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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일본의 목표는 '1905년 체제'의 강화

극동 1905년 체제, 일본의 안전보장, 한일 안보협력

by 오태규

윤석열 정권이 집권 이후 대외적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본과 화해였다. 점잖게 표현해 '화해'지 일본 추종-대일 종속의 굴종 정책이었다.

그게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일본의 전범 기업으로 하여금 강제노동 피해자들에 정신적 위로금을 지급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일본 전범 기업은 가만히 있고 한국 정부가 대신 갚겠다는 '제3자 변제'를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한일 정부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격하게 접근했다. 그동안 역사 갈등 때문에 금단의 영역에 있던 안보 협력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한일관계뿐 아니다. 사실상 한미일 군사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내달렸다. 2023년 8월 캠프데이비드 3국 정상회담과 거기서 나온 캠프데이비드 선언이 그 산물이다.

그러면 윤석열 대통령은 왜 국민(역사 인식)을 저버리고 일본과 관계 개선을 그렇게 서둘렀을까? 그는 문재인 정권이 한일 역사 갈등을 국내 정치에 이용했다고 한일관계를 망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맞지 않는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 한일 역사 갈등을 국내 정치에 이용한 쪽은 문 정권보다 아베 신조 정권이 훨씬 심했다.

윤 정권이 처음부터 친일에 그렇게 목을 맸던 배경은 아직도 정확하게 규명된 바 없다. 하지만 그 의도를 짐작하게 하는 책을 최근 읽었다. 바로 <전후 일본의 안전보장-일미동맹, 헌법 9조에서 NSC까지>(중공신서, 치지와 야스아키 지음, 2022년 5월)라는 책이다. 저자인 치지와는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주임연구관으로 미일동맹을 비롯한 일본의 안보 문제 전문가다.

그는 이 책에서 '극동 1905년 체제'를 수없이 강조한다.


"20세기 초반 이래, 극동의 지역질서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패권국인 중국이 약체, 혹은 자제적이었던 것을 전제로, 일본과 일본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한반도(적어도 남한), 대만이 파워의 연결을 동일 진영으로 관계가 유지됐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역질서를 이 책에서는 '극동 1905년 체제'라고 부른다."(5쪽)

그는 1905년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인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돼 이런 극동 지역질서가 국제적으로 승인되어 확정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1905년 체제가 계속 유지되고 강화되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주장을 전개해 간다.

나는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 지배를 인정한 대법원 판결을 뒤집을 때만 해도,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법이었는지 불법이었는지 애매하게 처리한 1965년 한일협정(1965년 체제) 수준으로 한일관계가 역행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책을 보면 윤 대통령은 더 멀리 '1905년 체제'로 돌아가는 걸 꿈꾼 것 같다.

저자는 미일동맹 체제는, 그동안 일본이 주도했던 '극동 1905년 체제'를 미국이 대신 끌고 가는 구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토대가 되는 것이 미국이 일본, 한국과 각자 맺고 있는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이라는 얘기다. 그는 미일동맹은 단순한 미국과 2국간 기지동맹을 넘어 일본의 기지를 미국에 빌려주는 것을 통해 미국과 일본, 한국을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미일·한일동맹'이라는 안전보장 시스템의 한 기능이라고 강조한다.

이 대목과 윤 정권 들어 한일, 한미일 사이에 이뤄진 안보 협력 강화의 내용을 보면, 윤 정권이 저자의 인식과 일맥상통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적어도,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고 말하고 한반도에 전쟁 발발 시 일본의 자위대가 한국 땅에 들어오는 게 좋다고 주장하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보면, 일본의 전략적인 목표는 미국의 압도적인 힘에 빌붙으면서 한국을 그 틀에 끌어넣은 뒤 '극동 1905년 체제'의 혜택을 계속 누리겠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도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1905년 체제가 한국의 국익이고 추구해야 할 목표인지는 의문이다. 이런 논의는 국가의 운명이 달린 것이기 때문에 어느 개인이 멋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공론장에서 치열한 논쟁을 거쳐 의견을 모아 결정해야 하는 중대 사안이다. 내가 보기엔, 윤석열의 외교안보팀은 일본, 미국의 이런 의도를 읽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이런 일본의 논리를 추종하는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극동 1905년 체제는 한국이 자주독립국의 위상을 지키는 데 큰 제약이 될 것이라고 나는 본다. 1905년 당시 한국(조선)은 일본의 이익을 지켜주는 변방(이익선)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많은 걸 설명해 준다.

나는 당장은 어렵더라도 중장기적으로는 이런 체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전략적 자율성'을 발휘하는 국가가 되는 게 한국의 국익에 맞다고 본다. 저자의 뜻대로 극동 1905년 체제에 안주하는 것은 미국과 일본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 채 그들의 종노릇만 해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모두 5장으로 돼 있다. 각 장마다 '미일안보조약', '헌법 제9조', '방위대강', '가이드라인'을 다루고 있다. 일본의 안보정책의 세세한 변천 과정을 알고 싶은 사람은 구해 읽어 볼 만하다. 아직 한국에서 번역 출판되지 않은 게 흠이다.

이 책의 주장은 비교적 간단하다. 최근 들어 중국의 대두, 미국 힘의 쇠퇴, 러시아의 폭주 등 일본을 둘러싼 안보환경이 매우 어려워졌으니, 일본의 안보와 관련한 모든 방향을 미일동맹 중심, 더 나아가 한국까지 끌어들여 '극동 1905년 체제'를 지키고 강화하는 데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이 거기에 무턱대고 동조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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