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새벽, 우리는 노래가 되어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by OHz 오즈

까리온 데 로스 꼰테스 -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플라리오스



그 새벽, 우리의 노래는

소음이 유난히 조심스러운 이른 아침. 모든 걸 예상하고 빠져나가기 쉽도록 방문 바로 옆 침대에서 조용히 일어난다. 가장 먼저 근처에 있던 충전기와 핸드폰, 보조 가방 등을 에코백에 넣고 한 번에 들고나갈 수 있도록 한다. 침낭은 나가서 정리할 예정. 일회용 침대 커버를 벗겨 지정된 곳에 버린다. 어제 다 싸둔 배낭과 침낭, 에코백을 들고 살며시 방을 나온다.


복도에 소지품을 두고 필요한 것만 챙겨 화장실로 직행한다. 세수와 양치를 하고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 나온다. 그사이 깨난 순례자들의 핸드폰 조명이 복도를 두리번거린다. 두었던 소지품을 그대로 들고 신발과 스틱을 챙겨 능숙하게 밖으로 빠져나온다. 여긴 2층이라 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저 아래 왔다 갔다 춤을 추는 헤드랜턴 쪽으로 내려간다.


매일 다른 곳에서 맞이하는 순례길 아침 루틴은 보통 이런 식이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1층 식당이 잠겼던지 모두 마당에서 채비하고 있다. 드문 아는 얼굴이 보인다. 첫날 오리손 산장에 올랐을 때 세종 쌤들 말고 또 다른 한국인 부부 선생님들이 있었다. 뒤쪽에 계셔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었다. 초반에 만난 사람들을 다시 만나면 반가움이 두 배가 된다. 보통 같은 기수들끼리 동료애가 특별한데 그런 비슷한 느낌이다.


한국인 쌤들은 거의 준비가 되었던 것인지 금방 출발했다. 이제 남은 사람 중에 내가 아는 얼굴은.. 오호라, 내가 좋아하는 데이빗이 있구나. 그는 수염이 덥수룩한 친구와 아직 채비 중이었다. 초반 어두운 길은 이 사람들 뒤를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하니 손이 엄청 바빠졌다.


6:15 am 까미노 길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다른 알베르게에서 나오는 순례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앞서 걷던 수염 친구가 갑자기 멈추더니 배낭을 내려 뭔가를 찾는다. 중요한 걸 놓고 왔나 보다. 숙소에 얼른 다녀오겠다며 뒤돌아 내 옆을 역으로 지나쳐 간다. 데이빗은 천천히 다녀오라며 기다려 주고 있다. 나는 그런 데이빗을 지나쳐 갔다. 어차피 그들은 나보다 걸음이 빠르니 내가 조금 천천히 걸으면 금방 따라 잡힐 것이 확실하다.


그것 봐. 금방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수선했던 숨소리와 발걸음은 차차 안정적인 리듬을 찾아갔다. 그러다가 처음 듣는 노래를 조용히 한 소절씩 낮게 부르기 시작했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나는 그걸 듣는 게 좋았다. 훗날 누군가 까미노에서 가장 낭만적인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순례자들의 숨소리와 발소리만 들릴 때 누군가 장난스러운 노래를 흥얼거리면 그것은 우리의 노래가 되었다고.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찬란하다.

눈이 시리다.





역시 어제의 걱정은 기우였다. 1시간 20분 남짓 걸어가니 길 중간에 한 푸드트럭이 빛을 내며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세타 한가운데에서 해돋이를 보면서 커피를 마실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오늘의 모닝커피를 시키고 데이빗, 수염 친구와 자리를 잡았다.


리카르도와의 첫 만남을 나는 이날로 기억한다. 수염이 덥수룩한 포르투갈에서 온 리카르도. 젊지만 영리하고 귀엽고 다정한 사람. 우리는 각자 알고 있는 푸드트럭에 대한 얘기를 조금 나누다가도 해가 뜨는 풍경에 용건도 잃고 수평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이곳에 도착해 커피 한잔을 하고 있다니. 이 타이밍 정말 말도 안 돼.


테이블이 몇 개 없어 계속 자리를 잡고 있을 수는 없다. 계속해서 걸어오는 사람들을 위해 곧 일어나 다시 메세타 속으로 저벅저벅 들어간다.


이제 다시 혼자만의 시간이다.


혼자 걸어가는데 마음속에 헤매는 당신들이, 시크릿 가든의 길라임처럼 자꾸 함께 걷는다. 나를 괴롭히던 너. 어리석은 나. 내가 떠나보낸 사람. 내가 잃어버린 사람. 욕심나던 시간. 채우지 못한 술잔. 회답 없던 편지.

시끄러워. 다 쓸데없다.


그래도 차곡차곡 쌓이는 너의 목소리.

그래. 내가 너를 이해하게 될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너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너를 생각해 주마.


내 속이 시끄러워지면 그것이 가득 차서 한바탕 게워 내고 싶을 때까지 기다린다. 마침내 게워 내고 나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마음이 비워지고 주변의 목소리가 새롭게 들리곤 한다.

누군가 그랬다. 자연은 결코 조용하지 않다고.

물소리, 새소리, 해가 뜨고 지는 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이웃의 소리, 친구의 목소리가 내 안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그 자체로 나에게 온다.






Everyone is your Neighbor


길의 소실점에 뭔가가 떠오르더니 드디어 첫 번째 마을, 깔사디야 데 라 꾸에사(Calzadilla de La Cueza)에 도착했다. 단 한 명의 순례자도 못 보고 지나칠 수 없도록 벽화와 화살표가 그려진 건물은 햇살을 제대로 받으며 환하게 빛이 났다. 콜라와 바나나를 먹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 한국인 몇 분이 와있어서 잠시 합석했다. 아침에도 뵈었던 한국 선생님들(부부)과 드디어 제대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부산에서 오셨으니 부산 선생님들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함께 있던 YS 언니와도 처음 인사를 했다.


분명히 낯을 가리는 편인데 외국에 있으니 한국 사람들이 낯설지 않다. 나도 모르게 수다쟁이가 되고 호탕한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하니 이게 무슨 일인가! 숙소 예약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예약한 숙소를 알려드렸다. 점점 순례자가 많아져서 기념사진 하나 찍고 혼자 바를 빠져나왔다.


이제 두 시간 정도 더 걸어가면 될 것 같다. 완만한 오르막 내리막이 나오고 부산 선생님들은 금방 또 나를 따라잡으셔서 엎치락뒤치락 대화도 나누며 갔다. 조금 심심한데 싶으면 어김없이 나오는 길거리 작업들. 오늘은 누군가 돌멩이로 길을 꾸며 놓았다. 돌멩이로 표시된 화살표와 하트가 지치지 말라고 우리를 응원한다. 그러다가 하트 안쪽에 작은 명함 같은 게 있어서 들여다보았다. 수십 번도 들어본 평범한 문구가 난데없이 심장을 흔든다.


"Everyone is your Neighbor"





마을 초입에 위치한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한적한 휴양지의 호텔 같기도 하고 막 뭔가 고급진 느낌이 새롭다?! 까미노 친구들 3명(소은, 이반, Y)과 함께 예약했더니 개별 화장실이 있는 방 하나로 안내해 준다. 아마 원래 호텔로 지어졌을 것만 같은 구조다. 호텔로는 운영이 잘 안 되는지 더블 침대 하나 있던 방에 2층 침대 2개를 넣고 알베르게로 운영하는 것 같았다.


친구들은 어디쯤 왔을까? 그러고 보니 오늘 길에서 한번 마주치지 못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나는 일과를 후딱 해치우고 샌드위치와 맥주를 주문해 마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마당에서 까미노 길이 보여서 뒤이어 도착하는 순례자들을 맞아줄 수 있었다. 고령의 순례자 그룹이 오늘 아주 힘들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들어온다. 마당에 있던 순례자들이 같은 마음이 되어 이들에게 박수와 엄지척을 보내주었다.

모두 수고했어요. 오늘도 수고했어요.

이들도 답례하듯 수줍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까미노 친구들이 나란히 들어온다. 마당에 있는 나를 먼저 본 Y는 이미 저기서부터 한국어로 "누나! 누나!"를 연신 외치며 걸어오고 있다.


오늘 쉬어가는 마을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플라리오스, 역시 워낙 작은 마을이라 산책할 일도 없이 오늘은 숙소에서 쉬기로 한다. 마침 숙소도 호텔 같으니 이런 게 바로 호캉스 아니겠는가!


오전에 바에서 만났던 부산 부부 쌤들과 YS언니가 같은 숙소로 들어왔다. 약속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저녁식사 때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또다시 작은 원이 된 우리는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눈다. 우연히 부산 쌤의 직업이 항해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항해술이라니! 원피스의 모험가 루피(사실은 나미가 항해사지만)가 떠오르잖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로비를 지나는데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았는데, 와 이게 누구야!

첫날 론센스바예스에서 만났던 이탈리아 아저씨 마카엘이 함박웃음을 하고 서 있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요? 잘 지냈어요? 보고 싶었어!"

우리는 얼굴이 벌게져서 서로 와락 하고 껴안았다.


그때는 둘 다 혼자였는데. 나도 친구가 생겼고 미카엘도 친구와 함께였다. 까미노에서 모든 것이 서툴렀던 우리가 조금은 익숙한 순례자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니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 론센스바예스 침대에 온통 물건을 꺼내놓고 가방을 어떻게 싸야 할지 모르겠다며 투덜대던 미카엘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한데.

여기까지 무사히 잘 걷고 있군요.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둘 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이곳의 마당이 참 마음에 들었다. 마당에 있으니 해가 지면서 세상이 온통 오렌지색으로 물든다. 와.. 이건 정말 스페인에서만 볼 수 있는 스페인의 색이다..! 마음이 더없이 따듯해진다.


내일은 2일 동안 못 봤던 메그와 다시 조우한다. 그녀에게 보고 싶다고, 할 말이 많다고 메시지를 보내었다.





Bonus!

- 알베르게 : Albergue Los Templar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