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리지'는 1892년 미국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여러 정황 증거가 피해자의 막내딸 리지 보든을 범인으로 가리켰지만, 물질적 증거가 없어 무죄 판명이 났다. 영미권에서는 유명한 사건으로, 많은 영화, 노래, 소설, 뮤지컬 등의 소재로 쓰이고 있다.
여성 배우 4명으로만 이루어진 락 뮤지컬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공연을 보기 전부터 기대했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았던 배우들의 연기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전반적인 연출에는 아쉬운 점이 많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는 배우들의 에너지가 감사할 따름이다.
*이어지는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리지'의 주인공인 '리지 보든'은 극 중 살인을 저지른다. 그것도 친아버지와 양어머니를 도끼로 내려찍어 죽이는 패륜적이고 끔찍한 살인이다. 그러나 증거품을 태우고, 값비싼 변호인단을 선임하여 결국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다. 리지는 살인자이지만, 극을 보는 내내 관객들은 리지를 응원하게 된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여성 주인공과, 그 캐릭터에 감정 이입을 하는 관객들이라니. 이제껏 남성 캐릭터에게만 주어지던 특권 아니었나. 이해되지 않는 살인이라도 온갖 서사를 부여하거나, 매력적인 살인마라고 추앙받는 남성 캐릭터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사실 리지에게 주어진 서사는 여성이라면, 아니 인간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성폭행한 아버지, 막내딸인 자신이 아들이었어야 했다고 말하던 아버지, 돈이 많았으나 자신을 가난하게 키운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새어머니. 성폭행 하나로도 그 머리를 도끼로 깨부순 것이 이해가 된다. 속이 시원할 정도다. 그래서 많은 관객들이 리지가 살인을 저지르는 1막의 마지막 넘버, 'Somebody Will Do Something'에 환호한다. 나 역시 그 넘버를 가장 좋아하고, 그 장면을 보는 순간의 쾌감이 엄청나다.
리지의 감정선을 계속 따라가며 2막의 재판 장면에서는 그의 무죄 판결을 응원하게 되고, 마침내 자유로워진 그가 하얀 날개를 단 천사처럼 하얗고 반짝이는 옷을 입고 마지막 넘버 'Into Your Wildest Dream'을 부를 때면, 그 해방감이 나에게까지 와 닿아 감격스러울 정도다.
이토록 살인을 지지받는, 미혼에, 레즈비언, 20대가 아닌, 돈 많은 상속자 주인공이라니. 뮤지컬 역사상 전무후무한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뮤지컬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뮤지컬 '리지' 속에서는 분노하고, 표현하고, 살인하고, 연대하고, 사랑하는 여성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 숨 쉰다.
대학로에서 활동하는 남성 배우 중, 동성애 연기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대놓고 게이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를 극을 거쳐가지 않은 배우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뮤지컬 '쓰릴 미'의 성공 이후로 남자들에 국한된 동성애 소재의 작품이 많아졌고, 그런 캐릭터들을 연기하며 사랑받고 있는 남성 배우들이 아주 많다. 그럴수록, 여성 배우들의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져갔다. 아예 남성 캐릭터들만 나오거나, 여성 캐릭터는 남성들의 서사를 위한 매개체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 들어서는 여성 서사가 강조된 작품이나, 젠더 프리 캐스팅을 통해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많아지고 있으나, 온전히 여성 배우들로만 이루어진 작품은 아주 드물다. 2018년 여성 배우만 10명이 나오는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트라이아웃 공연이 있었지만,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본 공연은 진행되지 않고 있다.
페미니즘 물결과 함께 관객들이 여성 캐릭터에 목말라하는 지금, 뮤지컬 '리지'가 올라왔다. 여성 서사가 강조되었지만 남성 캐릭터가 있는 작품이 아닌, 젠더 프리 캐스팅이 아닌, 온전히 여성으로만 채워진 뮤지컬 '리지'.
작품 속에서, 리지와 그의 이웃사촌 앨리스의 사랑이 절절하게 그려진다.마음을 숨긴 채 리지가 힘들 때면 곁에서 위로해주고, 그러다가 터져 나오는 마음을 후회 없이 쏟아내고, 살인에 동참하는 것을 망설이고, 그러다 결국은 리지의 편에 서주는 앨리스가, 리지에게는 꼭 필요했던 든든한 연인이 아닐까 싶다. 송스루 뮤지컬인 관계로 서사가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키스신까지 제대로 들어간, 이제껏 대학로에서 보기 힘들었던 레즈비언 커플이 너무나 반갑다.
관객과의 대화도 없고, 따로 연출진의 상세한 인터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확한 내용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보고 느낀 몇몇 오브제에 숨겨진 의미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건 사랑 아냐, 뭔지 모르겠어
첫 번째로, 램프는 리지의 어두운 가정환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리지에게 가해지는 성적 학대의 의미가 가장 크다. 극에서 전등이 나오는 넘버 'This is Not Love'와 'Sweet Little Sister'는 리지의 아버지 앤드류 보든이 리지와 그의 언니 엠마, 그리고 가정부 브리짓에게까지 가해진 성폭행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후에 나오는 넘버 'Shattercane & Velvet Grass'에서는 리지가 브리짓에서 램프를 건네주고, 브리짓은 보든 부인의 티타임을 준비하기 위해 끌고 나온 카트에 램프를 넣는다. 이 넘버는 리지가 살인을 결심하고, 브리짓이 그 살인을 묵인하기로 결정하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며, 해당 넘버가 끝난 후 브리짓은 카트를 무대 뒤로 가져가고, 그 후에는 램프가 다시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램프를 비추며 공연이 시작되고, 공연 후 바닥에 피묻은 도끼를 꽂은 채로 끝나는데, 이 또한 리지가 갇혀있던 어두운 환경을 지나, 살인 후 되찾은 그의 자유를 뜻하는 것 같다.
황금빛 열매 그 속엔 지친 너를 구원해줄 열쇠가
두 번째, 배는 금단의 열매로 보인다. 통상적으로 금단의 열매는 사과로 표현하는데, 리지는 특이하게 배를 사용한다. 사과는 성경의 아담과 이브 스토리에서 나온 이성애의 열매라서, 리지와 앨리스의 동성애를 표현하기 위해 배로 변경한 것이 아닐까 싶다. 1막에서 앨리스가 리지를 향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배를 먹고, 그 후에 리지 역시 앨리스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배를 먹는다. 2막에서는 살인과 사랑이라는 금단을 범한 리지가 배를 먹으면서 등장한다. 그리고 리지가 앨리스에게 '배를 먹어서 괜찮았어'라는 대사를 하는데, 이 역시 '금지된 행위를 해서 괜찮았다'라는 뜻으로 보인다.
내일이면 탈출, 난 날아갈 거야
세 번째, 해방을 의미하는 의상이다. 4명의 배우들은 2막에서 모두 의상을 갈아입는다. 1막에서 부모님을 살인하여 자유로워진 리지는 아예 의상 체인지 후에 등장하고, 다른 캐릭터들도 살인에 동참하는 순서대로 의상과 헤어스타일이 바뀐다. 마지막까지 자신 내면의 도덕성과 싸우며 고민하던 앨리스도 리지의 무죄 판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 거짓 증언을 하며 치렁치렁한 긴 드레스를 벗어던진다. 본인들을 억압하던 사회적 금기를 깨고 자유로워진 모습을, 그 시대 여성들이 입던 드레스와 정갈하게 올린 머리에서 변화하여, 현대적인 의상과 염색한 헤어스타일로 표현한다.
내 영혼 기다리네, 주님만을 기다리네
마지막으로, 성경책이다. 실제로 리지 보든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기독교 단체에서는 그의 결백을 주장하였으며 탄원서를 보내 그를 지지했다고 한다. 뮤지컬 '리지' 속에서 리지는 그런 교회를 자신의 무죄 입증을 위해 이용한다. 성경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신실한 기독교인을 표현하기 위해 하얀 프릴과 파란 코트로 한번 더 의상을 바꿔 입는다. 종교인들은 그 장면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미 종교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온 나에게는 그 장면이 통쾌하게 느껴졌다. 목격자에게 5천 달러를 상금으로 주겠다는 대사를 굳이 교회 씬에 넣은 것도 작가가 의도한 내용이 아닐까? 위선과 탐욕으로 빚어진 기독교에 살인이라는 죄악을 얹는 것쯤이야. 이미 살인에 동참한 리지와 엠마, 브리짓이 함께 주님을 비꼬는 찬송가를 부를 때, 그 넘버를 함께 부르며 이질감을 느끼고 불안해하는 앨리스의 모습도 보는 재미가 있다.
연출 부분에 있어서는 아쉬운 부분이 매우 많다. 우선 마이크를 사용하는 동선이 너무 정신 사납다. 특히 'I Gotta Get Outta Here'에서 리지가 사방을 마이크로 막는 동선은 유치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1막 초반에 리지가 자신의 몸을 더듬는 안무가 너무 많다. 살짝만 더해도 은유적으로 아버지의 성폭행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다리까지 벌리고 남성 스텝이 몸을 훑고 가는 안무까지 넣으면서 기분 나쁘게 그 장면을 표현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남성 연출의 한계라고 볼 수밖에 없는, 실망스러운 씬이다.
객석을 고려하지 않은 조명과 락 뮤지컬 임을 잊은 듯한 음향도 아쉬웠고, 의상 또한 아쉬운 부분 중 하나다. 이미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의상 체인지가 이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배우들의 체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점과, 해방을 보여주기 위해 체인지한 의상도 결국은 코르셋이라는 게 안타까웠다. 굳이 이런 노출로 자유를 표현해야 했을까? 90년대 ~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의상으로 해방의 의미가 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부분 또한 페미니즘에 대해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연출진의 실수라고 생각된다.
전반적인 스토리에 있어서는, 리지에게 가해진 성폭행이 큰 부분을 차지한 점이 아쉽다. 여성의 살해 동기는 항상 성적 학대여야 하는 걸까? 수많은 남성 살인자 캐릭터처럼 아무 동기가 없거나 단순히 재미를 위해 살인을 하는 여성 살인자 캐릭터는 언제쯤 무대에서 볼 수 있을까?
작품의 큰 틀을 바꿀 수는 없을 테니, 재연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폭행을 묘사하는 안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조금 더 고어한 분위기를 살렸으면 좋겠다. 아예 앞줄까지 피가 튀게끔 살인 장면을 제대로 살리고, 앨리스가 위증을 고민하는 씬을 추가하고 재판 장면 연출을 더 긴장감 있게 바꿔서 살인과 무죄 판결에 더 집중한 내용으로 오면 좋을 것 같다.
작품 속에서 서로 도움을 주는, 그것도 살인을 위해 서로 연대하는 여성 캐릭터들도 좋았지만, 배우들의 하모니도 이 공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나는 이제껏 여성 배우들끼리 부르는 넘버가 이렇게 좋다는 것을 몰랐다. 이 작품을 보며 4명의 여성 배우가 함께 들려주는 사중창에 마음을 빼앗겼다. 락 뮤지컬인데 화음을 느낄 수 있을까 싶겠지만, 교회에서 부르는 'Watchmen for the Morning' 은 사람을 홀릴 정도로 그 하모니가 아름답다. 객석에 앉아 듣다 보면 온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Shattecane & Velvet Grass'와 'Burn the Old Thing Up' 또한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아름다운 화음이다. 이렇게 좋은 걸 남자 배우들만 해왔다니, 억울할 지경이다. 지금부터라도 여성 2인극, 3인극, 4인극이 더 많아져서 좋은 배우들과 그들의 하모니를 많이 들을 수 있길 바란다.
객석에 앉아서 공연을 관람할 뿐이지만, 이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배우들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작품 속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 배우들도 얼마나 서로 아끼고 연대했는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에서 박수를 칠 때, 나도 모르게 울컥하여 눈물을 참을 때가 있는데,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와 '리지'가 그런 작품들이다. 공연에서 모든 열정을 쏟아낸 여성 배우들과, 그 공연에 감사하며 박수로 화답하는 여성 관객들이 하나가 된 느낌이 들었다. 배우들과 관객들이 서로 연대한다는 느낌에, 여성 배우들의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 지 알고 있는 우리 모두가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작품 속에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열정도 엄청나지만,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에서 보여주는 배우들의 에너지도 무시할 수 없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함성을 자제하고 있는데,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 후에 마음껏 환호하고 뛰어놀며 다 같이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제작사에서 리지 콘서트라도 올려주었으면 한다. 4명이 아닌 8명의 배우가 한 무대에서 함께한다면, 그 에너지에 한번 더 마음을 빼앗길 것 같다.
여성 배우들이 더 빛날 수 있도록, 더 날아오를 수 있도록, 뮤지컬 '리지'를 시작으로 여성 배우들로만 채워진 공연이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뮤지컬 '리지'는 2020년 6월 21일까지 드림아트센터 1관에서 공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