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 Brugo Ranero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플라리오스 - 엘 부르고 라네로
그 어느 때보다 이른 시간 새벽 5:30 am. 벌써 배낭 메고 신발 신고 준비를 마친 우리 4명은 문 앞에서 비장하게 손을 모은다.
오늘은 목적지 엘 부르고 라네로까지 31km를 걸어야 한다. 하루에 30km를 넘게 걷는 것은 모두에게 처음인 셈이다. 걷다가 한계가 오면 중간에 주저앉아도 된다고 멈추어도 된다고 서로 당부한다. 힘내자는 의미로 소은이 처음 손을 내민다. 그 위로 Y의 손, 이반의 손 그리고 나의 손이 포개졌다.
Be safe. Be happy. Be myself.
밖으로 나가는 크고 무거운 문을 여니 정적을 뚫는 낮은 비명 같은 삐그덕 소리와 찬바람이 동시에 들어와 나는 흠칫 놀랬다. 겨울과 다름없는 9월의 시린 새벽 기운이 소스라쳤다.
낡은 숙소의 문만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추워서 꺅-하고 비명이 절로 나오는 추위였다. 달리 방도는 없고 몸이 덥혀지도록 그냥 빨리 걷는 수밖에. 그래도 하늘을 놓칠 수는 없지. 오늘도 역시 총총 박힌 수많은 별이 하늘에 가득하다. 우리는 말없이 별을 보다가 추워서 또 꺅~ 하며 비명과 함께 빨리 걷다가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한 시간 반을 걸어도 여전히 어두운 까미노. 어느 마을인지도 모르는 곳에 도착해 환하게 불이 켜진 곳으로 홀린 듯 향했다. 그곳은 오래된 사진들과 까미노 소품들로 가득했다. 이 새벽의 기운과 걸맞게 마치 신비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만 같은 곳이었다.
아침을 잘 안 먹는 나를 제외하고 또르띠야나 빵을 시켜 먹는 친구들. 이곳의 또르띠아는 셰프인 이반의 큰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맛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의 분위기와 친절과 요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바에서 나올 때쯤 동이 트려는 듯 하늘이 변하고 있었다.
때때로 어깨가 떨리도록 웃다가 울었다
사하군까지 계속되는 메세타를 Y와 함께 걸었다. 따사롭게 내려오는 햇살 덕분에 마음마저 훈훈해지는 건지 Y가 좀처럼 하지 않던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다. 상실에 대한 이야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왜 자국을 떠나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담담히 내뱉는 그가 고마웠다.
사실 나는 요 며칠 메세타를 걸으며 종종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생각나곤 했다. 순례길과 관련된 영화도 있고 근사한 로드무비도 많은데. 이곳이 바다도 아니고 지금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지도 않는데 나는 왜 자꾸 이 영화가 디졸브 되는 걸까? (감독 이름 때문은 아니다..)
이 영화는 희망차지 않아서 좋았었다. 뭔가 될 것 같지만 되지는 않고 나락인 것 같지만 살아가는 사람들. 현실은 절망스럽지만, 과거엔 꿈도 있었고 반짝이던 청춘의 기억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가라오케에서 쓸쓸하고 처연하게 기타를 연주하던 주인공의 헐벗은 표정은 마치 이렇게 들렸다.
이런 인생도 있어. 지긋지긋하지만 이렇게 사는 거지 뭐.
영화는 비극적으로 치닫는다 싶다가도 결코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고교 동창 여자친구가 밴드에 합류하면서 새롭게 시작하는 밴드의 첫 무대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무대에 선 주인공들은 미세한 설렘과 미소를 띠고 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영화의 첫 장면으로 이어진다. 밴드가 종국엔 끝나게 되리란 걸 영화의 첫 장면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속 그들의 미소가 더욱 애처롭게 보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이 영화가 그렇게 끝나는 것이 좋았다. 이들의 끝이 어떠하든 시작하려는 사람들의 몽글몽글한 표정을 놓치지 않는 감독의 삶에 대한 시선이 좋았다. 인생이 끝없는 희망과 좌절의 연속이라면 좌절에 굳이 마침표를 찍을 필요는 없다. 결과라는 것은 또 다른 시작으로 갈 뿐이다. 그 시작이 또 다른 절망으로 향한다고 하여도.
나는 까미노에서 매일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들과 비슷한 표정을 만난다. 인사를 나눌 때는 몽글몽글해지다가 길을 나서면 또다시 처연해지는 사람들. 혼자 걸으며 나만 아는 초라함에 몸서리치다가도 해가 뜨고 질 때면 평온해지는 사람들. 때때로 어깨가 떨리도록 웃다가 우는 사람들.
여기서 보기 좋고 그럴듯한 희망찬 로드무비를 찍고 싶지는 않다. 그게 얼마나 허무한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로드무비 속 주인공이다. 목적지가 아닌 여정에 충실한 길을 따로 또 함께 걸어가는 중이다.
Y와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눈앞의 도시로 직진하고 있는데 뒤에서 외계어가 들린다?!
돌아보니 그 길이 아니라며 돌아오라는 순례자들의 손짓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완전히 다른 도시로 들어갈 뻔했다. 우당탕탕 거리며 돌아가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사하군은 발렌시아 지역에서 레온 지역으로 넘어가는 첫 마을이기도 하고, 또한 까미노 프랑스길의 중간 지점을 지나는 곳이다. 메그는 어제 이 마을에 도착해 오늘 이곳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사하군의 어느 약국에서 Y가 급한 화장실 용무를 해결하고 나올 때쯤, 이반과 소은을 만났다. 우리는 벌써 까미노 중간까지 온 것이 실감 나지 않고 아무 느낌도 없다고 말했지만 막상 중간지점에서는 기념사진 한 장씩은 남겼다.
3시간 30분 만에 사하군에 왔지만 아직 19km가 더 남았으니 온 만큼 이상은 더 가야 했다. 점점 타오르는 해가 자꾸만 앞으로 오려고 하고 있었다.
가난하고 무지했던 젊은 나를 위해
5:30 am에 출발해 1:30 pm에 도착한 곳, 엘 부르고 라네로.
"오짱!"
드디어 메그와 다시 만났다. 여전한 모습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
오랜만에 5명 완전체가 되어 근처 식당으로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 식당에서 신라면을 판다고 소문이 자자했기에 크게 고민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었던 식당이다. 다만 점심 메뉴가 고민되었는데, 샤워와 빨래를 하고 나왔으니 벌써 3시가 되어가는 애매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라면을 점심으로 먹을지 저녁으로 먹을지 세상 진지해진 순례자들. 오늘 최대의 난제이자 고민거리다. 시간이 늦었으니 간단히(?) 햄버거를 먹고 저녁에 다시 이곳에서 라면과 햇반을 거하게(?) 먹기로 의견을 모았다. 음.. 그 반대- 점심은 거하게 먹고 저녁을 간단히 라면으로- 였던가? 음.. 뭐.. 아무렴 어때.
오늘 알베르게는 기부제이다. 우리 모두 기부제 알베르게는 처음이었는데 돈을 얼마큼 내야 하는지 정해진 것이 없으니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내야 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다면 괜찮다.
세상은 사실 모두 일정하고 동일하기보다 조금 과하거나 조금 부족한 것들이 맞물려서 돌아간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가난했던 젊은 나이에 길 위에서 정말 많이도 얻어먹었다. 다행히 주위에 좋은 어른들이 많았다. 때로는 당연한가 싶을 정도로 선배들이 자연스럽게 사주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눈치 보지 않게 배려해 준 것이겠지. 그때는 그냥 잘 몰랐다. 나는 돈도 없고 벌 줄도 모르는 가난하고 무지한 청춘이었다.
조금 사회화가 되고 여유가 생긴 지금, 그때 내 나이의 사람들을 통해 그때의 나를 종종 만난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좀 더 베풀고자 하는 것은 자만하거나 여유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무지했던 나를 건사해 준 모든 어른과 세상에 되돌려 주는 것일 뿐이다. 어른들이 내게 했던 것처럼 내가 나보다 젊은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내가 진짜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작은 바람 하나는 그들 또한 여유가 생기면 세상에 되돌려 주는 걸 기억하면 좋겠다. 세상은 그렇게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다른 세대)에게 되갚으며 돌아가는 것이라 믿는다.
내일 드디어 레온에 입성한다. 약 37km를 걸어야 하는데 두 번으로 나누기 애매한 거리인 데다 일정상 레온에서 헤어져야 하는 친구가 있어서 무리스럽더라도 내일 한 번에 레온까지 가보기로 한다.
든든히 라면을 먹고 해 질 녘 함께 산책을 하니 우리는 마치 가족 같았다. 강가로 나가니 때마침 노을이 지고 때마침 새들이 날아오른다. 우리만 아는 소소한 이야기에 웃고 아름다운 마을 풍경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듯해진다.
3일 만에 다시 5명이 되었지만 내일 또 다른 친구가 떠난다. 까미노에서의 이별이라니. 요란 떨 것은 없다. 헤어짐이 슬프지는 않다. 그저 오늘 저녁 함께하는 시간이 평범하여 더 소중하다.
수많은 시간과 사람들 속에 자석처럼 만난 사람의 인연이란 이토록 경이로운 것이었구나. 애쓰지 않았지만 만나게 된 우리가 애틋하다.
노을 지는 강가에 서니 우리의 마음에도 노을이 지고 있었다.
bonus!
-알베르게 : Albergue Municipal Domenico Laffi
-식당 : Pensión Restaurante La Costa del Ado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