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외교의 길, 외교관, 한미동맹, 종속외교
나는 언론인이다. 하지만 다른 언론인들과 좀 색다른 경험이 있다. 2018년 4월부터 2021년 6월까지 해외 공관장(오사카 총영사, 2018~2021)을 재냈다. 그래서 가끔 자기소개를 할 기회가 있는 경우 '공관장 경험이 있는 언론인'이라고 소개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한국 외교관 출신들이 쓴 책이 있으면 가급적 읽어보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때마다 실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관을 지낸 사람들이 쓴 회고록은 외교정책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 맥락 없이 개인 업적을 자랑하는 신변잡기에 불과한 게 대다수다. 장관급이 아닌 외교관이 쓴 것이라고 해도 자기중심으로 옛일을 추억하는 것이 주류다.
왜 한국 외교관 중에는 일본의 마고사키 우케루, 사토 마사루같이 자국 외교를 비판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없을까? 마고사키는 우즈베키스탄 대사, 외무성 국제정보국장, 이란 대사를 지낸 사람으로, 미국에 대든 일본 총리는 모두 미국에 쫓겨났다는 내용의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라는 책을 썼다. 외무성 러시아 담당 정보분석관 출신의 사토 마사루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이 러시아와 분쟁 중인 북방 4섬 정책을 바꾸면서 정책 변화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검찰을 동원해 쳐내는 내용의 <국가의 덫>(한국어 미 번역)이란 역작을 냈다.
이들은 지금도 활발하게 언론·출판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 외교가 대미 추종 일변도인 것 같지만, 이들 책을 보면 일본 외무성 안에는 그래도 주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단아들이 일정 정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명품외교의 길>(진인진, 이창천 지음, 2025년 3월)은 이제까지 한국 외교관들이 쓴 신변잡기류의 책과 전혀 다르다. 일본의 마고사키와 사토의 책에 버금가는, 한국 외교 본격 비판서다. 저자 이창천은 가명이다. 저자 소개를 읽어 보면, 그는 1985년 외무부에 입사해 2018년 퇴직 때까지 33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다. 2014년부터 2년간 앙골라 대사를 지냈고, 미국, 베트남, 프랑스, 키르기스스탄, 이스라엘 등에서 근무했다. 내용이 신랄하고 책 안에 고위직의 경우 실명이 그대로 나오는 점을 감안해 가명을 택한 듯하다.
책의 부제가 '좌파 외교관이 보는 한국 외교'라고 돼 있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책 전체가 한국 외교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 차 있다. 우선 그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외교가 있느냐 고 묻는다. 외교는 주권을 가지고 있는 독립 국가의 주권 행위인데, 한국은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합의의사록에 의해 미국의 속국 또는 식민지라고 할 수 있어도 독립적인 주권 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겉은 상호 합의에 의한 조약이라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실질은 미국의 식민지, 속국이라고 말한다.
이런 한계 때문에 한국은 외교가 아니라 외교 비슷한 것, 유사 외교를 하고 있는 셈이라는 얘기다.
그는 이런 미국을 주인으로 섬기는 한국의 유사 외교는 정도의 차이는 보수, 진보 정권이라고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특히, 그중에서 윤석열 정권은 어떤 정권도 넘볼 수 없는 '대미 추종 외교의 본좌'라고 평했다. 윤석열이 2023년 4월 미국 국빈 방문에서 역대급 환대를 받은 것은, 그들이 내준 3대 숙제를 신속하고 완벽하게 해결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한일 역사 문제 해결,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 중국의 대만 문제 비판이 그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잘못 꿰어진 미국 속국 외교가 미국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러시아 외교에도 짙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그동안 벌어졌던 외교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중국의 반발을 무시하고 사드를 배치한 것, 우크라이나와 전쟁하는 러시아를 필요 이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 등이다.
그는 1980~90년 대에 한국이 북방 정책을 하고 프랑스의 무기 도입을 하는 등 미국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일이 있었지만 이런 것은 당시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크게 갈등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외교가 주제넘게 중동, 아프리카의 국가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들 나라가 미국의 똘마니 노릇을 하는 한국 외교를 우습게 본다고 말한다. 또 그들이 남북 분단과 대결 외교를 역으로 활용해, 한국으로부터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사실도 까발린다.
그는 최근 한국 외교관들이 여기저기서 케이 팝을 홍보하는 외교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한국 고유의 문화가 아니라 미국의 변형 문화라는 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는 대중문화는 민간 영역에 맡기고 정부는 한국의 고전 예술이나 문화를 알리는 게 더욱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나도 오사카 총영사로 있으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가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은 대미 종속, 대미 추종의 한국 외교의 구조만이 아니다. 그 속에서 일하는 외교관들에 관한 비판이 더 신랄하다.
그는 제대로 된 외교관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자질은 사명의식, 도전정신, 상상력인데 이런 것을 다 구비한 한국 외교관은 한 명도 없다고 말한다. 또 이른바 '쥐 세 마리' , 날리쥐(knowledge), 커리쥐(courage), 랭귀쥐( language)가 외교관이 갖춰야 할 기본기인데 이것도 구비한 외교관이 한 명도 없다고 단언한다. 그냥 말뿐이 아니다. 그가 겪은 실례를 실명과 가명을 동원해 제시한다. 읽으면 한국 외교관이 이 정도인가 하고 얼굴이 화끈해지는 장면이 수두룩하다.
그는 한국 외교관들의 정체를 8가지로 폭로한다. 첫째, 공무원 의식이 없다. 둘째,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안 한다. 셋째, 봉사 의식이 없다. 넷째, 유일한 관심사는 인사다. 다섯째,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줄서기와 줄 만들기에 능하다. 여섯째, 실력이 부족하다. 일곱째, 거짓말이 상습화되어 있다. 여덟째, 밥 먹는 예산을 사적으로 활용한다. 과연 외교부(저자는 한국에는 외교가 없다는 의미로 외교부가 아니라 '외무부'라고 쓴다)가 필요한 조직인지 되묻게 되는 내용이다.
그는 한국 외교를 찾는 가장 근본적인 해법은 미국의 속국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그런 것을 기다리면서 외무부를 갈아엎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77년 동안 썩어온 조직 외무부는 댕강 잘라버리고 새로운 언어와 생각과 용기가 넘치는 미래의 진정한 외교부를 다시 탄생시키는 일"(556쪽)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 외교를 중앙아시아의 만쿠르트 전설을 인용해 설명한다. 정복한 땅의 어린 소년 머리에 낙타 유방 가죽으로 만든 축축한 모자를 씌우는데, 이것이 시간이 가면서 점차 오그라들며 아이의 머리를 압박한다. 아이는 영혼을 빼앗기고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개처럼 밥만 기다리는 노예가 된다.
그는 한국 외교가 미국이 씌워놓은 만쿠르트와 같다고 말한다. 그런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지려면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다는 걸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 책을 "제대로 된 한국 그리고 제대로 된 우리나라의 외교를 보고 싶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한숨을 쉬는 좌파 전직 외교관의 슬픈 이야기였다"라는 말로 맺었다. 6백 쪽이 넘는 책이지만, 작가의 거침없는 글이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한국 외교의 문제점을 알고 싶은 사람은 읽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