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아, 머리 아픈거 모르겠고 그래서 정답이 뭔데?" 자주 마주치는 문장이지만 실제 입밖으로 내는 소리라기 보다는 마음 속 메아리에 가깝다. 아, 욕망과 정념이 뒤섞인 인간 세상에는 복잡한 일이 많다. 그 복잡한 것들 중 대다수는 밉고 가시돋힌 것들, 때로는 증오에 가까운 심성들이니 웃는 얼굴로 품기에는 힘겨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요철들을 마주할 때마다 속도를 줄이고, 덜컹거림을 애써 참으며 바퀴를 넘다보면 피로하다. 한달음에 뛰어넘거나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 때마다 떠올리는 것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이고, 그걸 단칼에 끊은 알렉산더 대왕이다. 겉으로는 세상에 답이 어딨어, 말하면서도 내심 되뇌인다. "그래서 정답이 뭔데? 누군가는 알고 있을거 아냐?"
그러나 얼마 전에서야 정답은 진짜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기자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에서였다. 그 수업은 워마드, 최저임금, 난민, 은산분리 등 굵직한 주제에 대해 자신만의 관점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한 이슈를 파악한다는 건 방대한 자료조사와 이론적 탐구를 동반하는 지난한 작업이었다. 게다가 "반박이란 지엽적인 팩트가 아니라 그 논리의 최선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논쟁의 한 갈래 파악하기도 힘든 와중에 골치를 아프게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신기하게도 불가해하던 현상이 어떻게든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 이런 사실들을 빠르게 엮어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 좋은 기자들의 할 일이구나. 동시에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 '복잡한 세상을 복잡한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다소 기운 빠지는 결론을 얻었다.
사실 이런 종합적인 이해를 요하는 기사들은 대부분 기자의 몫이 아니다. 보통은 하루하루 쏟아지는 무수한 사건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바빠 사건의 맥락이나 사회적 함의씩이나 짚어낼 틈이, 심지어 그런 분석이 온당한가에 대한 문제까지 검토해볼 여유까지는 없다. 공익에 기여한다고는 하지만 기자 또한 엄연히 월급쟁이 직장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시작한 유사(?)언론사 인턴을 하면서도 절실히 느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대해 사실 전달을 넘어 인사이트까지 담은 콘텐츠를 찍어내는 일. 그것도 하루에 한 건 꼴로. 이건 양심의 문제가 아닌가 싶지만 그런 식으로 콘텐츠 판은 돌아간다. 나는 점차 회의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내가 수업을 통해서라도 이해의 순간에 닿을 수 있었던 건 복잡한 세상의 복잡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복잡하게 생각하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품을 기울일 틈을 주지 않는 판에서 뭐가 가능할까?
돌이켜보면 내가 꿈꿨던 것은 계도이기도 하고 화해이기도 했다. 모두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고, 노력하는 사회. 선의를 가지고 그 사이를 부지런히 왕복하는 것이 기자의 몫이라 믿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신념을 선배 기자들이 갖지 않아서 한국이 이런 꼴이 됐나? 어른들의 세상은 내 상상 이상으로 견고한 곳이었다. 이해 관계로 인해서, 신념과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서, 체면으로 인해서 물러설 수 없는 각자의 절벽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렇게 갈라선 사람들에게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일장연설을 하는 게 무슨 의미씩이나 있을까? 전쟁터에서 말로 길을 놓고 상호이해와 신뢰를 쌓아 세상을 바꿔 나가겠다는 발상은 얼마나 나이브하고 무력한가. 하다 못해 예수나 짜라투스트라(물론 가공의 인물이지만) 같은 인물들도 대중에게 이해 받지 못해 수난을 당한다. 대중이 못났다고 말하려는게 아니다. 그만큼 서로 입장과 지향점이 다르다고 얘기하고 싶은 거다.
그리고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었다. 이 책에서 가장 크게 감명받은 지점은 이상과 현실을 마음 속에서 조율하는 그의 균형감각이었다. 한국 사회의 전근대적 면모와 서구 사회의 근대성을 비교한다. 하지만 동시에 비교자를 자청하는 그 자신도 한국 사회의 중력장에 속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게 잘못됐으니 당장 뜯어고쳐야 한다고 강변하지도 않는다. 대신 남을 바꾸기 보다는 자기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보자고 권유한다. 나였으면 손이 근질근질 했을거다. 어느 정도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판사겠다, 그간 재판을 통해 들여다본 사회의 단면에 대해 논할만큼의 식견을 갖춘 지식인이겠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몫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편을 택했다. 판사로서의 업무에 충실하면서도 그 권위에 취하지 않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거창하게 '개인주의자 선언'씩이나 타이틀을 달았지만 그에 비해 내용은 소박했다. 세상에 내 몫만큼만 기여할 수 있다는 인식. 각자가 각자의 몫을 하며 살자. 세상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청춘의 패기이기도 하지만 한켠으로는 현실 정합성을 잃은 망상에 불과하기도 하다. 사회 초년생이 기자가 된다고 어느 순간 갑자기 혼란한 세상을 뒤집을 혁명가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구나. 반성과 위안의 계기가 된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