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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Sep 09. 2024

서평 : 위기의 민주주의, 어떻게 구출할 수 있나?

"민주주의는 최악의 통치 형태다. 지금까지 시도됐던 다른 통치 형태를 모두 제외한다면." 노벨문학상 수상 경력이 있는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질의 말이다. 민주주의가 결점이 많은 제도지만 그래도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는 최선의 제도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최근 들어,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그것도 민주주의 제도가 가장 오래되고 공고하게 제도로 자리 잡은 미국에서부터 이런 소리가 공공연하게 흘러나온다. 시점은 민주주의의 전통 규범을 무시하고 폭군처럼 행동하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한 2016년부터다. 


한국에서도 '한국판 트럼프'라고 할 수 있는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이래 나날이 민주주의가 위축되고 파괴되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일을 하는 것 같지만, 내용적으로는 한국 사회가 피와 땀을 흘려 쌓아 놓은 민주주의 탑을 하나하나 뿌리에서부터 무너뜨리고 있다. 민주주의의 고갱이라는 할 수 있는 언론자유를 대하는 자세만 봐도 알 수 있다. 노골적으로 공영방송을 정권의 나팔수로 만들려 하고 있고, '신학림-김만배 녹취록' 사건에서 보듯이 윤석열 대통령에 비판적인 기사에 대해서는 차별적으로 가차 없이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반민주적인 작태를 보면, 한가하게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 위기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는 원인과 패턴은 비슷하다. 이런 것을 밝히고 대책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 학자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어크로스,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2018년 10월)는 미국의 하버드대학에서 민주주의의 붕괴를 주제로 연구해 온 저명한 정치학자 두 명이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을 계기로 모든 민주국가에 경고하는 뜻에서 쓴 책이다. 원제는 'How Democracies Die'다. 영어 제목이 더욱 강렬하다. 제목에서 지금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게 아니라 죽고 있다는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민주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두 학자는 이 책에서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다분한 극단주의 포퓰리스트들이 어떤 조건에서 선출되는지, 그리고 선출된 독재자들이 어떻게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를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를 들며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들은 냉전 기간 전 세계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죽음 가운데 75%가 쿠데타에 의한 것이었지만, 최근에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당선된 권력자들이 '민주주의 틀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내용물을 완전히 갉아먹는' 형태로 민주주의를 죽이는 일이 보편화했다고 말한다. 멀리는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근자에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가 그런 방식을 썼다.


저자들은 세계 각국에서 벌어진 사례 연구를 통해 어떤 조건에서 독재자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은지 판별할 수 있는 세 개의 리트머스 시험지를 개발했다. 첫 번째 시험지는 독재적인 위험인물이 등장했을 때 정치 지도자와 정당이 이런 인물이 당내 주류가 되지 못하도록 차단할 수 있는가다. 바로 트럼프의 등장이 주류 정치권의 방조, 야합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잠재적인 독재자가 권력을 잡은 뒤 그 지도자가 민주주의 제도를 전복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 제도가 그를 통제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셋째는 제도를 보완하는 민주주의 규범이 작동하는가이다.


이런 세 시험지를 돌파한 선출된 독재자는 "사법부를 비롯한 중립 기관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거나 '무기로 활용하고', 언론과 민간 영역을 매수하고, 정치 게임의 규칙을 바꿔서 경쟁자에게 불리하게 운동장을 기울인다." 저자들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의 시나리오에서 가장 비극적인 역설은 그가 민주주의 제도를 미묘하고 점진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합법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죽인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금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보다 더 잘 정리해 놓은 문장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저자들이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 규범이다. 많은 사람들이 헌법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하지만 헌법은 얼마든지 구멍이 있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돌아가고 오랫동안 이어지기 위해서는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헌법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미국 사회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온 기본적인 규범으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꼽았다.


상호 관용은 정당 또는 정치 지도자가 상대를 적이 아니라 경쟁 상대로 인정하는 것이고, 제도적 자제는 헌법이나 법률 상의 권리가 있더라도 그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를 말한다. 예를 들면, 대통령이 대법원 판사를 임명할 때 야당 상원이 불만이 있더라도 임명에 동의를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버락 오바마와 트럼프의 정권 교대 때 공화당 상원은 이런 관행을 무시하고 오바마의 신임 대법원 판사 임명을 끝내 반대했다.


저자들은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미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드레일 역할을 해왔는데, 1980·90년대 시작된 가드레일 침식이 2000년대 들어 가속화되면서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고 말했다. 위기가 트럼프 때 불거졌지만, 실은 훨씬 전부터 이런 침식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상호 관용과 자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작동하던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것은, 인종 차별에 의존했던 이런 규범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미국 민주주의의 규범은 (인종)차별에  근간을 두었다. 정치 공동체가 대부분 백인의 영역으로 제한되었던 동안 민주당과 공화당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존재했다. 정당은 서로의 존재를 위협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작된, 그리고 1964년 시민권법과 1965년 선거권법을 통해 가속화된 미국 사회의 인종 포섭의 과정은 마침내 미국을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화 흐름은 미국 사회를 양극화시켰고, 재건 시대 이후로 이어져 내려온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에 최고의 도전 과제를 안겨다 주었다."(182쪽)


미국이 형식적으로 인종 차별 없는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가 되면서 이념의 양극화와 종교의 극단화가 더욱 심해졌고, 민주-공화당의 사이도 적대적으로 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편향적인 미디어, 거액의 정치 헌금자들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정치적 양극화와 대결 분위기를 조장했다. 이렇게 정치 경쟁자가 적으로 변하면서 정치는 전쟁으로 전락했고 민주주의 제도는 무기로 바뀌면서 사회가 끊임없는 위기 속으로 들어갔다고, 그들은 진단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복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방식으로는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상대가 지저분하게 싸움을 걸어온다고 똑같이 대응하지 말고, 가능하면 의회와 법원, 선거를 통해 저항하고, 이념과 계급을 넘는 광범위한 저항 연합을 형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정치 양극화 해소를 위해 사회적 분열을 인정하고 엘리트 집단 간에 협력과 타협을 할 것을 주문한다. 특히, 미국은 형식적으로는 다인종 민주주의 사회가 됐는데 다인종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는 한 번도 실현된 바가 없다고 지적하며, 이것의 실현이 미국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라고 말했다.


그들이 제시하는 위기의 민주주의를 구하는 방법은, 트럼프와 윤석열 등 이른바 '스트롱맨'들이 자행하고 있는 악행을 바로잡기에 너무 약한 방안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들이 제시하는 방안은 세계 각국의 사례 연구를 통해 검증됐다는 점에서 무게와 의미가 있다. 그래서 냉정하게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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