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벨 work & life balance
'어떤 사람이 제일 부럽습니까?'라는 질문에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지금 나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자신만의 취미가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매우 평범한 질문이지만 대답은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다.
'부러운 사람'이라 함은 지금 나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다. 나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 '취미'이다.
솔직히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변변한 취미라고 할 것이 없었다. 또래 친구들이 한창 우표수집에 열을 올렸던 것이 기억난다. 나도 친구 따라 잠시 우표집을 사고 우표를 모으기는 했지만 몇 장 채우지 못하고 포기했다.
한때 즐겼던 만화책 읽기는 취미 범주에 넣지 않는다.
tv 시청, 노래방, 웹서핑, 게임 등과 마찬가지로 유휴시간을 보내는 '놀이'정도로 분류한다.
내가 좋아해서 특별한 노력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고 그 결과 남들보다 그 일에 능숙해져 있는 상황이라면 취미라 할 만하겠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취미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는 답이 궁색하여 곤혹스럽다.
왜 나는 지금껏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을까?
그 이유를 최근에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목적 지향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자면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꿈을 이루어내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나의 꿈은 주위의 짐작대로 '아나운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꿈은 '우리나라 최고의 진행자가 되는 것'이었다.
KBS 신입사원 공채시험의 마지막 관문인 경영진 면접에서 했던 말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꿈이다.
'40대에 가장 빛나는 진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당시 여자 아나운서는 40대는커녕 30대 중반만 되어도 방송 자리가 없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나름 도전적인 포부였다. 당시 23세의 나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정도의 경력은 쌓아야 오프라 윈프리 같은 최고의 진행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나운서가 되는 것과 최고의 진행자가 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다.
최고의 진행자가 되기 위해서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갖는 것은 여러 갈래 길 가운데 하나이다.
시사평론가, 개그맨, 전문가 출신의 방송 진행자가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것이다.
나는 몇 갈래 길 가운데 아나운서가 되어 최고의 진행자에 이르는 길을 선택했다.
1년에 많아야 2~3명 뽑는 아나운서 공채 시험에 합격하려면 몇백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고난도의 통과의례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대학시절은 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준비와 노력의 시간이었다.
입사 재수 끝에 아나운서가 되고 난 후 나는 비로소 나의 꿈에 다가가기 위한 출발선에 섰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나의 관심은 지금 당장 멋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진행자로서의 역량을 키울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하루하루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매일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꿈에 다가갔다. 마침내 마흔이 된 나는 어느덧 꿈에 가까워져 있었다.
여기에서 끝나는 이야기라면 이 글을 쓸 이유가 없다.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목표지향적으로 살았던 삶을 되돌아보면서 놓치고 살았던 것들을 후회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해 위해 생략했던 '관심사', 필수적인 것이 아니어서 낭비라고 생각했던 '시간', 과거에 대한 추억이나 향수로 기억될 '관계'를 흘려보낸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간절한 바람으로 노력하면 목표에 닿을 수 있다는 긍정적 메시지를 던지는 말이다.
한 번에 쉽게 얻은 것은 없어도 도전해서 얻지 못한 것도 없었던 삶의 경험 탓에 나는 이 믿음에 매우 충실했다.
그러던 나의 믿음의 신화가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다.
120%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었고 실력이 있어도 도달할 수 없었다.
아마 노력이 부족했을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
나는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 이상 최선을 다할 수 없다.
오히려 능력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의 100%를 다하지 말고 90%만 쏟아붓고 10%의 여유를 가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님의 말씀에 크게 공감하고 있다.
10%의 여유를 가짐으로써 세상의 이치와 순리를 살피고 나의 방향을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했으나 이제 '진인사 대천명(盡人事而待天命)' 이야말로 내 삶의 지표가 되었다.
큰 파도를 넘는 서퍼는 파도에 맞서 용감하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타고 넘는다. 때를 가려 일의 강약을 조절해야 한다. 세상 사는 일에 독립변수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일은 수많은 사건의 종속변수이다. 나의 노력과 실력의 결과라고 자부했던 모든 일들이 돌이켜 생각하면 곳곳에 귀인이 있어 나를 도왔고 운도 따랐기 때문 아니었던가?
여전히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꿈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고 운도 따라야 꿈이 이루어진다.
그러니 운이 나쁘면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꿈을 이루지 못하고 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내 인생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그제야 꿈을 이뤄낸 '미래의 나'가 아닌 '지금 존재하는 나'와 대면할 수 있었다.
꿈을 이룬 '미래의 나'는 큰 바다를 유유히 항해하는 커다란 범선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배의 가장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초라한 노동자처럼 느껴졌다.
꿈꾸는 배가 크고 화려할수록 지금 이 순간의 노동 강도는 올라가는 것이다.
꿈을 향해 달려가느라 나 자신을 너무 돌보지 않고 채찍질만 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자문해보았다.
지쳐있는 ‘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차를 가까이하게 된 것이....
물을 정성껏 끓이고
기분에 맞는 차를 선택하고
차에 맞는 주전자를 준비하고
찻잔을 미리 데운다.
찻잎에 물을 붓고 잠시 기다린다.
잘 우러난 차를 작은 찻잔에 따른다.
향을 맡고 온기를 느끼며 입안에 조금 머금었다 넘기면 향기로운 이슬이 나를 적시는 듯한다.
주전자에 윤을 내고 보듬어 주는 행동은 내 마음을 닦아내고 윤을 내는 의식이다.
무의미한 행동, 지루한 시간, 불필요한 도구들로 소꿉놀이를 하며
오롯이 나를 위한 충만한 시간을 만끽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넘어설 수는 없음을
접을 때와 펼 때가 있음을
변화해야 성장함을
내려놓아야 얻을 수 있음을
실패도 내 삶의 빛나는 일부임을
덕분에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음을
결국 노력은 헛되지 않음을
인생은 진정 새옹지마임을….
내가 잘 나가던 주춤하던, 성공했건 실패했건 내 삶은 자체로 소중하다.
내가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인지가 내 삶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생명의 본질은 들숨과 날숨에 있고 숨 쉬는 매 순간이 소중하다.
그래서 인류의 스승들은 명상을 하면서 오직 호흡에 집중하라고 강조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취미는 무엇입니까?
이 흔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당신이라면
당장 당신만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여야 한다.
좋은 인맥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당신 자신과의 관계에 소홀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기를 권한다.
지쳐있는 당신을 보듬어주고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내기 위한 시도를 해보시라.
그러면 어느 순간 취향이 생기고 취미가 생길 것이다.
한창 이 글을 쓰느라 열중하고 있는데 딸아이가 선유도로 산책 가자고 한다.
예전 같으면 이 글을 마무리하는 쪽을 선택했을 테지만 바로 접고 일어났다.
지금 사랑하는 딸과 선유도를 산책하는 것이야말로 놓쳐서는 안 될 행복한 순간 아니겠는가?
KBS 아나운서 오유경
전 KBSKWAVE편집인/ KBSAVE 대표
https://www.facebook.com/yu.oh.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