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by 생못미

뜨겁게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그런 사람의 전형으로 유시민을 떠올린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그저 머리는 좋지만 싸가지 없는 과거 정치꾼의 이미지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저렇게 옳은 소리를 저토록 싸가지 없이 말하는" 유시민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비정치인중에 탄핵정국이 낳은 두 명의 스타가 있다면 첫 번째는 손석희, 그 다음은 유시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손석희가 인기를 얻는 과정 속에서 저널리즘의 중립성 혹은 정확한 보도와 관련해 이미지 소모가 있었던 반면, 유시민은 여러 매체를 통해 그가 꾸준히 쌓아올린 말들을 딛고 그 위에 단단하게 서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의 말은 상대를 해치려 들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상대가 보지 못한 것을 알맞은 눈높이에서 멀리 일러주는 듯한 말하기를 구사한다.

이렇게 입장이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것은 그와 대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화로서 이해가 싹틀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혹여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빗겨나가더라도 차이를 감내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의 씨앗이 실패로부터 싹틀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싹이 하나라도 돋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나의 의문형 문장 속에 타인의 입장을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결심인가. 타인은 내 문장 속에서 마치 히트곡의 후렴구를 만난 것 마냥 익숙한 흔적에 반응하며 기꺼이 입을 뗄 수 있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중의 공감대를 무리 없이 이끌어내고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있는 인물조차도 수긍시키는 말씨를 생각해보면 앞의 평가는 너무 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불완전한 과거의 모습이 남아있더라도 자신의 그릇을 받아들이고 사회에서 가장 크게 공헌할 수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두고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지려 하지 않고 부족함을 감당할 수 있는, 분수에 맞는 자리에서 만족하고 지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고작 만족을 못해서 몰락한 사람을 수 없이 많이 목격해왔다. 적어도 지금의 그는 한 차례 추락을 겪었지만 이후 누구보다도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그러나 온화한 유시민의 이미지 위로 항상 겹쳐보이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그 사진에는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찍힌 초췌하지만 분노와 비통함으로 이글거리던 유시민의 눈빛이 담겨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에 압도된 표정이라기 보다는 그 감정을 어떤 대상에 투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다. 이때 그가 무엇을 봤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나는 모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역시 내가 어렸을 때의 일이라 크게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노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유시민의 인상만을 거칠게 파악하고는 오독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러한 역사를 거쳐 훗날 내게 다가온 피상적인 유시민 역시 그의 단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대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가능할까? 나는 그에게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배운다. 사랑하기에 지키고, 사랑하기에 싸운다. 차가운 수갑을 차고 재판정에 들어섰던 그와 같은 나이의 내 모습을 돌아본다. 그는 학생 시절 썼던 항소이유서의 문장을 여전히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그의 그림자 아래서 자문해본다. 그는 인간 도덕과 민주주의의 점진적 발전을 믿었다. 아, 나는 무엇을 믿고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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