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파게티는 매운맛이지.
할미는 거실 한쪽에 가방을 내려두고는 지체 없이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떨어져 있을 때도 할미가 늘 강조하는 것 세 가지, 잘 챙겨 먹기, 차 조심하기, 행복하기 중 제일 으뜸가는 일이다. 전화로 수 백번은 더 듣던 말이니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오늘의 저녁을 고민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무엇보다 전라도 출신인 할미의 손맛은 동네서도 정평이 났기에 올 때마다 '오늘은 뭐 먹지' 한 번은 생각해주는 게 예의다. 잡채, 떡볶이, 삼색나물, 호박전, 고구마튀김, 동치미, 충무 김치, 강된장 쌈.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음식들. 할미의 대표 음식은 줄줄이 소시지만큼이나 많고, 솜씨 또한 '기깔'나다.
그래서 뭘 먹고 싶다고 했냐고? 다름 아닌 인스턴트의 대표 주자 '짜장 라면'이다. "할미, 짜파게티 끓여줘." "짭파겟투?" 할미는 큰 백팩에서 주섬주섬 짜파게티를 꺼내 미는 손녀를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6시간을 달려 도착한 집에서 처음 먹고 싶은 음식이 '짜파게티'라니. 내가 할미여도 그런 얼굴을 했을 거다. 무거운 짐에도 택시를 타지 않고 굳이 걸어서 편의점에 들른 걸 보면, 마음을 쏟을 만큼 먹고 싶었나 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었다는 백세희 작가처럼 불현듯 짜파게티가 떠올랐고 간절히 먹고 싶었다. 10분 남짓이면 뚝딱 나온다는 것도, 변하지 않는 맛을 보장해 주는 것도 배고픈 내게는 큰 메리트다. 거기에 보통의 음식도 색다르게 만드는 할미의 손맛이 더해지면 이보다 특별한 음식도 없다.
할미는 날 키우면서 그 전에는 할 줄 몰랐던 요리를 배웠다. 분식점에서 곁눈질로 배운 떡볶이와 어묵 꼬치, 동네 아주머니에게 배운 유부초밥과 짜파게티 등 할미의 요리 비책에 손녀를 위한 음식이 하나, 둘 추가됐다. 까막눈인 할미는 조리법을 읽지 못한다는 걸 부끄러워했는데, 나를 위한 요리를 배울 때만큼은 자존심을 내려두고 사람들에게 묻고 어깨너머로 보며 익히셨다. "내가 오늘 저짝에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배워왔다. 거는 케챱을 넣대. 무 봐라. 맛있나?" 할미는 음식을 만들고 늘 수요자인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할미의 노고는 생각지도 않고, 가감 없이 솔직한 답변을 하고는 했다. "맛없어. 비린내 나." 대부분 첫 반응은 고생한 게 무색할 만큼 좋지 않았다.
그때마다 할미는 같은 음식을 또 만들고, 또 먹였다. 한동안 밥상은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도 오늘인 것처럼 박제됐다. 내 입에서 "오늘은 맛있다!"라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그 과정은 반복됐다. 손녀 입맛에 딱 맞는 최고의 조리법을 찾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실험인 것이다. 짜파게티도 그랬다. 제시된 조리법만 따라 하면 누가 끓이든 비슷한 맛을 내는 음식인데도, 할미의 끊임없는 연구는 까탈스러운 입맛을 지닌 손녀에게 안성맞춤인 음식을 찾아냈다.
할미의 연구 결과물은 이렇다. 첫 번째, 물이 팔팔 끓을 때 면과 후레이크를 넣고 살짝 야들야들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두 번째, 냄비에 물을 종이컵 반 컵 정도만 남기고 버린다. 세 번째, 짜장 가루와 올리브유를 넣고 약한 불에 졸이듯 볶는다. 그럼 면에 소스가 촥 베인 자박한 짜파게티 완성!
그렇게 먹고 싶었던 짜파게티가 상 앞에 놓였다. 신나서 먹을 줄 알았는데 이 놈의 눈물이 헤프다. 기분은 울적한데 짜파게티는 너무 맛있고, 여든이 넘은 할미에게 대접은 못할 망정 아직도 '해 줘'라고 말하는 자신이 한심스럽고... 눈물 젖은 짜파게티를 먹으며 감정의 폭우에 푹 잠기려는데, 따가운 마찰음이 귀를 스친다.
"또 우냐? 인자 울면 집에서 쪼까낸다. 울면 울 일만 생기는 기라."
나오던 눈물도 놀라 제 집을 찾아 돌아가게 만드는 할미의 등짝 스매싱. 역시 나란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눈물, 콧물 닦고 남은 짜파게티는 정신 '똑띠' 챙기고 먹는다. 서른 넘어서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우리 할미는 마음먹으면 진짜 쪼까내는 매운 사람이니까 붙어 있으려면 눈물은 제쳐둬야 한다.