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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Oct 23. 2023

자타공인의 최고신문은 왜 그렇고 그런 신문이 됐나?

동아일보, 동아평전, 동아투위, 언론자유, 조선일보

세대를 나누는 방법이 여럿 있겠지만 <동아일보>를 기억하는 방식도 하나의 기준이 될 것이다. 동아일보를 '한국 최고의 신문'으로 기억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말이다.


요즘 엠지(MZ)세대의 젊은이들은 동아일보를 그저 그런 여러 신문들 중 하나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을 경험했거나 그 이전 세대에게  동아일보는 '다른 모든 신문들을 합친 것보다 더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적어도 1980년대 말 언저리까지 동아일보는 '언론계의 왕자'였다. 부수뿐 아니라 영향력에서도 다른 매체를 압도했다.


하지만 지금은 부수도 <조선일보>, <중앙일보>에 밀린 지 오래고, 영향력에서는 방송까지 포함해 10위권에서도 밀려났다는 조사가 연달아 나오고 있다. 제3자의 객관적인 눈으로 볼 때 사필귀정이지만, 당사자의 눈으로 볼 때 '굴욕'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동아 평전>(자유언론실천재단, 손석춘 지음, 2021년 3월)은,  이런 현상에 관한 분석까지 포함해 창간부터 지금까지 동아일보가 걸어온 공과의 길을 평전 형식으로 다뤘다. 자유언론실천재단이 <조선 평전>과 함께 두 신문의 창간 100주년을 계기로 두 신문의 족적을 반성적으로 돌아보자는 뜻에서 기획한 책의 하나다. 이 책도 <조선 평전>을 썼던 손석춘씨(전 동아일보 기자)가 집필했다.


동아일보도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뀌는 과정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태생이 조금 달랐다. 조선일보는 친일 기업인 단체인 대정친목회가 창간을 주도한 데 반해, 동아일보는 당시 호남 지주 김성수를 비롯해 친일 색채가 옅은 전국 각지의 유지가 창간에 참여했다. 따라서 동아일보에 대한 민중의 기대도 조선일보보다 훨씬 컸다.


동아일보는 창간사에서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 제창'의 세 가지 방침을 내걸고, 3.1운동 재판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창간 보름 만인 1920년 4월  15일 자에 '평양에서 만세 소요'라는 기사를 보도해 첫 '발매 반포 금지'의 행정처분을 받기도 했다. 창간 즈음의 이런 분투는 분명히 조선일보의 총독부 친화적인 자세와 달랐다.


하지만 이런 동아일보의 논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지주세력과 지식인들이 이끈 자치주의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민족신문'에서 '일본신문'으로 변질해 갔다. 첫 사례가 이광수 편집국장이 1924년 1월 2일부터 5회 연속으로 쓴 사설이다. 이 국장은 이 사설을 통해 참정권과 자치권을 주장했다. 나라 밖에서 독립투쟁을 하고 있는 움직임을 무시한 배신 행위였다.


이런 흐름은 일제의 만주, 중국 침략이 본격화한 30년대에 더욱 가속화했다. 사주인 김성수씨는 조선 학생의 학도병 참가를 지원을 독려하는 연설과 글을 쓰며, 적극적인 친일 부역에 나섰다.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6일 지면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씨 가슴의 일장기 말소 사진을 게재한 것을, 지금도 '민족지의 상징'으로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일장기 말소 사진 게재가 동아일보가 처음 한 것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일장기 말소 보도 사건의 당사자를 해사 행위자로 취급했다. 이 사건으로 내려진 무기 정간을 풀기 위해 이 사건에 관해 총독부에 사죄하고 사건 관련자를 해고했다는 사실을 내세운 것에서, 동아일보의 위선이 잘 드러난다.


역설적이게도 동아일보가 일제 강점기에 민족지라는 걸 부각할 때, 일침을 가한 것은 다름 아닌 조선일보였다. 1985년 창간 65년을 맞아 동아일보가 조선일보를 친일신문이었다고 비판하자, 조선일보가 '너희도 마찬가지였다'고 발끈한 것이다. 이런 양쪽의 공방은 오래가지 않았으나, 양 신문사의 부끄러운 과거가 이른바 '1985년 민족지 논쟁'을 통해 잠시 드러난 순간이었다.


동아일보는 또 일제 말기에 강제 폐간됐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를 민족지의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손씨는 이것은 폐간이 아니라 일제의 방침에 따른 신문사 통폐합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설명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면서 전시 물자 통제 차원에서 신문 통폐합을 실시했고, 이런 흐름에서 동아일보도 총독부 기관지로 통합됐다는 것이다. 일본의 신문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얘기다.


창간 때의 '옅은 친일' 성향에서 식민지 말에는 '완전 친일' 성향으로 바뀐 동아일보가, 야당지로 변신한 것은 해방 이후다. 해방 이후 동아일보는 이승만 정권과 사주 김성수씨가 알력을 빚으면서 한민당의 기관지이자 야당지로 자리 잡아갔다. 본격적으로는 4.19 혁명 이후 정통 야당지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통 야당지, '한국의 권위지'로 자리 잡기까지  나쁜 짓도 많이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5년 12월 27일 자의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허위 보도다. 이 허위 보도는 친탁-반탁 세력 사이에 맹렬한 대치를 불러일으키면서 결과적으로 민족 분단에까지 영향을 줬다. 또 이 신문은 해방 국면과 정부 수립 초기 농지 개혁 반대, 반민특위 해체 등을 적극 지지하며 한민당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했다.


 이 신문이 해방 이후 가장 빛나던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박정희 군사 정권에 맞서 싸운 것이고, 또 하나는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에 기여한 것이다.


박정희 군사 정권에 대항한 찬란한 역사는, 동아투위와 그들의 활동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동아일보의 반 박정희 투쟁은 전적으로 동아투위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동아일보는 일제시대 때 손기정 사건과 마찬가지로, '영광은 내가, 고통은 너희들이'라는 못된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자유언론실천운동으로 동아일보의 성가를 높인 기자들을 내쫓은 뒤 복직은커녕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마치 회사가  비판 보도의 주역인 양 행세를 하고 있다. 동아투위는 지금도 회사 밖에서 언론개혁과 언론자유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며, 한국 언론의 등대 노릇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또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를 시작으로, 전두환 독재 정권을 몰락의 길로 몰아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민주화 운동에 나선 시민들에게 동아일보는 경전과 같은 존재였다. 당시 동아일보의 보도 활동은 동아투위 선배들의 정신을 잇는 행위였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이후 친일과 기득권 세력의 대변지에서 벗어난 긍정적인 모습을 내차 버리고 쇠락의 길에 들어선다. 100년의 역사를 펼쳐놓고 보면, 60년대, 70년대 '신문 명가'로서 보여줬던 기개가 잠시 동안의 일탈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1990년대 들어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과 결탁해 성장한 조선일보가 '1등 신문'의 위치를 위협하자, 동아일보는 그들과 차별화가 아니라 동질화로 위기를 타개하려고 나섰다. 결국 이 길은 결국 1등의 고수가 아니라 2등, 3등, 아니 그 이하의 존재로 전락하는 길을 재촉했다.


저자인 손씨는 1991년 동아일보 기자로서 기자윤리강령을 정하기 위한 노사협상에 참가했던 일을 소개한다. 그 과정에서 회사대표로 나온 편집상무가 강령 문안에 '민중'이란 말은 '좌경화된 용어'이니 절대 쓸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손씨는 이것을 동아일보가 민중의 신문에서 기득권의 신문으로 가는 신호로 본다. 이와 함께 비슷한 시기에 회사가 원하는 자본 친화적인 노선이 아닌, 재벌과 권력 비판 노선을 추구한 김중배 편집국장을 임명 1년여 만에 경질한다. 이에 김중배 국장은 자본의 언론 지배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이임사를 내고 퇴직한다. 이른바 '김중배 선언'이다.


이후 동아일보는 별다른 내부의 저항 없이 친재벌, 친정권, 친 기득권,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치달았다. 자연스럽게 그동안 동아일보의 분투를 격려하며 지원해 왔던 독자들도 떨어져 나갔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손씨는, '나가는 말'에서 동아일보의 추락과 변신이 못내 아쉬운 듯 동아일보가 재생하려면 100년의 역사 안에 숨어 있는 비문들을 겸손하게 읽어보라고 청한다. 손씨는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1974년), 기자윤리강령과 '자본으로부터의 언론자유 선언'(1991년), 창간사(1920년)가 동아일보 100년 안에 숨어 있는 기념비라고 말한다. 그런 기념비에 쓰인 비문처럼만 한다면 동아일보의 "위상은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손씨도 실제로 그런 일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전직 사우로서 최소한의 충정과 예의를 표시한 인사치레였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동아일보는 60년~80년대의 누렸던 '신문 명가'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나갔다. 돌아올 수 있는 '탄성 한계치'를 넘었다. 1세에서 4세로 경영권이 내려오면서 점점 열화하는 경영진의 능력과 사고도 기대를 접게 만든다. 다만, 그 회사에서 일했던 일부 기자들이 회사 밖으로 나와, 화려했던 시절의 동아일보 정신을 구현하려고 애쓰는 것은 위안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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