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치료받을 수 있다. 다만, 기다릴 수 있다면.
Good luck. 행운을 빌어요!
해맑은 간호사의 말과 함께 전화는 끊겼다.
열은 파라세타몰(타이레놀)을 먹고도 39도까지 올랐고 기침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지역 보건소에 전화해 진료 약속을 잡으려 했지만 돌아온 말은 이랬다.
“아직 젊고 건강하시니, 몸이 이겨낼 수 있어요. 시간이 없어서 약속을 잡아드릴 수 없습니다. 파라세타몰을 드시고, 시간을 두고 지켜보세요. 행운을 빌어요!”
황망했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 말 그대로 지켜보았다. 하루 세네 번 파라세타몰을 챙겨 먹으며 꼬박 일주일을 누워 있었다.
그리고 출근.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기차역에서 사무실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하지만 그날은 30분 넘게 걸렸고,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숨 쉬는 것이 힘들었고 얼굴은 부어올랐다.
천식이었다.
나는 그게 천식인 줄도 몰랐다. 한국에서는 사소한 증상만 있어도 병원을 찾았으니까.
그만큼 무지했다. 한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시 보건소에 전화했다. 침착하게 증상을 설명했고, 천식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밖에 나가 계신 정도면 심각한 건 아니에요.
요즘 기침 환자가 많아서 약속 잡기 어렵습니다.
나는 그날도 약속을 잡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밖에 나가 있다는 것이었다. 밖에 나갈 수 있으면 아픈 게 아니라는 논리.
이 얘기를 스웨덴인 동료에게 했더니, 놀라운 조언이 돌아왔다.
“설명하지 말고 울어. 울면서 너무 아프다고 해. 그렇지 않으면 약속 안 잡아줄 거야. 과장해서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안 만나줘. 약속 잡히면, 병원 갈 때 씻지도 마. 최대한 아픈 걸 보여줘야 해.”
충격이었다. 울어야 한다니. 왜 그렇게까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정말 울 수밖에 없었다. 기침은 더 심해졌고 숨을 쉴 수 없었다. 결국 울면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제야 들려온 말.
“지금 바로 야간 센터로 오세요.”
그렇게 3주 만에 처음으로 의사를 만났다.
나는 생전 처음 인헬러라는 걸 보게 되었고, 그날 이후로 늘 곁에 두고 산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난 지금, 내 폐활량은 정상인의 80%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잦은 감기 증세로 다시 병원을 찾았고, 이번엔 전문의 진료와 엑스레이를 예약해주었다.
진료일은? 9월 17일. 지금은 7월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2월.
너무 개인적인 사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몇 가지 지표를 확인해봤다.
스웨덴의 위암 5년 생존률은 약 40%. 한국은 약 76%로 OECD 1위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
한국은 대개 이렇게 의료에 접근한다:
원하는 진료과와 병원(의원, 종합병원, 대학병원 등)에 방문
바로 진료 (대학병원은 예약이 필요하지만 진입이 막히지는 않는다)
스웨덴은 다음과 같은 구조다:
보건소에 전화 상담
간호사가 진료 필요 여부 판단
진료 필요 판단 시, GP(General Practitioner, 일차 진료 일반의사) 에게 케이스 전달
의사가 진료 필요 여부 판단
진료 필요 시, 수 주후 진료 예약
진료 시작
즉, 첫 진료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아예 진입 자체가 좌절될 수도 있다. 설령 통과하더라도, 대기 시간은 매우 길다.
OECD Health Policy Studies ‘Waiting Times for Health Services’에 따르면, 스웨덴 환자의 24%는 GP로부터 당일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미국이랑 한국에서 왔다고? 스웨덴 의료 시스템 어때? 정말 좋지?
스웨덴에서 교사로 일한다는 한 사람이 우리에게 했던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접근성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의료 시스템이 심각하다고 알려진 미국보다도 더 뒤처진다.
OECD 자료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전문의를 만나기까지 한 달 이상 기다린 환자의 비율은 스웨덴 52%, 미국 27%였다.
위 리포트에서는 한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는 관련 통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왜일까?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기 시간을 정책적으로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느냐’는 질문에, 스웨덴은 ‘매우 중요’라고 답한 반면, 한국은 ‘중요하지 않음’이라고 응답했다.
기다림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기에, 한국에서는 이 주제로 연구조차 이뤄지지 않는다.
물어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건강검진 처음 받아봐. 엑스레이도 처음 찍어봐. 난 건강한데!
과잉의료 아닐까?”
한국으로 파견 온 스웨덴 동료가 했던 말이다. 예방보다 대응, 증상이 나타나야 의사를 만날 수 있는 스웨덴식 의료의 전형이다.
한국에서는 20세 이상 건강보험 가입자(외국인 포함)는 국가가 제공하는 정기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다. 대부분 무료 혹은 저렴하다. 사업주는 근로자의 검진을 법적으로 의무 지원해야 하며, 이 시스템 덕분에 조기 진단율은 자연스럽게 높다.
스웨덴은 정기 건강검진이 없다. 과잉검진은 해롭다는 인식 때문이다. 일부 암 스크리닝은 있지만 제한적이고 지역별로 차이가 있다. 회사도 검진을 제공할 의무가 없다. 증상이 생기기 전에는 의료 시스템과 접촉할 기회조차 없다.
결론적으로, 스웨덴과 한국은 모두 “모두를 위한 의료”를 표방하지만, 제때, 필요한 진료를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매우 다르다.
“그래도 스웨덴은 의료비용이 거의 안 들잖아?”
맞다. 일정 금액 이상이면 무료다. 하지만 그 ‘이상’까지 갈 수 없다면?
아파도 병원 문턱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면 치료비가 무료라는 건 무의미하다.
결국 진입장벽을 넘기 위해선 “얼마나 아파 보이느냐”, “얼마나 과장하느냐”가 기준이 된다. 애매하면 진료는 없다.
그리고 여기에도 자본의 그림자는 있다.
스웨덴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공공 병원, Karolinska Universitetssjukhuset이 있다. 이 병원의 ‘성공’ 뒤에는 고가의 민간 진료 서비스가 존재한다. 공공 병원이지만, 자본에 닿은 이들에게는 그 문이 쉽게 열린다.
스웨덴 노동자 중 약 13%는 사설 의료보험에 가입해 민간 전문의, 건강검진 등 공공 시스템보다 빠른 진료에 접근한다. 가입자는 대부분 고소득층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은 민간 병원을 찾고, 필요하다면 Karolinska 같은 대형 병원이 있는 스톡홀름으로, 심지어 해외로 ‘의료 쇼핑’을 떠난다.
그 사이, 지방에선 여전히 일반의 예약조차 어려운 현실이 이어진다.
‘모두에게 열린 의료’라는 이상 아래에서도, 계층 간 격차는 분명히 존재한다.
의료의 부익부 빈익빈. 스웨덴이라고 다르지 않다.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것과, 모두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스웨덴은 그 차이를 알려준다.
이 나라에선 왜 죽는 지 알고나 죽을까.
기회는 평등한데, 출발선은 왜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