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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Jan 14. 2019

'팔기 좋은'에서 '살기 좋은'으로

유현준 -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송도는 우리 동네지만 이곳의 거리를 거니는 감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삭막함이다. 걷기에 좋은 환경이지만 걷는 맛이 안 난다. 나는 그저 새로 이사 온 동네의 풍경이 익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지나쳐왔다. 하지만 유현준 교수의 책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의하면 문제는 ‘휴먼 스케일’이었다. 간척 매립지 위에 세워진 이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한꺼번에 얻어진 부지의 구획을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주거지역, 상업지역, 연구지역 등으로 분할했다는 점이다. 집을 나선 뒤 걷고 걷고 또 걸어본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수 없다. 물론 한국의 어느 도시도 ‘아파트 숲’이 아닌 곳이 없긴 하다. 그러나 이곳은 매립지다. 산이 없다는 뜻이다. 단조롭고 거대한 격자형 블록 구획에 끝도 없이 이어진 평지, 그리고 그 시야를 점유하는 형태는 모두 직사각형의 콘크리트-철근 건물들뿐이다. 그나마 새파란 통유리 외벽을 가진 중심부 아파트들이 도시의 아이덴티티를 간신히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신도시 계획 당시 ‘선망 받는 최첨단 도시’로서의 송도국제도시의 이미지를 구현하고자 했다면 도시민들을 위한 녹지 공간 배치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대강 떠올려 보더라도 벌써 송도의 특대형 공원 너댓군데가 머릿속에 스쳐간다. 그 중에서도 센트럴 파크는 공원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러나 내게 센트럴 파크는 공원이라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야 하는 행사를 위한 행사장에 가까운 이미지다. 센트럴 파크에는 ‘다이나믹’이 없다. 지면의 고저가 없고, 나무처럼 시야를 가릴 만한 장애물도 없어서 모든 방향으로 시야가 트여있다. 일단 어느 곳에서든 서면 공원의 어느 곳이든 전부 다 내다볼 수 있다. 그 결과 이곳에 있는데도 이미 그곳에 가있는 기분이 든다. 그나마 공원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인공 강을 이용한 수상레저 콘텐츠가 볼거리를 제공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원 자체의 매력은 미약하여 ‘송도 센트럴 파크’ 이미지로 검색하면 센트럴 파크에서 ‘삼둥이 아파트(자이 센트럴파크 1, 2, 3)’와 동북아 트레이드 타워의 독특한 외관과 야간 조명을 배경으로 한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반면 한 블록 건너에 있는 해돋이 공원의 경우 사정이 조금 다르다. 일단 센트럴 파크보다 송도의 중심지의 접근성이 좋다. 정가운데 강이 흐르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몇 개의 다리로 중앙의 공간이 구성되어 있는 센트럴 파크와는 달리 해돋이 공원은 서너개의 각기 다른 테마를 가진 중앙 공간을 산책코스와 우거진 나무숲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다. 해돋이 공원의 중앙 공간은 분수대이자 가동되지 않을 때는 광장 형태를 갖는 빈 공간, 호수와 녹지가 뒤섞인 공간, 나선형의 오르막길을 가진 언덕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면적은 센트럴 파크보다 적지만 훨씬 더 다양한 면모를 숨기고 있는 공원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좋게 평가하고 싶은 것은 내가 ‘꼬꼬마 동산’이라고 부르는 언덕이다. 송도에서 특히 귀한 높은 지형의 전경을 선물해주기 때문이다. 산이 없다보니 과장 조금 더해서 지평선이 그대로 내다보인다. 정상에 차양막과 벤치도 설치되어 있어 탁 트인 시야가 주는 포만감과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전 국토가 산으로 둘러싸인 한국에서 이런 풍경은 아마 송도에서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장애물들로 차단된 시야와 걷는 속도에 맞춰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들은 이 공원의 이벤트 밀도를 높이고 걷는 재미를 더한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송도에 센트럴 파크를 보러 오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꼭 해돋이 공원도 같이 구경해보라고 권유한다. 


공원 구경을 끝마치고 피로해진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현관문을 열면 복도가 좌우로 가로지르고 있다. 왼쪽으로 돌면 내 방과 동생 방, 화장실이 있다. 오른쪽으로 돌면 베란다, 주방, 거실, 안방이 있다. 신발을 벗은 나는 왼쪽으로 돈다. 엄마와 아빠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계신다. 부모와 자식의 공간이 복도를 중심으로 정확히 좌우 절반으로 갈린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송도로 이사 오던 2011년 첫 해, 아빠는 “이렇게 각자 찢어져서 방에 쳐박혀 있을 줄 알았으면 이사 안 왔어!”라고 하신 적이 있다. 넓은 집으로 이사 온 것이 가족을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후회된다고 하셨다. 가족들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기에 항상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이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우리 부모님이 새 집을 계약할 때 도면과 모델 하우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 것 같냐고 말이다. 채광이 좋은 거실의 통유리는 눈이 부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빛은 거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 가족의 소통에 있어서는 오히려 깊은 그림자를 남기고 말았다. 시행사가 약속한 화목한 가족의 삶은 여기에 없었다. 내가 사는 공간에 대해 너무 박한 평가를 내려버린 걸까. 하지만 “건축가는 먼저 사람의 행위를 디자인해야 한다.” 내 눈에 유현준 교수의 이 문장은 팔기 좋은 도시가 아닌,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어야 된다고 웅변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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