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일정책을 보면, 대한정책이 보인다.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마고사키 우케루, 미일동맹

by 오태규

미국은 일본을 마치 속국처럼 다룬다. 엄연한 주권국가이고, 경제력이 세계 3위를 자랑하는 강대국인데 이게 말이 될 법한 소리인가?

일본 총리 중에서 미국의 의도를 거스르는 사람은 영락 없이 제거되고, 미국의 의도를 잘 수행하는 총리는 장수한다. 당장 음모론이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증거가 있느냐?'라고 따지는 소리도 나올 듯하다. 그러나 음모론이 아니다. 나름 튼튼한 증거도 있다.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일본의 사례, 1945-2012년>(메디치, 마고사키 우케루 지음, 양기호 옮김, 문정인 해제, 2017년 10월)가 그런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인 마고사키는 일본 외무성에서 36년간 근무한 외교 전문 관료 출신이다. 러시아와 이라크 등 세계 외교의 뜨거운 현장에서 근무했고, 우즈베키스탄 대사, 외무성 국제정보국장, 이란 대사를 지낸 베테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전후 일본 외교를 움직이는 최대의 원동력은 미국의 대일 압력과 이에 대한 일본 내 자주파와 미국 추종파 간의 갈등이라고 말한다. 그는 쉽게 말하면 전자, 즉 자주파다. 따라서 그는 이 책을 "힘센 미국에 맞서 어떻게 일본 고유의 가치를 지켜갈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썼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의 전후 대미 외교를 틀 지은 것은, 1945년부터 6년간 실시된 미 점령 정책과 1951년 체결된 미일 방위조약이다.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미일 주둔군지위협정이다. 이것을 한국에 대입하면, 한국의 대미 외교를 규정하는 것은 한미방위조약과 한미주둔군지위협정(소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책을 읽다 깨닫게 되지만, 미국의 대일정책은 미국의 대한 정책의 확대판, 미국의 대한 정책은 미국의 대일정책의 축소판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그만큼 이 책은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미국의 대한 정책과 한국의 대미 외교를 돌아보게 한다.

미일 방위조약은, 조약 쳬결 전에 "미국이 원하는 만큼의 군대를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기간만큼 주둔시킬 권리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고 한 존 포스터 달레스 당시 국무부 특별고문의 말을 구현한 문서에 불과하다. 그리고 70년 이상이 지났지만 그 구도에서 미일관계는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간혹 그에 저항해 자주를 강조하는 지도자가 등장하면 미국과 갈등이 일어나고 결국에 미국에 의해 제거됐다는 게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그는 일본이 자주 외교를 시도할 때 미국이 반대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일본이 미군 기지를 축소하려고 할 때이고 또 하나는 미국보다 먼저 중국과 관계를 강화하려고 할 때라고 말한다. 일본 정치가가 미군 기지를 축소하려고 하거나 중국 관계를 개선하려고 할 때, 직접 미국이 나서 반대하는 게 아니다. 일본 안에 있는 친미 인사들, 즉 정계, 관계, 재계, 언론계 등에 포진하고 있는 미국 추종 그룹이 조직적으로 나서 그런 정치가를 배척하고 끌어내린다.

그는 전후 총리와 외상들을 세 부류로 분류했다. 첫째 그룹이 자주노선 파다. 시게미쓰 마모루(일본의 항복 직후 군사 식민지 정책에 반대, 미군 완전 철수를 주장), 이시바시 단잔(패전 직후 엄청난 미군 경비 삭감 요구), 기시 노부스케(지나친 미국 종속적 안보조약 개정), 하토야마 이치로(대미 자주노선 주창, 소련과 국교 회복), 사토 에이사쿠(오키나와 기지 반환 요구), 다나카 가쿠에이(미국에 앞서 중국과 국교정상화 실현), 후쿠다 다케오(아세안 외교 추진 등 미국 일변도 외교 탈피), 미야자와 기이치(클린턴 때 대등 외교 견지), 호소카와 모리히로(미일 동맹보다 다각적 안전보장 중시), 하토야마 유키오(후텐마 기지 오키나와현 외 이전 주장, 동아시아 공동체 제창)가 자주파에 들어간다.

둘째 부류가 대미 추종파다. 대미 추종파의 원조이자 본진은 안보와 경제 양면에서 대미 추종 노선을 취한 요시다 시게루가 첫 손에 꼽힌다. 다음으로 이케다 하야토(안보투쟁 이래 안전보장 문제 봉인, 경제에만 집중), 미키 다케오(미국이 싫어하는 다나카 가쿠에이 끌어내리기), 나카소네 야스히로(일본 불침항모 주장, 플라자합의), 고이즈미 준이치로(자위대의 해외파병, 미국식 신자유주의 도입)가 뒤를 잇는다. 이 밖에도 가이후 도시키,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히로, 아베 신조, 아소 다로,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가 이 그룹으로 분류된다.

셋째가 일부 저항파다. 스즈키 젠코는 미국의 방위비 증액을 거부했고, 다케시타 노보루는 글로벌 차원의 자위대 협력을 거절했다. 하시모토 류타로는 경제적으로 미국과 대립했고, 후쿠다 야스오는 2007년 금융위기 때 미국 금융회사에 융자를 거부했다.

이 분류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장기 집권한 요시다 시게루, 이케다 하야토,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는 모두 대미 추종파였다. 그나마 1990년 대 이후로는 자민당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은 두 명(호소카와, 하토야마)을 제외하고는 자주파가 전멸이다.

저자는 이런 사례를 들며 "일본 사회에 대미 자주파의 총리를 끌어내려 대미 추종파로 바꾸려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라고 고발한다. 그것을 일본에서 실행하는 첫 번째 세력이 일본 검찰이고, 다음이 언론이라고 지목한다. 또 미국이 길러낸 외무성, 방위성, 재무성, 대학의 친미 인재들이 가담한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이 자주파 정치인을 제거하는 패턴을 6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점령군의 지시로 공직 추방(하토야마 이치로, 이시바시 단잔), 둘째 검찰이 기소하고 언론이 대대적 보도로 정치생명 박탈(아시다 히토시, 다나카 가쿠에이, 오자와 이치로), 셋째 정권 안의 핵심 인물 제거 위한 내각 붕괴(가타야마 데쓰, 호소카와 모리히로), 넷째 미국이 지지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면서 당내 반대세력을 강화(하토야마 유키오, 후쿠다 야스오), 다섯째 선거에 패배(미야자와 기이치), 여섯째 대중 동원 붕괴(기시 노부스케)다.

저자는 "이상 여섯 가지 패턴 모두 주요 언론과 연동하여 강력한 반대 캠페인을 벌인 경우"라면서 "전후 70년 역사를 돌아보니, 언론이 일본의 정변이 깊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미국은 달갑지 않은 일본 총리를 몇 개의 시스템을 구동하여 제거할 수 있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이 일본 총리를 잘 만나주지 않고 주요 언론이 문제 삼을 경우 그것만으로도 정권 유지가 어려워지는 게 일본의 현실"이라고 개탄했다.

한국은 어떤가? 아마 미국의 눈밖에 나 제거된 가장 확실한 사례는 박정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로부터 '디스 맨'이라는 무례를 당한 것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반미라고 비판받은 것도 비슷한 사례일 것이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일본에 비해 압도적으로 친미 일변도 정책을 취했다. 그러니 당할 일도 적었겠지만, 오히려 별거 아닌 것으로도 더욱 큰 화를 입었을 거라는 논리도 성립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일본의 전후 외교사를 이념이 아니라 자주와 친미 추종의 대립을 축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재미있다. 비슷한 구도 아래 있는 한국에도 많은 시시점을 준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음모론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하려는 듯, 정부 문서와 각 인물의 자서전, 증언, 비화, 언론 보도 등 풍부한 사료를 동원했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 대목에 캐나다의 피어슨 총리의 사례를 들며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어슨은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을 감행했을 때 바로 반대 연설을 했고, 다음 날 존슨 미 대통령에게 멱살을 잡히는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캐나다는 그것을 수모로 생각하지 않고 자주적인 주장을 한 용기로 기린다. 그래서 캐나다 외무부 청사 이름을 피어슨 빌딩으로 칭하고, 토론토에 있는 최대 국제공항을 피어슨 국제공항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른 여기에는 이런 메시지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과 대립해 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의연하게 살아가자. 가끔은 불행해질 수도 있지만 모두 힘을 합쳐서 극복하자."

이재명 대통령 시대가 되자마자, 벌써 정계와 언론계 일각에서 미국을 팔아 공격에 나서는 움직임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 책이 그런 움직임에 대한 예방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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