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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KBS 민주화' 30년의 여정

<스튜디오와 광장 사이에서>, 양승동, 피디저널리즘

by 오태규

<한국방송(KBS)>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공영방송이다. 회사 형태가 그렇다는 거다. 그러나 공영방송이 사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는 방송을 뜻하는 것이라면, 윤석열 정권 아래의 KBS를 과연 공영방송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껍질은 공영일지 모르지만 속은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이 압도적이다.


겉(공영)과 속(정권의 나팔수)의 불일치, 아마 그것이 KBS에 대한 모든 불만과 갈등의 근원이리라. 또한 KBS 안의 양심적인 사원들이 극복하려고 하는 모순일 터이다.


KBS 역사를 돌아보면, 시민들은 KBS가 겉과 속을 일치하려고 노력할 때 박수와 신뢰를 보냈고, 겉과 속의 차이가 벌어질수록 외면하고 냉소를 보냈다.


윤 정권 아래서 KBS를 바라보는 시민의 눈길을 싸늘하다 못해 차갑다. 윤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방송 문외한인 술친구 박민 전 <문화일보> 기자(법조언론인클럽 회장 출신)를 사장으로 내리꽂았는데도 눈에 띄는 저항의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송 내용이 전두환 정권 때의 '땡전 방송'처럼 '땡윤 방송'으로 변하는 게 눈에 확연한데도 침묵이 반발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내부의 저항을 기대한 시민사회와 언론계는 실망했다. 다시 시청료 거부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2024년 초반부터 이런 KBS 안에서 서서히 저항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세월호 특집 방송을 차일피일 미루는 간부들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8.15특집에 이승만을 찬양·미화하는 기록영화를 내보내는 데 저항하는 움직임이 불거졌다. 너무 누르니까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안에 저항의 싹이 아예 없었다면 나타나기 힘든 일이었을 게다.


<스튜디오와 광장 사이에서-공영방송 KBS 민주화 30년>(나남, 양승동 지음, 2024년 12월)은 KBS 안에 '민주화 DNA'가 어떻게 심어지게 됐는지를 기록한 책이다. 지은이 양승동 씨는 1989년 2월 PD로 입사해, 2021년 12월 사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32년간 KBS 격동의 현장을 지켜 온 산증인이다.


그는 원래 사장에서 퇴직한 뒤 사장 재임 시절의 일을 정리한 책을 내려고 했다가 윤석열의 폭압적인 방송장악 때문에 책의 방향을 확 틀어 자신의 PD 시절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PD 시절이 'KBS 민주화' 30년의 역사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 얘기를 씀으로써 낙하산 사장이 왜 문제인지, 그리고 KBS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짚어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는 범위는 1987년 민주 항쟁부터 2018년 1월 고대영 사장이 해임될 때까지 대략 30년이다. 양 씨는 1989년 입사했기 때문에 앞의 2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가 몸소 겪은 생생한 체험의 기록이다. 체험에 더해 30년 동안 나왔던 노조의 노보와 각종 직능단체의 성명서 등 각종 기록이 그의 체험을 촘촘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KBS는 1987년 민주 항쟁부터 2016~17년 촛불항쟁까지 30여 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공영방송 구하기 투쟁' 역사가 있었다. 1차가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사원들이 과거 권력 추종의 부끄러움을 떨치고 PD협회를 비롯한 직능단체들과 노동조합을 결성화 내부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이다. 2차는 3당 합당으로 기세가 오른 노태우 정권이 서기원을 낙하산 사장으로 내려보내 KBS를 장악하려고 할 때 전 사원이 36일 동안 제작거부 투쟁을 한 '1990년 4월 투쟁'이다.


1990년대 10여 년 동안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민주적 방송법' 쟁취를 위한 연대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이 3차 투쟁, 2003년 노무현 정권이 사원들의 기대와 달리 서동구 씨를 낙하산으로 내려보내자 저지한 것이 4차 투쟁이다. 그리고 2008년 이명박 정권과 2013년 박근혜 정권의 방송 장악에 맞서 2016~17년 촛불 혁명 직후까지 10여 년 동안 진행한 싸움이 5차 공영방송 구하기 투쟁이다.


물론 30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공영방송 구하기 투쟁이 모두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양 씨는 비록 실패한 싸움이 있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KBS 사원들의 마음속에 공영방송 지키기가 중요하다는 DNA가 심어져왔다고 평가한다. 서기원 낙하산 사장 몰아내기를 위해 벌인 1990년 4월 투쟁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부당한 권력의 개입에 저항한다는 DNA가 이때 만들어진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홍두표(1993~1998), 박권상(1998~2003) 사장 시대를 KBS 1차 전성기라고 본다. 1997년 노동법 파업 사태로 방송이 잠시 차질을 빚기도 했지만, 수신료 제도 개선(홍두표 사장 때 전기료와 통합 징수 실현) 이후 재원 구조가 탄탄해지면서 제작비에 대한 투자가 늘고, 그 결과 공익성과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이 줄지어 나왔다는 것이다.


2차 전성기는 정연주 사장(2003~2008) 시대다. 정 사장이 제작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뉴스, 시사·교양·다큐, 드라마, 예능, 라디오까지 모든 장르에서 활력이 넘쳤다고 그는 말했다. 이 시기에 성역 시 돼왔던 현대사 등의 영역에서도 도전적인 프로그램이 도입됐다. <미디어포커스>, <시사기획 쌈>, <한국사회를 말한다>, <인물 현대사> 등이다. 이때 처음으로 KBS 신뢰도도 처음으로 1위를 기록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인물현대사>(리영희, 문익환 편 등)를 제작했는데, "돌이켜 보면 PD로서 나의 황금기"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정연주 사장 때 자율성을 바탕으로 이뤘던 전성기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꺼번에 무너졌다. 밖에서는 정권이, 안에서는 수요회 등 반 정연주 세력이 힘을 합쳐 정연주 유산을 파괴했다. KBS 내부도 정연주 몰아내기를 계기로 갈라졌고, 이때 정연주 몰아내기를 비호한 노조에 맞서 사원행동(이후 새노조)이 탄생했다. 그는 사원행동의 공동대표로 활약했다.


사원행동, 새노조로 이어지는 KBS 안의 공영방송 구하기 세력은 이명박, 박근혜 양 정권에서 자행되는 방송 장악에 줄곧 가열하게 싸웠고, 이런 노력이 2017년 문재인 정권의 탄생을 맞아 결실을 맺었다. 그는 이 길고 지루한 공영방송 구하기 싸움 끝에 2018년 4월 제23대 사장에 취임했다. 그것도 낙하산이 아니라 사장 선임에 시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시민자문단' 제도 도입에 따른 사장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2022년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공영방송을 지키려는 세력을 탄압했고 부역세력이 기승을 부렸다. 연이은 낙하산 사장 박민-박장범이 그 대표 사례다. 이를 두고 그는 "KBS의 민주화 여정 30년, 그리고 공영방송 정상화 5년 그 후, KBS는 다시 칼바람 이는 혹한기를 겪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다음과 같이 희망적인 전망을 했다.


"지금 KBS는 무성했던 잎사귀를 떨구게 된 나목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조만간 다시 잎으로 튀우고 꽃을 피울 것으로 믿는다. KBS의 뿌리가 건강하기 때문이다. 설립 초창기인 980년대 후반의 PD협회·기자협회 등 직능단체들과 노동조합, 2008년의 사원행동, 그리고 2010년 이후의 새노조가 만들어 온 'KBS 민주화 30년'의 역사가 바로 그 곧고 단단하게 뻗어 있는 뿌리이자 자양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잘 몰랐던 KBS 내부의 민주화 노력을 많이 알게 됐다. 그래서 그의 낙관적인 전망이 '희망 고문'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그동안 축적된 KBS의 민주화 DNA가 하루빨리 작동해 나목에 잎을 튀우고 꽃을 피우게 되길 고대한다. 내란 사태에 대한 보도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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