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FELOG Jan 28. 2020

25살 크리스마스, 5895m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르다

평범한 내가, 한국인 여성 최연소로 5895m 아프리카 최고봉을 오르다.

오랜 버킷리스트를 준비하다

오랜 꿈이 있었다.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산 정상에 올라 내 눈으로 빙하를 보는 일-

눈이 조금씩 녹아 3년 안에는 만년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5895m 킬리만자로 산을 오르는 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12월 말 나는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의 남자친구는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겠다며 동행을 약속했다. 12월 26일이 우리의 기념일이었으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 될거라 생각했다.

(우) 심장 강화 훈련은 홍대에 태그아웃트레이닝센터에서 받았다.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르는 꿈을 위해 평일에는 심장 강화 훈련을 받았고, 주말에는 북한산 등, 서울의 인근 산을 등산하였다. 고산지역에서도 심장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Interval training을 받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몸이 단련되는게 느껴졌다.

등산이 취미인 사람도 아니었기에, 등산 용품들을 구하는게 가장 시급했다. 엄마의 등산복부터 남동생의 작아진 패딩까지 이것저것 전부 모아 킬리만자로 등산을 준비했다. 첫 이틀은 햇빛이 강렬하니 챙이 큰 모자를 꼭 챙겨야한다. 마지막 이틀은 -20도에서 -30까지 내려가기 때문에 오른쪽 사진처럼 가릴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최대한 가릴 수 있도록 준비해야했다. 옷에 부착할 수 있는 손난로도 필수라하여 30개를 준비해갔다.


킬리만자로 트래킹을 위해 드는 비용은 킬리만자로산 인 아웃행 항공까지 포함하여 400만원 정도이다. 한국인 업체와 현지 업체가 있으나 모두 메일로 컨텍해본 결과, 경험이 더 많은 Monkey Adventure라는 외국 업체를 통해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한 사람당 3명의 포터(짐을 들어주는 사람)와 가이드 2명, 요리사 1명을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탄자니아 입국을 위해서 입국 10일 전 황열병 예방접종은 필수이다. 대학병원이 더 빠르게 예약이 가능하다하여 우리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황열병 예방접종을 맞았다. 의사선생님께서 주신 처방전을 통해 고산병약을 비롯하여 킬리만자로 산행에 필요한 약들도 모두 처방받았다. 탄자니아 입국 비자는 공항에서 바로 발급이 가능하며 비자 비용은 50불이다.



12월 21일 토요일
인천국제공항 이동
이렇게 그와 나의 짐 3개를 들고 우리는 아프리카로 향했다.

내 상체보다 더 큰 12kg의 짐을 들고 공항으로 향했다. 인천에서 킬리만자로산이 있는 탄자니아까진 에티오피아 항공을 타고 대략 18시간이 걸렸다. 오후 2시, 우리는 탄자니아에 도착했다.

12월 22일 일요일
탄자니아 도착


우리는 여정 첫 날 부터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스웨덴 친구들이었는데, 이들은 킬리만자로 원데이투어를 계획 중이라고 하였다. 등산 마니아도 아닌 우리가 6일 동안 킬리만자로 산을 오른다고 하니 꽤 놀란 눈치였다.

공항 앞에서 우리 이름을 들고 있는 가이드를 만나 호텔로 이동했다.

탄자니아 거리의 모습

탄자니아에 도착한 첫 날부터 비가 많이 왔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산행이 걱정되었지만 어두운 하늘을 돌보는 구름이 내려와 다 잘 될거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우리의 짐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마침내 우리는 호텔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가장 먼저 한일은 우리의 모든 짐을 풀어 다시 재정비하는 일이었다. 산행 첫 이틀 간은 가볍게 반팔로 시작하지만 점차 고도가 높아질수록 온도가 급격히 내려갈 예정이므로, 우리는 사계절의 옷을 모두 챙겨야만 했다. 가이드로부터 우리가 가져온 짐을 모두 검사받았고 부족한 짐은 그 다음 날, 장비대여점에서 빌리기로 하였다.

한식을 사랑하는 이는 도착하자마자 돌자반과 김치부터 꺼내기 바빴다.

탄자니아 로컬맥주인 세렝게티 맥주와 함께 밥이 있는 음식을 주문했다. 한식을 가장 사랑하는 나는,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김치와 돌자반부터 꺼내기 바빴다. 긴 비행에 지쳤던 탓인지 저녁 먹고 돌아와 저녁 7시반부터 잠이 들었다. 아무 걱정 없이 편히 잤던 밤이었다.


12/22 일요일
킬리만자로 산행 ( 2720m Mandara Hut)
갈수록 참 많이 닮아가는 우리다.

드디어 산행 첫 날이다. 아침 8시반, 우리는 우리의 산행을 함께할 가이드와 포터와 요리사를 만났다. 장비대여전문점에 가서 폴대와 침낭을 빌리고, 킬리만자로 마랑구 게이트로 이동했다. 약 1시간이 걸렸다.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서 그런지, 킬리만자로 등산을 위한 리셉션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리셉션에 우리 정보를 등록하고보니, 내가 한국인 여자 최연소로 킬리만자로 트래킹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킬리만자로산 정상에 성공적으로 오른다면, 기분 좋은 타이틀을 얻고 25살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첫 날부터 의지가 대단했다.

가이드가 챙겨주는 런치박스를 가볍게 먹고 산행을 준비했다.

비가 올 때를 대비하여 판초는 꼭 챙겨야한다.
가이드가 남겨준 첫 날의 우리 모습

산행 첫 날부터 비가 많이 내려 우리는 판초를 입고 등산을 시작했다. 산행을 시작한 이후로는 휴대폰이 터지지 않아 가끔 사진을 찍을 때 외에는 가방에 넣어두었다. 지금부터 써내려가는 나의 일기는 산행을 마치고, 자기 직전에 침낭에서 남긴 메모들을 옮겨적은 기록이다. 사실상이 기록들은, 그 날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의 나열에 가깝다. 우리의 여정을 전체적으로 담은 영상도 글 하단에 같이 담아보았다.


12월 22일 밤
사진과 같은 산장에서 침낭안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첫 날 산행은 2720m까지 진행되었다. 5시 쯤 도착한 우리는 Mandara Hut이라는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은 4인실로, 네 개의 매트리스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이 날은 여유롭게 둘이서만 이 Hut를 이용할 수 있었다.

화장을 할 수 없어 민낯으로 산행이 진행되었다 (앗)

그 날 저녁 우리 두 사람에게 허락된 물은 보이는 사진이 전부였다. 간단한 세수와 양치 외에는 머리를 감을수도, 샤워를 할 수도 없었다. 산행 중 화장을 하는 것이 무리란걸 미리 파악했던 나는 기초화장품과 썬크림 외에는 그 어떤것도 챙기지 않았다.

 

산장에 도착하면 매일 이렇게 간단한 비스킷이 간식으로 제공되었다.

준비된 저녁을 먹고 바로 잠이 들어서 그런지, 새벽 4시 반이 되어 깼다. 오빠 손을 잡고 산장을 나왔다. 그리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을 빼곡히 수놓은 별들이었다. 아이폰 11프로를 가지고, 열심히 하늘을 담아보려했으나 먼지처럼 찍힌 사진에 토라지고 말았다. 대신 두 눈 가득 별을 담기로 했다.

아이폰 11프로로 담은 별 (눈에 보이는 만큼 담지 못해 아쉬울 따름)

사랑하는 이와 별을 같이 본다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수많은 별들 사이 우리는 손을 잡고 나란히 산장 주변을 걸었다. 새벽 4시 50분, 모두가 잠든 사이- 지금 이 세상에 남은 건 우리 둘과 초승달, 그리고 무수히 많은 별들이었다. 적재의 별 따러 가자 노래를 틀고, 우린 하늘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함께 볼 수 있음에 감사한 날이다.


12월 23일 월요일
킬리만자로 산행 (3720M Horombo Hut)
아침, 산장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일출
1. 세상에 많은 감사함을 느낀 시간이었다

걸을 수 있는 감사함

이 아름다움을 눈으로 마음껏 담을 수 있는 감사함

숨을 쉴 수 있는 감사함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감사함

누울 자리가 있다는 감사함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함께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감사함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절대 당연할 수 없는 감사한 순간들

둘째 날까지는 가볍게 반팔을 입고 산행이 진행되었다.
2. Hello How are you?
I’m good. Because I see you.

산행 도중에 늘 짧지만 따뜻한 영어로 반겨준 이들이 있다. 매일 긴 산행 시간이 반복되는 동안, 우리는 그들로부터 간단한 탄자니아어를 배우기도,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함께 캐롤을 부르기도했다. 매일 달라지는 새로운 자연에 감탄하는 우리에게, 높은 고산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들을 소개해주며, 자연과의 사진을 남겨주기도 했다.

3. 왜 산에 오르나요?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오르는 것이지요.

우리는 산장에서 매번 새로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네팔에서 하이킹 여행사를 운영하는 대표님을 만나기도, 매번 새로운 세계여행을 준비하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값진 인연이었다.

둘째 날도 무사히 산행이 진행되었다.
12/24 화요일
킬리만자로 산행 (4720m Kibo Hut)
4200m 지점 부터는 식물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12월 24일 밤

꾸역꾸역 우린 4720m까지 올라왔다. 사실은 고산적응기 하루를 가지고 산에 오르는 것을 계획했지만, 자심감이 넘쳤던 우리는 고산적응기 없이 바로 정상에 올라도 괜찮을 것 같다고 결정을 내렸다. 고산병에 대해 잘 몰랐던 우리의 아쉬운 선택이었다.

Kibo 산장 리셉션에 등록하는 모습이다.
그 날 저녁, 그가 아프다. 많이 아프다.

고산병과 편두통이 함께 와서 그런지 둘째날부터 먹기만 하면 토해냈다.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어려워 복통도 함께 있는듯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옆에서 거친 숨소리로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채 어렵게 잠이 든 그를 보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의 매트리스에 살짝 걸터앉아 그의 손을 잡아주는 것 밖에는. 인터넷도 터지지 않아, 그 어떤 해결책도 검색해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음이 무너질 듯 아팠다-

대신 아파줄 수도 없는 괴로움에 그를 보면 눈물이 먼저, 나를 찾았다. 아마 지난 유럽 여행 때 10일 내내 아파하는 나를 보듬어주고 간호해준 그의 마음이 지금 내 마음과 같지 않았나 싶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의 등을 두들겨주고, 물과 휴지를 주고 약을 까내주는 것 밖엔, 나는 아무것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약 먹을래?

이 말을 꺼내는 것 조차- 이제는 두 사람 모두에게 부담이 되었다. 약으로도 통하지 않는 아픔이란걸 나는 이미, 너무 잘 알기에- 그 말을 구태여 꺼낼 때마다 미안함이 더 앞을 가렸다


이제 좀 어때요?

나는 잦은 간격으로 그에게 물어보지만, 그의 ‘조금 아프다’는 말을 나는 곧이 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조금이, 사실은 아주 아플 수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기에,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떨어지는 눈물이 그의 손등까지는 흐르지 않도록 막는 일에만 집중했다.


처음 오르는 높은 산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힘들다는 말로 모든 감정을 이내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 단순히 정신적으로 힘든 문제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육체적 고통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두통과 복통, 그리고 몰려드는 피곤함을 표현할 틈새도, 표현할 의지도 없었다. 밤새 그의 옆에서 그를 한번더 안아주고 보듬어주는일만이 내가 나의 아픔을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는 아가처럼 곤히 잠들었다가도 한시간이 안되어 다시 거친 숨소리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딱 하루만 더 올라가면 5895m,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정상이었지만, 4760m의 산장에서 그는 더이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정대로라면 마지막 산행은 이 날 밤 11시에 출발하여 6시간 후 크리스마스 새벽에, 정상에서 일출을 보는 일정이었다. 그에게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를 선물해주고 싶어서 잡은 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과한 욕심이었다.


마지막 산행을 위해, 크리스마스 이븟 날, 밤 10시부터 산장은 분주한 소리로 가득했다.

오직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아픈이들만을 제외한 채. 고산병을 포함해 여러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만 산장에 남고 모두들 -20도의 마지막 산행을 위해 온 몸을 꽁꽁 싸매기 바빴다.

아픈이들만 님은 이곳은 마치 중환자실 같았다. 우리도 그 들 중 한명이었다. 혹여나 그런 분위기마저 그를 더 힘들게 할까봐 그의 눈과 귀를 가린채 가만히 안아주기를 반복했다.

아픈이를 홀로 둔채, 같이 일정을 시작한 부부도, 그룹들도 환자는 남겨두고 산장을 떠났다.


그도 내게 혼자라도 무사히 정상에 다녀오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꾹 참았던 눈물이 터지며 내 얼굴을 타고 그의 귓가로 들어가던 순간이었다.

사실은 그도 알 것이다. 내 목표가 '그저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르는 일'만은 아니라는 걸. 내 옆에 있는 이와 건강하게 무사히 정상에 오르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는 걸. 그러니 나는 그보다 조금 몸이 더 괜찮다는 이유로 혼자 갈 수 없었다. 아니, 가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포기가 아름답다는걸 안다. 우리는 열심히 걷고 걷고 걸어, 살면서 처음으로 4000m가 넘는, 4760m의 Kibo 산장 까지 왔다. 이건 대단한 일이다. 충분히 잘 한 일이다. 내 옆에서 아픔을 잘 견뎌준 사랑하는 이의 모습만으로도 나는 정상에 오르는 그 이상의 행복을 이미 느꼈다.


우린 아직 젊고, 앞으로도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 제대로 준비하여, 그 때 또 다시 손을 잡고 산에 오르면 된다. 살면서 가장 풍성한 마음을 가졌던 4일이었다. 가장 많은 칭찬을 누군가에게 해준 시간이기도 했다. 자랑스럽다고, 고맙다고, 너무 잘하고 있다고. 힘들면 참지 말라고, 아픈건 당연하다고.

 


곧 새벽 4시 반이다. 아침이 밝으면 우리는 어제 출발했던 3760m의 산장까지 내려가 앰뷸런스를 타고 처음 시작했던 게이트로 이동할 것이다.



12/25 수요일 크리스마스,
5895m 킬리만자로 정상을 위치다
그 날의 아름다운 새벽 하늘

그러나 그날 아침, 그는 아픈 몸을 이겨내고 일어났다. 끝까지 정상에 오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언제든 힘들면 내려올 수 있으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새벽 6시 반, 우리는 정상을 향한 마지막 여정을 시작했다. 비록 다른이들보다 7시간 늦게 출발했지만 우리의 우리 pace대로 도전을 이어나갔다. 다만 음식을 먹으면 더 고산병이 심해질까봐 빈 속으로 산행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분주하게 준비해서 나가느라 우리는 썬크림을 얼굴에 바르는 것도 깜빡했다. 아주 큰 실수였다.


 4700m부터 시작된 여정- 이미 시작점부터 높은 지대였기에 우리는 오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고산병 증세가 나타났다. 머리가 아팠고 소화도 잘 안되며, 피가 머리로 쏠려왔다. 살면서 1000m의 산도 오른 적이 없던 사람이 6000m를 오르려니 그럴 수 밖에-

5600m 부근부터는 만년설이 이어졌으며 눈보라가 계속되었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4200m 부터 식물 하나 보이지 않았으니 얼마나 산소가 부족한 곳인지 느껴질 것이다. 더군다나 마지막 날은 눈보라가 꽤 일었다. 아무리 숨을 쉬어도 더이상 숨 쉬는 것 같지 않았다. 5초마다 한번씩 숨을 내뱉는 연습을 했다. 오로지 우리는 숨을 쉬고 고도를 적응하는 데에만 온 힘을 다하기로 했다. 그저 내 두 발은 기계처럼 저절로 걷게 할뿐-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감사한 일이라니,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감사함이었다.


‘포기할까? 이제 그만 내려갈까? 이 상태로 더 오르다가는 진짜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아.’

살면서 가장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포기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몇 번을 이제 그만 내려가겠다며 이를 악물고 울었지만, 또 그 울부짖음 뒤에는 강하게 내려가지 못하고 꿋꿋이 올라가는 내 두 다리가 있었다. 가이드는 이제 곧 도착할거라며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위로했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무서움이 눈 앞을 가려, 그렇게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점차 빙하가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자. 정상 올라가면 우리 같이 울자.
너무 수고했으니깐, 정상에 가면 마음껏 울자."

약해지려는 순간마다, 그가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위로해주었다. 어제 그렇게 아프던 그는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든든하게,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첫 정상 포인트인 5685m Giliman's Point에 도착하다.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쓰러져서 펑펑을 울었다. 세상이 떠나가듯 꺼이꺼이 울었다. 그도 그랬다. 내 옆에 누워 닭똥같은 눈물을 닦아주며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이였다. 전 날, 그렇게 아팠음에도 내가 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묵묵히 함께 이 길을 가주어, 우리의 도전을 완성시킨 이였다.

(좌) 꺼이꺼이 우는 모습이다. 정말 서럽게도 울었다. (우) 마지막에 자랑스러운 이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이 없었다면 이 꿈을 절대로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 옆에서 묵묵히 안아주고, 손을 잡아주는, 높은 정상 위에서 산소가 되어 준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그 높은 킬리만자로의 정상에서 마지막 함박 웃음을 짓지 못했을 것이다.


가이드는 누워서 서로 안고 펑펑 우는 우리의 모습을 6분의 영상으로 남겨주었다. 그 영상에서 가이드가 탄자니아어로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데, 나중에서야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니, True love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극한 여정이 우리의 진심을 증명하는 듯 했다.


12월 26일
하산 및 가이드와의 마지막 인사
마지막 정상에 오르던 날, 썬크림 바르는 것을 깜빡했더니 얼굴에 일광화상을 입었다.

6일을 예상한 트래킹은, 우리의 간절하고도 애틋한 노력 끝에 예상보다 더 일찍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내려오니 온 몸이 말끔히 나았다. 전 날, 썬크림을 바르지 않고 산행을 하여 얼굴이 심한 일광화상을 입은 것 빼고는- 이 때까지만 해도 이 화상이 얼마나 심한지는 깨닫지 못했다. 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킬리만자로 트래킹 증명서를 받았다. 보기만해도 벅차오르는 증명서이다.

우리와 함께해준 따뜻한 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연휴에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2일의 휴가를 선물로 주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시간을 내주어 탄자니아 도심 곳곳을 소개해준 이들이었다. 이들과 오후를 함께 보낸 후,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늦은 저녁, 우리는 탄자니아의 Arusha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Arusha 지역으로 넘어와 바나나 농장에서 현지 홈스테이를 하기로 결정했다. 바나나와 커피 농장에서의 홈스테이라니, 예상했던대로 신이 났다. 모든 조식과 간식은 바나나로 이루어져있다. 살면서 언제 또 이만큼 바나나를 많이 먹을랑가?

12월 27일 타랑게리 사파리 투어
일광화상으로 얼굴이 심하게 빨개진 탓에 독자들이 놀랄 수도 있어, 흑백 사진으로 올린다.

고산적응기 하루를 아껴, 예정보다 일찍 내려온 덕분에, 우리는 그토록 간절했던 사파리 투어를 할 수 있었다. 호주에서도 싱가포르에서도 사파리 투어를 했다만, 이건 정말 차원이 다르다. 내 눈 앞에 바로 서있는 동물들을 보니, 윈도우 배경화면이 현실화되어 지나가는 듯 했다.

우리가 탔던 지프카

우리는 홍콩 출신의 호주 간호사와, 네덜란드에서 영어교사를 하는 할아버지와 두 아르헨티나 커플과 함께, 지프카를 타고 타렝기레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실로 놀라웠는데, 이토록 멋진이들과 함께 이 놀라운 광경을 본다는 사실에 가슴 벅차오른 하루였다. 넓은 세상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여행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이들처럼 갇혀 있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함을 느꼈다.


눈 앞에서 바로 보았던 동물들

그 곳에서 우리는 코끼리도, 사자도, 원숭이도, 기린도- 아주 많은 동물들을 보았다. 우리 앞에 있던 지프카에서는 유럽에서 온 귀여운 꼬마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외치며, 이 자연을 맘껏 누렸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나 역시 동물원의 피곤한 동물들의 모습이 아닌, 이토록 살아있는 자연을, 어렸을 때 보았더라면 어떤 세상을 품으며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

우리는, 먼 미래에 아이들에게 어린 나이에 이런 아름다운 자연과 동물들을 보여주자며, 속삭였다.

하염없이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생각이 많아져버렸다.

얽히고 얽힌 구름 조각을 보면서 관계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떠올랐다. 온전히 나를 위해 살아가고 싶어도, 수많은 이해관계를 헤아리며 살아야하는 우리-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 속에 숨을 쉬고 있음에 늘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이 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내가 밉기도 했다.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들 때쯤, 검붉어진 얼굴이 더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곧 얼굴이 2배로 팽창되었다. 마치 근육이 마비가 되기라도 한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입을 벌리는 것 조차 힘들었다. 코에서는 허물이 벗겨지면서, 노란 진물도 함께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에, 사파리 지프카 안은, 다들 비상이었다.

다행히 호주에서 온 간호사 분이 간단한 응급처치를 도와주셔서 급한 상황은 해결할 수 있었다. 7살 때, 가족들과 해수욕장에 다녀와 피부가 심하게 타 피부가 벗겨진 적은 있었으나, 이 때처럼 얼굴이 팽창한 적은 없었다. 처음 보는 내 모습이 너무 무섭고 아파서, 그의 품 안에서 펑펑을 울다, 마지막 순간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 걱정 먼저 해주는 그가 참 고마웠다.


12월 28일
한국으로 돌아오다
떠나기 바로 직전, 우리의 모습

비행기 타고 돌아오는 길,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 환히 웃는 우리의 옛 모습들을 찾아보았다. 얼굴과 몸이 지치고 다친, 지금의 우리 모습과는 많이  대조되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당신의 모습과 내 모습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함께 걷고 경험한 아프리카라는 새로운 곳에서의 추억 때문이겠지.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탄자니아 로컬 맥주들 (왼쪽부터 사파리 / 킬리만자로 / 세렝게티)


사람들은 말했다. 정말 극한 곳에 함께 여행했을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게 될거라고

우리도 그걸 100번도 넘게 느낀 여정이었다. 산에 오르는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할 뿐더러, 극한 환경에서의 서로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던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의 흙이 묻은 얼굴과 다 터져버린 빨간 화상 자국마저 아름답고 소중한 걸 보니, 이 내 어떤 말로 더 표현할 수 있으리. 그 역시 나의 터지고 빵빵해진 얼굴에도 예뻐해주고, 더 많이 안아주는 그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함을 느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 단일 산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5895m 정상에 올랐으니, 2020년 우리는 어떤 일도 다 이뤄낼 수 있을거야. 25살이 지나가기 전에, 킬리만자로산 정상의 빙하를 보고 싶다는 나의 버킷리스트를 위해 함께 가주겠다며, 손을 내밀어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애정을 전한다.


12월 29일
마침내 한국 도착
힘들어도 함께라서 행복했던 우리의 킬리만자로 여정 / 지금 나의 휴대폰 배경화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우리의 아프리카 여행이 그렇게 끝이 났다. 돌아와서 보니 아주 많은 것들이 망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얼굴은 전체 일광화상에, 여기저기 물리고 다친 상처들. 얼굴과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3일이 지난 얼굴 - 이만큼 일광화상이 무섭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건,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삶의 교훈을, 우리는 산에 오르는 동안 여러모로 배울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나는 그 배움이 지금 나의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값진 배움이 될거란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이런 나를 지극히 '경험주의자'라고 표현하고 싶다.

좋은 걸 가지고, 먹는 것보다는, 아주 새로운 경험에 매몰되어 그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 그리고 그 경험이 나라는 사람 가득이 체화되어, 매력으로 뿜을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런 경험주의자이다.


앞으로 나는 또 어떤 경험을 하게될까? 어떤 경험을 하며, 그 경험을 어떤 가치있는 이야기로 전할 수 있을까? 그 새로운 경험들이 몸에 베어 “알아가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아프리카 여행 중 만난 수많은 멋진 이들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따뜻한 경험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경험주의자는, 또 다른 경험을 찾아 매일이 여행하듯 살아갑니다.



킬리만자로 트래킹 전일정을 휴대폰으로 간단히 편집하여
25분간 담아보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