝에 올해 광복절 날, 이 책을 내놨다.


그런데 장날에 비 온다더니, 바로 그짝이다. 우리 시대에 남아 있는 야만을 끝장내자는 책을 냈더니 우리 사회는 더욱 야만의 시대가 강해지고 있다. 김 전 기자도 최근 페이스북에 "대한민국 발전에 공이 큰 사람들을 외면해온 '야만의 시간'을 이제 끝내야 한다는 마음에서 책을 썼는데, 현실에서는 야만의 시간이 더 강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허탈한 심경을 토로했다.


하지만 야만의 시대가 더욱 강해진다고 해서 한통련에 가해진 야만성이 가려지거나 흐려질 수는 없다. 오히려 그때의 야만과 지금의 야만이 독립된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된 것이며 뿌리 깊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 면이 있다. 즉, '한통련 반국가단체'라는 야만은  '큰 야만'의 산물이고, 큰 야만의 개선 없이 한통련에 가해진 야만도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인식 말이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반세기 넘는 차별과 박해)에서는 한통련 사람들이 지금도 조국에 의해 당해고 있는 차별과 박해에 관해 쓰고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재일동포는 10년짜리 여권을 발급받는데, 이들은 단지 한통련 소속이라는 이유로 1년, 3년, 5년짜리 여권을 받는다. 심지어 여권을 내주지 않기도 한다. 한통련 최고고문이었던 곽동의씨의 경우는 한국전쟁 때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참가한 공적으로 국가유공자가 됐고 보훈보상금도 받았었지만, 한통련 간부라는 이유로 보상금 지급이 중지됐다. 이외에도 지금도 한통련 회원들에게 여러 물적, 심적 차별과 박해가 가해지고 있다.


3부(개혁파의 홀로서기와 찬란한 투쟁)는 한통련의 탄생 과정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연계·연대, 한국 민주화에 대한 공헌과 활약 등이 나온다. 민단 안에서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세력이 갈라져 나와 고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새로운 단체(한민통, 한통련)를 만들었고, 이들이 박정희 유신독재 내내 김대중씨와 연대해 반박정희 투쟁을 전개했다. 한민통은 1973년 8월 일본에 머물던 김대중씨가 결성대회를 불과 일주일 앞두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납치되자, 즉각 김대중씨 구출운동에 나서는 등 김대중씨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한통련은 또 한국 안에서 벌어지는 민주화운동을 일본과 세계에 알리는 귀중한 창구 역할도 했다. 국내에서 언론 통제로 전혀 볼 수 없었던 <전태일 평전>과 이소선여사의 활약을 담은 영화 <어머니>가 이들의 손을 거쳐 일본에서 출간되고 상영됐다. 이런 일은,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4부에는 한통련뿐 아니라 재일동포의 갈등 역사, 한국 민주화 및 한일 시민사회 연대 등이 얘기가 자세하게 나온다. 한마디로, 간략한 재일동포 민주화 운동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핵심은 2부(반국가단체 만들기와 굳히기)와 4부(머나먼 명예 회복)다. 2부에서는 군사정권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한통련이 어떻게 반국가단체로 만들어지는가를 추적했다. 


사건은 발단은 '김정사 간첩 조작 사건'이었다.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은 민주화가 거셀 때마다 재일동포 유학생을 엮어 간첩사건을 조작하곤 했는데, 김정사(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건도 그중 하나다. 검찰은 당시 김정사씨를 기소하면서 공소장에 그가 "반국가단체인 재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간부 겸 대남 지도원인 임계성의 강연을 듣고"라는 대목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대법원까지 재판 내내 한민통이 어떤 강령을 가지고 있고 어떤 활동을 했는가 등은 전혀 따지지 않고, 즉 한민통이 왜  반국가단체인지는 전혀 따지지 않고 김씨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한민통, 즉 한통련은 김씨의 유죄 확정과 함께 덩달아 자동적으로 반국가단체가 됐다. 


김 전 기자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조작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추적한 결과, 이런 조작극을 중앙정보부가 주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1차 수사를 했던 보안사와 기소를 했던 검찰에서도 초기에 없던 대목이 중정이 개입하면서 끼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정보부에서 간첩 사건 등 공안 업무를 담당했던 대공수사국의 국장이었던 김기춘씨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찍는다.


다음은 김 전 기자의 추정이다.  "공안검사 김기춘-안경상-정경식 3인 사이에 어떤 논의가 오가고 어떻게 역할 분담이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처음에 보안사와 검찰조차 '사건이 안 된다'고 고민하던 김정사 사건을 이용한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만드는 과정에 이 세 사람이 깊이 연루돼 있음은 분명하다."(83쪽)


4부에서는, 왜 이런 엉터리 조작이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한통련 사건의 피해자(전두환 신군부 시절, 반국가단체인 한통련 수괴라는 이유로 사형 확정 판결)이기도 한 김대중 정권 때조차 풀리지 않았는지에 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


'한통련=반국가단체'는 어쨌든 대법원 확정 판결에 의해 최종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그것을 푸는 주체도 결국은 법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법원은 두 번이나 조작을 바로잡을 기회를 외면했다.


첫 번째는 2004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재심 때였다. 하지만 서울고법 제3형사부(신영철 재판관, 김태용, 박순관)는, 이 재심은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내란음모죄만 판단의 대상이라면서, 한통련 부분은 유무죄 판결을 하지 않고 면소 결정으로 피해 갔다.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자, 극우 논객인 조갑제씨는 "김대중씨가 1980년 봄에 내란을 선동했다는 부분은 무죄가 되었으나 그가 국가보안법 상의 반국가단체인 한민통에 가입한 사실은 무죄가 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즉, 김대중 전 대통령은 법적으로는 여전히 반국가단체의 수괴라고 주장한 것이다.


두 번째 기회는 2010년 김정사씨의 재심 때다. 이때도 서울고법 제8형사부(황한식 재판장, 황순교, 황의동)는 한통련 문제의 본질, 즉 반국가단체 여부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고 김씨에 대해 무죄만 선고했다. 


즉, 법원이 두 번이나 판단을 회피하는 바람에 아직도 '한통련=반국가단체'의 주술은 풀리지 않고 있다. 


이 문제는 1차 진실화해위원회에서도 다뤄졌고, 2차 진실화해위원회에도 안건이 올라와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이 바로 대법원 결정을 뒤집는 것은 아니지만, 재심에 큰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진실화해위는 정권의 성향에 따라 바람을 많이 탄다. 1기 위원회에서는 이명박 정권 때 표결이 이뤄져 이 사안에 대한 제안이 부결된 바 있다. 이명박 정권보다 훨씬 보수적인 윤석열 정권 때인 만큼 2기 위원회에서도 비슷한 경로를 밟을 가능성이 크다.


저자는 나가는 말에서 이렇게 절규한다.


"민주화된 한국 사회가 할 일은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에 애썼던 그들에게 독재자들이 씌운 오명을 벗겨주는 일이다. 정치적 또는 법적으로 굳이 규정한다면 이들은 반정부 활동가였을 뿐이다.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단체에 반국가단체라는 굴레를 씌워서 우리 사회가 추방한 것은 과도하고 명백한 잘못이지 않은가. 옛 시대의 그러한 과오가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도 이를 바로잡지 않는 것은 더더구나 사회정의가 아닐뿐더러 역사 화해에도 어긋난다."


한 사람이라도 더 저자의 절규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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